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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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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878년 2월 7일
경기도 용인현 모현면 원촌리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1]
사망1943년 10월 3일
경기도 용인군
본관연일 정씨[2]
상훈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포은 정몽주의 19대손이다.

2. 생애[편집]


정철화는 1878년 2월 7일 경기도 용인현 모현면 원촌리(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원촌마을)에서 정몽주의 19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총명해 도학(道學)에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소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걸 개탄해하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던 1907년 7월 충주 주현의 친척집으로 가던 그는 이천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 의병대와 일본군이 교전하는 걸 보고 길을 피해 여주군 청안동의 사잇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의병대와 마주쳐 일본군 밀정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뒤 의진으로 끌려갔다. 이 의병대 지휘관은 방인관(方仁寬)이라는 인물이었다. 방인관은 정철화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오해를 푼 뒤, 그에게 의병에 가담할 것을 권고했다. 정철화는 즉시 수락하고 그와 함께 의병 항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방인관의 비서(秘書)로서 의병 14명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二毛山)에서 일군과 교전하였으며, 뒤이어 의병장 정병규(金炳奎) 휘하에서 의병 30여명을 거느린 두령이 되어 안성군에 들어가 죽산면 칠장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일병의 군수자금 1천5백 냥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또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등 구휼활동에도 힘썼다. 또한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일본의 통감부를 격파하려던 의병장 허위의 부하로써 활약하였음이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토벌 작전을 실시하면서 의병대가 흩어지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인솔, 상경하여 남대문안 사직동에 은거했으나, 1907년 9월 30일 끝내 탄로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뒤 유형 15년을 선고받았다.

한일병합 후 대사면으로 풀려난 뒤, 그는 1913년 9월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일원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 내각총리대신·조선총독 등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이다 1914년 4월 다시 체포되었다.

1915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해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32년 만주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1941년 귀환했고, 1943년 10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철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왕산리와 함께 연일 정씨 포은공파 집성촌이며, 지주사공파 종가 겸 정몽주 종가가 능원리 118-1번지에 있다. 독립유공자이자 포은공파 종손인 정철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29대손, 포은공파 19대손 화(和)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