죽부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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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竹婦人傳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1] 이 쓴 가전체 소설. 서거정이 만든 동문선 101권과 이곡의 가정집(稼亭集)[2] 에 실려있다.
고려 말은 성적으로 문란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성리학 학자였던 이곡은 이에 대해 일종의 열녀전을 써서 당시 시대상을 비판하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대나무를
2. 원문과 해석[편집]
원문 및 해석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죽부인전은 東文選卷之一百 부분에 실려있다.
夫人姓竹名憑。渭濱人篔之女也。系出於蒼筤氏。其先識音律。黃帝采擢而典樂焉。虞之簫。亦其後也。蒼筤自昆侖之陰。徙震方。伏羲時。與韋氏。主文籍。大有功。子孫皆守業爲史官。秦之虐也。用李斯計。焚書坑儒。蒼筤之後。寢微。至漢。蔡倫家客楮生者。頗>學文載筆。時與竹氏游。然其人輕薄。且好浸潤之譖。疾竹氏剛直。陰蠧而毁之。遂奪其任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니,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이다. 족계(族系)가 창랑(蒼筤)씨에서 났는데, 그 조상이 음률을 알아 황제(黃帝)가 뽑아서 악(樂)을 맡아보게 하였으니, 우(虞) 나라[3]
의 소(簫)[4] 가 역시 그의 후손이다. 창랑(蒼筤)[5] 이 곤륜산 남쪽으로부터 진방(震方)[6] 에 옮겨와 복희씨 때에 위(韋 책의 가죽끈)씨와 더불어 문적(文籍)을 주장하여 크게 공이 있어 자손이 대대로 다 사관(史官)의 업을 지켜 왔다. 진(秦) 나라가 포학한 때에 이사(李斯)의 계교를 써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묻어 죽이매, 창랑의 후손이 점점 한미하였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채륜(蔡倫)의 문객 저생(楮生 종이)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더불어 놀았으나, 그 사람됨이 경박하며 참언(讒言)을 좋아하여 죽씨의 강직함을 보고 슬그머니 좀먹어 헐어[7] 드디어 소임을 빼앗았다.
周有竿。亦竹氏。後與太公望。釣渭濱。太公作鉤。竿曰。吾聞大釣無鉤。釣之大小。在曲直。直者。可以釣國。曲者。不過得魚也。太公從之。後果爲文王師。封於齊。擧竿賢。以渭濱爲食邑。此竹氏渭濱之所起也。今子孫尙多。若箖箊䇹筳是已。徙楊州者。稱蓧蕩。入胡中者。稱篷。
주(周) 나라에는 간(竿)[8]
이 있었으니, 또한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太公望)과 더불어 위빈(渭濱)에 낚시질할 때, 태공이 갈퀴[9] 를 만드니, 간(竿)이 말하되, “내가 들으니 큰 낚시는 갈퀴가 없다 하나이다. 낚시의 크고 작음이 곡(曲) · 직(直)에 있사오니, 곧은 것은 가히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것은 고기를 얻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태공이 그 말을 좇아 뒤에 과연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齊) 나라에 봉함을 받았고, 간(竿)의 어짐을 천거하여 위빈으로써 식읍을 삼게 하니, 이것이 죽씨 위빈의 유래이다. 지금도 자손이 아직 많으니, 임(箖)[10] · 어(箊)[11] · 군(䇹)[12] · 정(筳)[13] 이 그것이요, 양주(楊洲)로 옮겨간 자는 조(條 세죽) · 탕(簜 대죽(大竹))라 일컫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는 봉(篷 편죽(編竹))이라 일컫는다.
竹氏大槩。有文武幹。世爲籩簋笙竿禮樂之用。以至射漁之微。載在典籍。班班可見。唯䇞性至鈍。心塞不學而終。至篔。隱而不仕。有一弟曰簹。與兄齊名。虛中直己。善王子猷。子猷曰。一日不可無此君。因號此君。夫子猷端人也。取友必端。則其人可知。娶益母女。生一女。夫人是也。緫角有貞淑姿。隣有宜男者。作淫詞挑之。夫人怒曰。男女雖殊。其抱節一也。一爲人所折。豈可復立於世。宜生慚而去。豈牽牛子之輩。所可覬覦也。旣長。松大夫以禮聘之。父母曰。松公君子人也。其雅操。與吾家相侔。遂妻之。
죽씨는 대개 문(文) · 무(武) 두 줄기가 있어, 대대로 변(籩)[14]
ㆍ궤(簋)[15] , 생(笙)[16] · 우(竽)[17] 와 같은 예악의 소용으로부터, 활쓰고 고기잡는 작은 용도에 이르기까지 전적에 실려 있어, 마디마디 볼 수 있다. 오직 감(䇞)[18] 은 성질이 지극히 둔하여 속이 막혀 배우지 못하고 죽었으며, 운(篔)[19] 에 이르러 숨어 벼슬하지 않았다. 한 아우가 있었으니 이름은 당(簹)[20] 으로 형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여 가운데를 비우고 저를 곧게 하였는데, 왕자유(王子猷)[21] 와 친하게 지냈다. 자유가 말하되, “하루도 이 군(君)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였으므로, 호를 차군(此君)이라 하였다. 대저 자유는 벗 취하기를 단정한 사람으로 할 터인즉,[22] 그 위인을 알 만하다. 당(簹)이 익모(益母)[23] 의 딸과 결혼하여 한 딸을 낳으니, 부인이 바로 그이다. 처녀 때에 정숙한 자태가 있어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24] 이란 자가 음사(淫詞)[25] 를 지어 떠보니, 부인이 노하여 말하되, “남녀가 비록 다르나 그 절개는 하나인데, 한 번 사람에게 꺾인 바 되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서리요.” 하매 의생(宜生)이 부끄러워 달아났으니, 어찌 소 끄는 무리가 엿볼 바이랴. 이미 자라나자 송대부(松大夫)[26] 가 예로써 청혼하니, 부모가 말하되, “송공(松公)은 군자이다. 그 평소의 조행이 우리 집과 서로 짝이 된다.” 하고 드디어 아내로 보내었다.
夫人性日益堅厚。或臨事分辨。捷疾若迎刃而解。雖以梅仙之有信。李氏之無言。曾且不顧。而况橘老杏子乎。或値烟朝月夕。吟風嘯雨。蕭洒態度。無得而狀。好事者。竊寫其眞。傳之爲寶。若文與可,蘇子瞻。尤好焉。
부인의 성질이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혹 일에 당하여 분별할 때에는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갬 같으며, 비록 매선(梅仙)의 신(信)이 있음과 이씨(李氏)의 말없음으로써도 한 번도 일찍 돌아보지 않았거니, 하물며 귤로(橘老)와 행자(杏子)이랴. 혹 안개 낀 아침과 달밝은 저녁을 만나 바람을 읊고 비를 휘파람할 제는 그 말쑥한 태도를 무엇으로 형용하기 어려워 호사자들이 슬그머니 그 얼굴을 그려 전하여 보배로 삼으니, 문여가(文與可)[27]
와 소자첨(蘇子瞻)[28] 같은 이가 더욱 그것을 좋아하였다.
松公長夫人十八歲。晚學仙遊糓城山。石化不返。夫人獨居。往往歌衛風。其心搖搖。不能自持。然性好飮。史失其年。五月十三日。移家靑盆山。因醉得枯渴之疾。遂不理。自得疾。依人而居。晚節益堅。爲鄕里所推。三邦節度使惟箘。與夫人同姓。以行狀聞。贈節婦。
송공(松公)이 부인보다 나이 18세가 위인데, 늦게 신선(神仙)을 배워 곡성산(穀城山)[29]
에 노닐다가 돌로 화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로 살며 이따금 위풍(衛風)[30] 을 노래하매 그 마음이 스스로 흔들흔들 하여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질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역사에, 그 해는 잊었는데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31] 으로 집을 옮겨, 취하여 고갈(枯渴)[32] 의 병을 얻어 드디어 고치지 못하였다.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사람을 의지하여 살았고, 만절(晩節)이 더욱 굳어 향리에서 일컬어졌다. 삼국절도사[33] 유균(惟箘 전죽(箭竹))이 부인과 동성(同姓)이라, 행장(行狀)으로써 위에 아뢰니, 절부(節婦)의 직함을 주었다.
史氏曰。竹氏之先。有大功于上世。其苗裔。皆有材。抗節見稱於世。夫人之賢宜矣。噫。旣配君子。爲人所倚而卒無嗣。天道無知。豈虛語哉。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죽씨의 조상이 크게 상고의 세상에 공이 있었고, 그 묘예(苗裔)[34]
들이 다 재능이 있고 절개가 있어 세상에 일컬음이 되었으니, 부인의 어짐이 마땅하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고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가 없었으니, 천도(天道)가 무지하다 함이 어찌 헛 말이랴.” 하였다.
瞻彼淇奧(첨피기오) : 저 기수가의 물굽이를 바라보니
綠竹猗猗(록죽의의) : 푸른 대나무 무성하고
有匪君子(유비군자) : 빛나는 그 어른
如切如磋(여절여차): 깎은 듯 다듬은 뜻
如琢如磨(여탁여마) : 쪼은 듯 간 듯
瑟兮僩兮(슬혜한혜) : 장중하고 당당하여
赫兮咺兮(혁혜훤혜) : 빛나고 훤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31] 화분을 상징[32] 나무가 말라가는 것[33] 삼국절도사 또는 삼방절도사로 번역한다.[34] 후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