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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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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만화가인 오이마 요시토키의 만화 <목소리의 형태> 와, 그것을 원작으로 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목소리의 형태〉의 평가에 대한 문서이다.
2. 원작 평가[편집]
목소리의 형태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서로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였지만 다시 만나 친구가 되고 서로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는 전인미답(前人未踏)[1] 의 스토리로 인해 많은 이목을 받은 작품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작가가 악역으로 규정한 인물은 없는 악역이 없는 작품으로 모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렸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단편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는 메시지를 잘 보여주었다.[2] 전체적으로 보자면 장애인과의 소통 및 이해,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주제의식과 캐릭터성을 붕괴시키지 않고 이야기를 끝마치는 데 성공해 만화의 짜임새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목소리의 형태는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 개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며, 사람과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작품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각 캐릭터의 감정선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있다.
다만 소재가 소재인지라 두 주인공이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였다는 설정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며 소재로 썼다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3][4]
2.1. 비판[편집]
이 작품을 혹평하는 쪽에서는 왕따 가해자의 자기 위안 판타지라고 비판한다. 작가도 그걸 의식했는지, 초반부 유즈루의 입을 통해 쇼코를 만나러 온 쇼야에게 자기 위안을 위해 온 거라면 돌아가란 말을 한다. 또한 몇 번이고 쇼야 본인의 독백을 통해,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본적으로 왕따는 피해자에게 엄청난 트라우마이며 보통 가해자와 재회하면 트라우마가 발동해 공포감과 증오감부터 들지, 연민이나 호감을 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작중에서 쇼코는 과거 왕따 가해자인 쇼야에게 원망, 공포, 증오 등의 불쾌한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다시피 한다. 오히려 항상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작품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측에서는 결국 가해자인 내가 그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해 주고, 예쁘고 착하고 순진하며 장애가 있어 내가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 즉 나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장애 캐릭터 모에,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을 제대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목소리의 형태에서 왕따 가해자를 옹호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쇼야는 절대로 '선한 주인공'이 아니며 작품에서도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절대로 쇼야의 행동을 옹호해주지 않는다. 왕따 가해자였던 쇼야는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으며, '왕따 가해자'라는 낙인이 찍혀 자신이 한 짓과 똑같이 왕따를 당했고, 중학생 때는 똑같이 왕따였고, 고등학생 때까지 외톨이로 살고 있는 데다가 그런 그도 자기혐오와 삶의 의미에 대해 비관하며 작중 초반 자살 시도까지 한다. 결국 신체적, 정신적으로 죗값을 치르려고 하며, 자신을 희생해서 과거에 왕따시킨 피해자였던 쇼코를 구하는 데까지 성장하는 캐릭터이다.[5]
쇼야는 자살하려는 쇼코를 목숨바쳐 구하다가 추락해 혼수상태에 빠진다. 이 때문에 쇼코 어머니와 유즈루는 다음날 병원에서 쇼야 어머니한테 도게자를 한다. 쇼코 어머니와 유즈루는 한때 쇼야를 몹시 증오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지금은 쇼야가 다친 것 때문에 도게자를 하며 사과한다는 것은 쇼야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위에 전술한 쇼코에 대한 평가는 쇼코라는 캐릭터를 완전히 잘못 분석한 것이다. 여주인공인 쇼코는 단순히 몹시 착한 성격인 게 아니라, 그저 자기혐오에 빠진 나머지 일부러 착한 이미지를 연기하는 캐릭터다. 원작에서 그렇게 나오기 때문이다. 작가도 언급했던 이야기로, 쇼코는 우에노와의 갈등을 겪으며 '나는 내가 싫다'는 본심을 드러낸 적이 있으며, 우에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대방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억지 웃음을 지으며 연기를 했던 것이라고 털어놓았던 적도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늘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는 쇼코의 태도는 쇼코의 성격이 마냥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마찰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도피성 연기를 하는 것이다. 즉 쇼코의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성격은, 왕따 피해자에 대한 환상[6] 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갈등 끝에 쇼코가 선택한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이라는 것. 쇼코에 대한 묘사가 애니메이션 버전보다는 낫지만 원작에서도 직접적인 부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은 마이너스 요소다. 애니메이션의 쇼코만 놓고 보면 상술한 쇼코의 억지 웃음과 같은 요소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착한 게 아닌가 싶을만 하지만, 원작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무슨 천사나 성녀처럼 보이는 쇼코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쇼코는 전형적인 왕따 피해자가 아니다. 쇼코는 쇼야한테 왕따를 당했을 때 "내가 왕따를 당하는 건 이시다가 나를 말렸음에도 노래를 끝까지 불러서 반에 폐를 끼친 나의 잘못에 대한 벌이다"고 생각했다.[7] 그래서 쇼야를 향한 입버릇이 계속 "미안해"였던 것이다. 그리고 쇼야가 학급재판에서 왕따 가해자로 낙인찍혀서 이제는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쇼코가 쇼야의 책상을 닦아주던 것도 "나 때문에 이시다가 왕따를 당했다"는 죄의식에 기반한 행동이다. 즉 쇼코는 애초에 쇼야를 용서를 해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왕따 가해자였던 쇼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쇼야는 자신이 예전에 버렸던 필담노트를 돌려주고, 수화까지 배워가며 자신과 소통을 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어 그때와는 다르게 개과천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쇼야를 친구로 받아준 것이다. 쇼코는 절대,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피해자에 대한 판타지를 담은 캐릭터라서 용서한 것이 아니다.[8] 이는 쇼코가 쇼야와는 생각이 다른, 또 다른 가해자인 우에노를 마주할 때마다 난처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것이 증명된다. 쇼코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쉽게 용서하지는 않는 성격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쇼코가 연애감정을 갖게 되는 과정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을지 몰라도 목소리의 형태를 개연성이 없는 가해자의 판타지라고 볼 수는 없다. 착해보이는 태도는 사실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쇼야의 경우 진심을 확인했기 때문에 용서해 준 특수한 케이스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애니메이션만 보면 뭔가 전개에 허전함을 느낄 수 있다.
애니메이션 마지막 장면에서는 친구들 전원의 얼굴을 한 번씩 비춰주면서, 이 인물들이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쇼코의 진심으로 웃는 얼굴을 떠올린 쇼야는 눈물을 터뜨리게 된다. 그동안 억지 웃음만을 지어왔던 쇼코가 진심으로 웃는다는 것은, 용서를 바라는 쇼야에게 있어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영화 심사회 이후 갔던 레스토랑에서 우에노의 농담에 쇼코가 웃음을 터뜨리자, 쇼야가 유즈루와 함께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이 나온다.
작품의 주인공이 무조건 착해야 한다는 법은 없고, 평화로운 만화만 그려야 한다는 법도 없다. 게다가 가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반성하는 이는 쇼야 뿐이고, 용서하는 것은 피해자 마음이다. 그러니 결국, 가해자를 용서하는 건 괜찮지만, 피해자와 가해자를 로맨틱하게 엮는 건 심하지 않나?라는 주장이 주된 비판이다. 결국 캐릭터가 아닌 스토리를 지적하는 것. 열린 결말로 끝났으나, 분명 플래그가 있었고 쇼코는 쇼야를 좋아한다고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했다. 과거를 용서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은 이해하나, 진심으로 사랑까지 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다.
목소리의 형태가 가해자의 자기위안 판타지는 아니지만 작품에 대한 비판할 수 있는 점은 존재한다. '왕따가 아니라 소통이 주제이므로 비판은 대부분 요점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작품을 전부 파악한 후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구조적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왕따'라는 소재를 사용했으면 안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왕따의 원인은 '소통의 부재'가 아니기 때문이다.[9] 절대다수의 사례가 그렇지 않은데 마치 소통의 부재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묘사하고, 결과에 불과한 요소를 원인인 것처럼, 마치 쇼코가 타인과 좀 더 소통했으면 더 나은 결말이 있었을 것처럼 우에노 앞에서 비참하게 무릎 꿇려놓고 가해자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식으로 전개한다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스토킹이나 강간을 다른 이유('상대를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등)로 벌어진 것처럼 그린 작품이 비판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묘사가 용인되는 분야가 있다면 할리퀸이나 탐미지향적인 소설들인데, 그런 경우는 애초에 현실적일 것을 기대받지 않기 때문에 비판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목소리의 형태'는 장애 아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급의 디테일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도 중심 주제는 비현실적으로 풀어나가니 위화감이 큰 것이다.
폭력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폭력이 '소통의 실패로 인한 의도치 않은 결과'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나마 우발적인 폭력이라면 예술적 허용이 가능하겠지만, 집단괴롭힘은 실수 따위가 아니라 작중에서도 묘사되듯이 굉장히 의도적인 형태이며, 이런 소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거와의 화해, 소통'을 도출해내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다.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에 대해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면, 오해나 무관심같은, '커뮤니케이션에 속하지만 잘못된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스스로 중심 주제를 흐리는 소재(왕따)를 가져와 놓고, 자연스럽게 그 쪽에 시선이 쏠린 독자를 탓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장애아동이 당하는 왕따를 반드시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라면, 적어도 주제는 다른 쪽으로 잡았어야 한다.[10]
작중에서 쇼코가 청각장애인의 어눌한 말투 때문에 놀림당하고, 쇼야에 의해 보청기가 부서지는 건 실제 청각장애인들도 많이 경험하는 것이며 청각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왕따를 당했던 적이 있는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작품 전체에 그들의 트라우마를 유발할 만한 요소들이 산재한데, 비록 진심으로 반성했다고 해도 이들 입장에선 누구보다 증오스러울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사랑까지 하는 피해자를 순순히 납득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11] 목소리의 형태가 청각장애인을 비중있게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청각장애인에게 해당 작품을 추천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목소리의 형태는 청각장애인이 주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섣불리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2.2. 반론[편집]
그러나 작품에서 말하는 '소통의 부재'란 결코 쇼코가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작품 초반 쇼야의 입을 통해 말했듯이, 소통을 끊은 것은 가해자 쪽이었고, 쇼코는 계속해서 소통을 시도하려 노력했음을 보인다. 소통의 부재라는 표현이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소통이 없다'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해서 해석하면 '소통의 의지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끊어냈다'라고 이해하는것이 바람직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쇼코는 소통하려 노력했지만 가해자들이 일방적으로 소통을 거부했고, 그 결과가 왕따로 나타났다는 것. 이런 관점에서의 '소통'이란 단순히 말과 말의 대화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려 하고 서로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려하는 의지일 것이며, 작품 또한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결국 현실에서의 왕따의 원인도 피해자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재미만을 탐닉하는 가해자들에 의해 일어진 일이므로 작품의 설정이 틀리다고 할 수 없다. 폭력을 커뮤니케이션의 잘못된 방법으로 묘사한 것도, 가해자들이 쇼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쇼코에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인 혐오를 제외하면 전할 감정이 없었고, 그 혐오를 전하는 수단 중 가장 당연한 것이 폭력이기에 이것 역시 당연한 묘사다.
또 한, 쇼코가 사죄를 하러 다니는 장면은 비판 문단 말미의 범죄 피해자가 되려 사과하러 다니는 일차원적인 연출 혹은 그렇게 보는 확대해석과는 달리 그저 생을 마감하려 했던 쇼코가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다시금 본인에 대한 혐오와 대면하고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죄는 지난 날 무미건조하게 다정하며 상기 문단처럼 피해자이면서 되려 가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다닌 부자연스러움, 혹은 시청자들이 느꼈던 불편함과는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쇼코의 다정함과 상냥함은 상기 문단에도 나왔듯 자기혐오와 원망이 자아낸 방어기제이면서 쇼코만의 처세술이다. 그리고 자살 시도 이후 소극적이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걸로 그녀 자신에게 변화를 주며, 이는 여러 장면을 통틀어 그저 자신의 죽음이 주변 사람들의 삶을 환원시킬 거라는 믿음으로 사라지려고만 했던 쇼코가 다시금 현실과 마주하고 왜 변하려는지에 대한 서사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한 변화는 이러한 행동 외에도 한 쪽 귀의 청력이 좋지 못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조차 그저 씁쓸히 웃고만 있었을 정도로 항상 특정 표정만을 연기하고, 심지어는 자기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에도 어떤 표정을 드러내야 할지 머뭇거리기만 하던 지난 날과 교차해보면 그저 연기가 아닌 단순한 미소 하나에도 풍부함이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상기 문단의 또 다른 비판 중 작가의 의중은 쇼코가 타인과 좀 더 소통했으면 더 나은 결말이 있었을 것이란 해석 또한 가해자인 우에노 앞에 무릎 꿇려놓고 가해자가 옳다는 식으로 전개됐다는 착각을 하니, 마치 본 작가가 전하고픈 메시지가 '우에노의 시선에 입각하여 소위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 라는 형태로 독자들에게 보이게 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피해자가 되려 가해자에게 감화되고 자기반성이나 하고 있다는 잘못된 해석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에노의 자기합리화나 쇼코에게 가하는 조언 아닌 조언들은 본인의 과오로 지난 날 수없이 반성하고 고통받고 성찰하게 된 쇼야와는 공감되기 어려울 정도로 오히려 너무나 대조된다. '자신이 저지른 죄는 그대로 돌아서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지막이 불교의 카르마론을 읊조리는 쇼야와 달리 우에노는 모든 원인을 쇼코의 존재로 두고 있고 쇼코의 부재가 자신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렇기에 우에노가 쇼코에게 하고자 하는 말에 설령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해도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공감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이입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쇼코의 소통이 정말 왕따의 원인이었으면, 이 작품에 대한 호평이나 작가의 인터뷰 또한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한 또 다른 처세술이자 그저 임기응변에 불과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쇼코의 캐릭터성으로 인해서, 혹은 그 안에 용서나 사랑이란 테마에 대해서 오히려 피해자를 분개하게 만든다는 서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특히 이 작품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서양의 '나쁜 남자 길들이기'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자'와 같은 형식으로 해석해버리면 애초에 비판 문단에서 언급된 '작품에 대해 전부 파악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먼저 저 주장에는 장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다를 바 없는 디테일급 묘사 대비 쇼코같은 캐릭터가 현실성이 없다는 주변근거를 내세우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쇼야 같은 자기반성형 성찰형 캐릭터 또한 현실에서 찾기 어렵다는 것을 중론으로 내세워야 한다. 학생의 신분으로 그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170만엔이란 거금을 모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쇼코와의 소통을 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수화를 배우고, 본인의 죗값을 치루려는 대가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도, 단지 장애 아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급의 디테일한 묘사가 특징이라 해서 '실제로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다고?' 와 같은 현실성의 측면을 두고 논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쇼야와 같이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또한 그와 같이 일생동안 괴로워해 진심으로 뭐든 하려고 든다면 용서할 수 있다는 학창 시절 쇼코와 같은 불우했던 과거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도 존재한다.[12] 이는 마치 피해자가 가해자 혹은 그 가해자가 속한 집단에 대해 싫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도덕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의견이라 문제가 있다. 설령 이러한 요소를 비난하고 싶다 하더라도 목소리의 형태는 쇼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쇼코와 쇼야 두 사람의 이야기로, 상기 문서처럼 소통의 부재를 그저 쇼코의 장애 하나로 일단락 짓지만 않는다면 그동안 항상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리며 오직 목소리로 의사소통 하는 것 밖에 모르던 철없던 어린아이인 쇼야가, 감싸안은 손과 닫아둔 귀와 눈을 열고, 그에 따라 갑자기 학교를 나온 그를 향한 비난에도 더이상 피하거나 멈추지 않고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그의 성장과 소통의 넓은 측면까지 같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13]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매체에서 단적으로 보여주는 쇼코의 인간 관계는 초등학교 전학 이후에도 협소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잔인함과 그로 인한 수없이 많은 상처로 삶을 어린 나이에 체념해버린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다가와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자신을 왕따시킨 가해자였던 쇼야였다. 또 그런 그녀의 일상에 변화를 일구어낸 것 역시 쇼야다. 사람의 감정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 일방향적인 의사소통 밖에 모르던 쇼야의 일방적인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은 단절된 대화가 재회 후에는 제대로 서로 마주하는 것으로 이어짐으로써 그 마음 또한 쇼코에게 면밀히 전해진다. 쇼코는 그저 상기 문서처럼 내가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 즉 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캐릭터가 아니며, 쇼야와의 만남 후 자살 시도가 있기 전에도 본인의 발음이 이상하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쇼야의 시선에 맞춰 수화 대신 구두로 대화하려 했고, 자신의 표정관리가 서투르단 것을 알았음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앞에 다가가 마음을 전했다. 그녀의 변화는 분명 쇼야와의 만남으로 진전되었지만, 자살 시도 후에, 쇼야가 쇼코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 나왔음에도 그 호의에 기대는 의존적인 모습이 아닌 역으로 여전히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쇼야를 지탱해주는 상호보완적 관계가 된다.
목소리의 형태에서의 소통의 부재는 다른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로의 관념 속에 세워진 벽과 같은 장애물이 소재가 아니다. 원 반박 문서처럼 소통은 말의 대화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려 하고 서로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려하는 의지이며, 그 시선의 교차가 서로의 세계를 허무는 매개체이다. 어린 시절 쇼야의 시선에는, 쇼코의 다정함과 상냥함, 그리고 씁쓸한 미소가 답답하기만 하다.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쇼코에게 계속 대화를 하라고 윽박지르지만, 정작 쇼코는 그렇게 하고 있었고 쇼야는 그 시선을 마주하려 애쓰지 않기에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이후 그는 가해자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되면서 학교생활에 점점 지쳐만 간다. 그런 그가 쇼코와 친구가 되는 것에 대해 나가츠카와 고민하면서 이전에는 시도조차 못했던 쇼코의 시선을 제대로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무언가로 정의 되는 게 아닌 말이나 논리를 초월한 것에 있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이 바로 소통의 부재가 끝나는 순간이다.
목소리의 형태에서 전하고자 하고싶은 말은 가해자와 피해자, 둘다의 트라우마 극복일 것이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과정을 통한 죄책감의 극복이 없다면 피해자만의 트라우마 극복은 반쪽짜리 극복이나 다름 없다. 작중 쇼야는 쇼코를 왕따시켰고 이로 인해 본인이 저지른 것과 똑같이 왕따를 당하게 된다. 배신감에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자살할 날까지 잡으며 자신의 가치를 "죽어야 마땅한 인간"정도로 평가하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사과하기 위해 수화까지 배워가며 찾아갔고 쇼코를 만나자 그녀가 포기한 필담노트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또 보자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이에 쇼야는 자살을 포기한다. 나중에는 자신이 괴롭힌 쇼코를 목숨걸고 구해냄으로써 그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행동으로 전하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자살했었더라면 못 구했을,살아 있는 쇼코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신의 가치에 대해 깨닫고 그녀로부터 세상과 마주 할 용기를 얻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외면했던 세상과 마주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극복과 철없는 왕따가해자에서 벗어나 한층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쇼코는 자신이 가진 청각장애로 인해 주변에 폐를 끼치고 있어서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왕따를 당해도 나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가해자 의식을 가졌을 정도로 자기혐오가 심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쇼야한테 왕따를 당하면서 무시당하자 여동생에게 죽고 싶다고 말했고 결국 쇼야와 싸우고 전학을 가게 되자 그녀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5년후 자신을 왕따시킨 쇼야가 찾아왔다. 처음에 그녀는 그를 싫어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서 도망쳤지만 그가 과거에 자신이 포기했던 필담노트를 돌려주고 자신과 소통을 하기 위해 수화를 배웠다는 사실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때와는 다르게 개과천선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친구로 받아들여줬으며 나중에는 쇼야를 짝사랑해서 고백까지 한다. 그런데 다리 위에서 과거에 있던 왕따로 쇼야의 인간관계가 파탄나자 자신이 있으면 쇼야가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한때는 자신을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가해자인 쇼야가 자신을 구해주면서 본인을 소중히 해주는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고 쇼야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걸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이토록 영화는 우리에게 트라우마의 극복의 자세뿐만이 아닌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 제목인 '목소리의 형태'의 의미는 구두의 목소리가 아닌 행동에서 나오는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3. 결말[편집]
최종화 '목소리의 형태'편은 시간이 흘러 쇼야, 쇼코, 우에노, 사하라, 나가츠카, 카와이, 마시바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후에 만 20세의 나이로 스이몬시 성년의 날 행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2년 후에 각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온다. 쇼야는 이발사가 되어 어머니를 도와 일하고, 쇼코는 도쿄에 가서 이발사가 되었다. 사하라랑 우에노는 같이 패션 브랜드를 차렸고, 나가츠카는 영화 전문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카와이와 마시바는 같은 국립대를 진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즈루는 우에노, 사하라가 다닌 학교에 진학했으며, 쇼야 어머니와 쇼코 어머니는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브라질인으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마리아의 아버지인 페드로가 돌아왔고, 쇼야의 누나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다.
성년의 날 행사에 참석한 이들 중 다른 초등학교를 나온 나가츠카와 마시바는 자신이 다닌 초등학교 출신들이 있는 방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헤어지며, 나머지는 모두 스이몬 초등학교 출신들이 있는 방으로 가게 된다.
쇼야는 친해진 동창들과 즐거운 이야기를 하다가 한 어린아이가 자신을 툭치자 아이의 엄마가 나타나서 사과를 하고 '스이몬 초등학교'라는 간판이 있는 방으로 가는데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히로세였다.
쇼야는 히로세를 보고 이 자리에 왕따를 방관했던 선생인 타케우치와 자신을 왕따시킨 시마다 등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쇼코는 쇼야와 함께 참여한 성인식에서 과거에 괴롭힌 아이들과도 만난다는 사실에 얼굴이 어두어진다. 쇼야가 괜찮냐고 묻자 긴장된다고 수어로 표현했고 쇼야는 자신도 그렇다며 한마디한 후 쇼코의 손을 잡은 후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만화가 끝난다. [14]
결말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리는데, 깔끔하게 완결날 거란 예상을 뒤엎고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어, 대체적으로 아쉽다는 평이 많다. 수준급 전개와 흐름을 보여주었음에도 결말 부분에선 미적지근하게 마무리되어 아쉽다는 평. 그리고 타케우치, 카와이, 우에노, 시마다, 히로세 등 왕따에 가담한 캐릭터들 중 그 누구도 벌을 받지 않고 끝났기 때문에 더욱 그런 반응이 나온다.[15]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클리셰가 자꾸 사용되기도 했다. 작가가 편수를 미리 예상하고 줄거리를 써나갔기 때문에, 뒷부분에서 풀어야 할 갈등이 정리가 덜 된 것은 사실이다. 독자들은 더 연재하기를 원했지만 더 끌지 않고 그 편수까지만 하겠다는 작가의 결심이 확고했다. 그래도 예상보다 연재한 양이 좀 더 늘어나긴 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무리해서 과거의 실타래를 풀지 않고 열린 결말로 가능성을 남겨둠으로써, 목소리의 형태답게 끝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작중에 등장하는 여성 등장인물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본 작품은 현실적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인공이니까 모든 것이 해결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목소리의 형태다운 결말이라는 것. 또한 작품의 주제 자체가 과거의 관계나 권선징악, 쇼코와 쇼야의 연애 관계 등이 아닌 쇼코와 쇼야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소통하는, 두 개인의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즉 연애관계, 권선징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연애관계에 대한 더 이상의 복선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묘사로 작품의 주제를 곡해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오히려 억지로 완결시켜 버리면 작위적인 전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열린 결말이 나은 선택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작가는 공식팬북에서 쇼야는 여전히 쇼코를 좋아하지는 못하고 30대가 되어서까지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힘들어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럴 만도 한게 쇼야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과거에 자신의 손으로 상처입혔으니 그때까지 죄책감과 죄악감를 가지면서 살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