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이란 잘 익은 제철 과일 마냥 말랑말랑하고 또 보들보들한지라, 마음의 생채기가 났어도 별 일 있겠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흘리고는 시간이 흐른 후 그 부분이 나도 모르게 곪아있음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 자신의 마음을 반들거리는 과일처럼 빛내려면 우리는 상처의 순간을 그냥 흘려서는 안 된다. 환부를 짚어내고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어야 한다. 소중한 이를, 소중한 것을 각자 방식으로 잃었지만 꿋꿋이 살아내고 싶은 사람들을 통해 작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일 년 전, 엄마의 상을 치렀다. 일에만 매진해보려 하지만 회사 생활도 맘 같지 않다. 고민 끝에, 엄마가 남기고 간 낡은 슈퍼이자 친할머니부터 이어져 온 가업이었던 가맥집 영란슈퍼를 정리 차 다시 열었다. 임대 문의라 쓰여 붙여진 종이가 어느덧 너덜너덜해질 즈음. 가판대에 놓고 판매하는 복숭아를 누군가가 쿡 눌러 놓는 폭행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직접 잡기 위해 벼른다.
그리고 마침내 범행 현장을 맞닥뜨리는데! 어린아이의 소행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범인은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는 다름 아닌 세상을 떠난 엄마의 이름, 해숙이었다.
평범한 중년이지만 여태껏 미혼으로 살아온 남자. 중견기업에서 이십 년 넘게 몸담았고 치열하게 올라갔지만 해고당했다. 최근 들어 자꾸만 깜빡깜빡했고 그간 하지 않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이따금 현실과 꿈에 혼동이 왔다. 곧 그에게 내려진 진단명은 알츠하이머. 너무 골치 아프게 살아와서일까. 그의 회로는 곧 방전을 앞둔 듯했다. 강수의 머릿속 필라멘트가 끊어질 듯하다가도 다시 붙을 듯한 위태로운 그 순간에 어떠한 경위도 없이 불쑥 떠오른 세 글자, 강해숙. 잊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에게 열병을 안겨주었던 여자 강해숙! 그간 그녀의 존재를 지우며 살아왔지만. 머릿속이 점점 어지럽혀지며 본능적으로 그녀를 떠올린다.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긴 곳에 낡은 슈퍼의 정경과 탐스러운 복숭아가, 문제의 그녀가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