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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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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년 ~ 1782년
1. 개요[편집]
몇몇 책을 참조하여 작성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여주, 자는 경명(景命), 호는 혜환(惠寰)이다. 이가환의 부친이며, 성호 이익의 조카이다.
18세기 남인의 대표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며 30년 동안 재야문형(在野文衡)으로 문권을 쥐고 있었으며,[1] 새로운 문풍을 주도하여 당대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시문을 많이 남겼다. 18세기 개성적 산문[2] 의 창작을 선도한 선구자이다. 당대 최고의 문사였음에도 현대에는 연암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3] 문집으로 <<탄만집(𢾡𢿜集)>>이 있다.
2. 생애[편집]
회재 이언적을 배출한 남인 명문가인 여주 이씨로 충남 예산 출생이다. 도승지, 대사헌을 역임한 이하진[4] 의 손자이며, 이침의 아들이다.[5]
1713년 6세에 부친을 여의고, 외가를 전전하다가 15세에 숙부 이익 문하에서 공부하며 성장한다. 1735년 28세에 생원시에 합격 하였으나 이후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평생을 포의로 살았다. 1742년 아들 이가환이 태어난다. 이익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실학 외에도 양명학과 불교, 도교에도 관심을 두었다. 근기남인(近畿南人) 외에도 제자 이언진 같은 여항문인, 강세황, 허필, 최북, 김홍도 등의 서화가와 교류를 나누었다. 1782년 사망하였고, 1791년 관직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호조 참판 예겸(戶曹參判例兼)이 증직되었으나[6] , 이조참판이던 이익운(李益運)이 이용휴를 이조판서 예겸으로[7] 고쳐 증직하였다. 이것이 논란이 되었는데[8] 정조는 그대로 이조의 직함으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링크
훗날 이가환이 신유박해로 사망하며, 이용휴의 글도 소실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집인 '탄만집(𢾡𢿜集)'도 필사본만 남아있고, 편차와 교정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3. 시문[편집]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독특한 작품을 남겼다. 시에서는 6언시, 연작시, 시어의 특이한 포치를 선보였고, 산문에서는 생지명(生誌銘), 특이한 서술 방식, 개방적인 문체를 시도했다. 인간의 내면, 삶, 죽음, 자아, 타자에 대해 성찰한다.[9]
몇 개나마 짦은 글들을 직접 보면 느낌이 온다.
이 집은 이 사람이 사는 이곳이다. 이곳은 바로 이 나라 이 고을 이 마을이고, 이 사람은 나이 젊고 식견이 높으며 고문(古文)을 좋아하는 기이한 선비다. 만약 그를 찾으려거든 마땅히 이 글 속으로 들어와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쇠신이 뚫어지도록 대지를 두루 돌아다녀도 끝내 찾지 못하리라.
차거기(此居記) - 안대회 역, 문장의 품격 참조, 53자가 전부인 매우 짧은 글.
나와 남을 마주 놓고 보면, 나는 친하고 남은 소원하다. 나와 사물을 마주 놓고 보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도리어 친한 것이 소원한 것의 명령을 듣고, 귀한 것이 천한 것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욕망이 그 밝은 것을 가리고, 습관이 참됨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이에 좋아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성냄과 행하고 멈추며 굽어보고 우러러봄이 모두 남을 따라만 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말하고 웃는 것이나 얼굴 표정까지도 저들의 노리갯감으로 바치며, 정신(精神)과 의사(意思)와 땀구멍과 뼈마디 하나도 나에게 속한 것이 없게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나의 벗 이처사는 예스러운 모습과 예스러운 마음을 가졌으며, 남과 담을 쌓는 마음을 베풀지 않고, 겉치레를 꾸미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는 지키는 것이 있어서 평생 남에게 구해본 적도 없고 좋아하는 사물도 없었다. 오직 부자(父子)가 서로를 지기(知己)로 삼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부지런히 일하여 스스로 힘써서 먹고 살 따름이었다. 처사는 손수 심은 나무가 수백에서 천 그루에 이르는데, 그 뿌리, 줄기, 가지, 잎은 한 치, 한 자를 모두 아침 저녁으로 물 주고 북돋아서 기른 것이다. 나무가 다 자라서 봄이면 꽃을 얻고 여름이면 그늘을 얻으며 가을이면 열매를 얻게 되니, 처사의 즐거움을 알 만하다.
처사가 또 동산에서 목재를 가져다 작은 암자 한 채를 짓고 편액을 달기를 아암(我菴; 나의 집)이라고 했으나, 사람이 날마다 하는 행위가 모두 나에게 연유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저 일체의 영화, 세리, 부귀, 공명은 나의 천륜을 단란하게 즐김과 본업에 갖은 힘을 다 쓰는 것과 견주어 외적인 것으로 여겼다. 단지 외적인 것으로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처사는 선택할 바를 안 것이다.
훗날 내가 처사를 찾아가 함께 암자 앞 늙은 나무 밑에 앉게 되면 마땅히 다시 '남과 나는 평등하며 만물은 일체이다'라는 뜻을 이야기 나눌 것이다.
아암기(我庵記) - 박동욱 역. 혜환 이용휴 산문 전집 참조.
사람들이 당일(當日)이 있음을 모르는 데서부터 세도가 그릇되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오로지 당일이 있을 뿐이다. 이미 지난 시간은 다시 회복할 방법이 없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아무리 3만 6천일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날은 그날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그다음 날까지 손쓸 여력이 없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저 한가할 한(閑)이란 글자는 경서에도 실려 있지 않고 성인도 말씀하지 않으셨건만, 그것을 핑계로 사람들은 세월을 허비한다. 이로 말미암아 우주에는 제 직분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또 이렇다. 하늘 자체가 한가롭지 않아서 늘 운행하고 있거늘, 사람이 어떻게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당일에 행할 일이 사람마다 똑같지는 않다. 착한 사람은 착한 일을 행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하지 않은 일을 행한다. 따라서 운수가 사납건 좋건 간에, 하루는 시간을 쓰는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하루가 쌓여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계절이 되고 한 해가 된다. 한 인간을 만드는 것도, 하루하루 행동을 닦은 뒤에야 크게 바뀐 사람에 이르기를 바랄 수 있다.
지금 신군(申君)이 몸을 수행하고자 하는데 그 공부는 오직 당일에 달려 있다. 그러니 내일은 말하지 마라. 아! 공부하지 않은 날은 아직 오지 않은 날과 한가지로 공일(空日)이다. 그대는 모름지기 눈앞에 환하게 빛나는 이 하루를 공일로 만들지 말고 당일로 만들어라.
당일헌기(當日軒記) - 안대회 역, 문장의 품격 참조
이용휴의 글이 실린 대중서들도 나와 있어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읽어볼 수 있다. 다음 기사도 혜환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