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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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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박수명(朴洙命)
이명박수명(朴壽命)
생몰1909년 12월 10일 ~ 1942년 1월 28일
학력진주공립농업학교 (現 경상국립대학교)
출생지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주약리
사망지경상남도 진주군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수명은 1909년 122월 10일 겨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주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으며, 26년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5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1931년 3월 하순, 진주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진주그룹을 조직하였다. 농민부·노동부·학생부 등 3개의 부서로 구성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매월 1회 책임자회의를 소집하여 운동방침을 토의하며, 대중을 동원하여 점차 회원을 늘려나갔다. 활동이 미약해지자 새로운 결사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32년 2월경, 박수명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및 경남적색농민조합건설본부위원회의 관련자로 체포되었다. 그는 대구경찰서에서 6개월 동안 취조를 받고, 경남경찰부로 호송되었다가 7월 15일 진주경찰서로 옮겨 다시 1개월 동안 취조를 받았다. 8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진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취조를 마치고, 8월 31일 예심으로 회부되었다.

1932년 12월 26일 1년간에 걸쳐 실시된 예심이 종결되었다. 1933년 3월 7일, 진주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90일 통산)을 받고 공소하였다. 1933년 4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90일 통산)을 받고 1934년 1월 28일 출옥하였다.

박수명은 1936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였다. ‘코민테른 12월 테제’와 ‘프로핀인테른 9월 테제’ 등을 지지하고, 각 지방에 적색노동조합·적색농민조합 등을 조직하여 이를 바탕으로 점차 중앙조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1937년 1월경부터는 본격적인 당 재건운동에 참여해 경남지방에서 조직 확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1937년 12월 2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미결구류 300일 통산)을 받고 1938년 4월 29일 출옥하였다. 이후 진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2년 1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박수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