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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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봉균
2. 예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봉균



1.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봉균[편집]


성명신봉균(申鳳均)
생몰1866년 ~ ?
출생지황해도 평산군 상월면 대촌리
사망지미상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신봉균은 1866년생이며 황해도 평산군 상월면 대촌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말 평산군 일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일본 헌병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고 반감을 품었다. 이에 그는 4월 1일 노상돈 등과 함께 400명의 군중을 이끌고 기린주재소로 몰려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에 헌병대는 또다시 발포하여 3명의 사망자와 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상해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신봉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예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봉균[편집]


성명신봉균(申鳳均)
생몰1866년 1월 7일 ~ 1907년 10월 7일
출생지경상북도 풍기군 상리면 고항리
(현재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
사망지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초암사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신봉균은 1866년 1월 7일 경상북도 풍기군 상리면 고항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1월 향리인 풍기에서 8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거병했다. 이후 의병장에 추대되어 적성을 출발하여 주흘관(主屹關) 아래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날 관군이 내습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여 백운동 송림으로 옮겼다. 그런데 야밤에 적들이 내습하여 군졸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또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단신으로 초암사(草菴寺)에서 요양했다. 그러다 1907년 10월 의병을 재차 일으키려 했지만 1907년 10월 7일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유인석 의병장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본군에게 항거하다가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봉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