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프라테스강|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땅이자, 오늘날의 [[바그다드]] 남서쪽에 있는 바빌론은 기원전 2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융성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빌론인]]이 아닌 [[아모리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수무아붐이라는 족장은 인접 도시 국가인 카잘루로부터 자신과 백성들의 독립을 선언했고, 최초의 [[고바빌로니아|바빌론 왕조]]를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바빌론은 가장 유명한 통치자인 [[함무라비]]가 지배하기 전까지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했습니다. 함무라비는 동맹, 배신, 정복으로 바빌론의 사회 기반 시설을 개선하고 국경을 확장했습니다. 함무라비는 범죄와 처벌을 처리하는 방법을 명시하는 [[함무라비 법전]]에서 발췌한 법으로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놀랍도록 자세하고 이성적입니다. 법전에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은 누구나 들어봤겠지만, 절도(소를 훔치면 원래 가격의 세 배를 보상하는 처벌을 받음), 의료 과실, 기타 범죄의 자세한 벌금도 명시해놓았습니다. 법전이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개념인 [[무죄 추정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함무라비는 군사 활동으로 인해 종종 자리를 비웠지만, 원거리 통치를 지속하며 빠르게 확장하는 제국에 개인적인 손길을 유지했습니다. 42년간의 통치를 끝낼 때쯤, 함무라비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바빌론]]이라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자리를 확립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부와 권력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바빌론은 기원전 1750년에 함무라비가 사망한 이후 몰락했습니다. 어떤 후계자도 거대 제국을 유지할 비전, 동맹, 군사적 위용을 가지지 못했습니다(누구도 함무라비처럼 생전에 신격화되지 못했습니다. 부응해야 할 기준이 아주 높았습니다). 함무라비의 직속 후계자인 삼수일루나는 함무라비가 세운 제국의 몰락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시리아인]]은 함무라비의 확장에 반발했고, 후계자들이 국경 사수에 실패하면서 바빌론은 다시 작은 도시 국가로 돌아갔습니다. 바빌론은 이후 몇백 년 동안 수 차례 전복, 약탈, 정복당했습니다. 흉작, 강력한 통치자의 부재, 외부 갈등 등의 방해로 인해 도시는 국경 내에서조차 안전한 발판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히타이트]]족, [[카시트 왕조|카시트족]], [[칼데아족]], 아라메아족, 아시리아족은 모두 잠시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바빌론은 카시트족의 통치로 인해, ('카란두니아시'라는 이름으로) 특히 바빌론은 수학, 약학, 점성학 분야에서 다시 번성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카시트족은 400년 넘게 도시를 유지하다가 다른 정복자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아시리아]]의 세나케리브 왕이 지배하던 아시리아족 통치 후기에는 [[바빌로니아]]가 끊임없이 불안과 반란 상태였고, 세나케리브는 도시를 몰락시키는 것으로만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도시는 불탔습니다. 세나케리브는 장벽을 부수고, 종교 사원과 궁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도시를 몰락시켰습니다. 세나케리브의 아들들은 이 행적에 충격을 받고 속죄의 의미로 아버지를 살해한 후 도시 재건을 도왔습니다. 칼데아의 나보폴라사르 왕은 기원전 612년에 도시를 다시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보폴라사르 왕은 동맹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인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을 고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볼거리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넘쳐나는 건축학적 기교로 [[에테멘앙키]] 신전과 [[이슈타르의 문|이슈타르 관문]]을 지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내를 위해 바빌론의 [[공중 정원]] 승인을 내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00년경의 다른 지역들처럼, 바빌론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넘어갔습니다. 왕 키루스 2세와 왕 [[다리우스 1세]] 밑에서, 바빌론은 9번 관할구 또는 지방의 수도 및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 수도가 되었습니다. 바빌론은 다시 한번 학자와 예술가들의 구미에 맞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는 200년간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특별한 구조적 개선 없이 세금이 인상되면서 도시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바빌론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다시 한번 도시에 부와 지식을 불러왔습니다. 지난 황금기의 반향이 12년간 지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알렉산더의 사망과 여러 장군들의 경솔한 제국 분할, 인구 일부의 '이동'이 결합되며 이 도시 국가는 다시 한번 상업적 침체기에 빠졌습니다. 정복과 파괴, 재건의 순환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은 학술적 및 건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우리의 역사에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공중 정원의 존재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바빌론은 건축학적인 경이를 자랑합니다. 바빌론은 정복 기간에도 완전히 파괴되거나 소금이 뿌려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정복자들은 일정 부분을 남겼습니다. 이슈타르 관문, 현판, 바닥 조각이 여전히 오늘날 이라크에 있는 고대 현장에 남아 발굴과 재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