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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노 비스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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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밀라노의 백작 귀족, 연극과 오페라 연출가, 극작가.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더불어 소위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3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국제적 명성이 확고한 인물이며, 영화 감독 중 영화 영상 예술과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펼치는 데에 최고에 달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인 이른바 '시네아스트'로 분류되는 감독이지만 국내에서는 매우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의 작품 중 국내 개봉된 것이 거의 없는데 아마도 데카당스적인 내용과 그의 공산당 활동 경력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만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이 제2 정당이었으므로 현지 기준에서는 대단하게 독특한 정치 이력은 아니다.
2. 특징[편집]
화려하면서도 서정적인 작풍으로 알려져 있고 독특한 미적 심미안은 당대 감독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영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영상 미학과 유미주의적 연출에 있어서는 손에 꼽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인물로, '최고의 영화 탐미주의자'라고 하는 평가도 다수 존재한다. 대표작인 레오파드는 유명한 무도회 장면이나 전투 장면을 제외하고도 미적 감각에 있어서 빠지는 장면이 없을 정도로 상영 내내 어마어마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타고난 능력과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길러낸 그러한 감각은 그의 영화 전체에 깔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귀족 사회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영화의 스태프롤이 흐를때는 보통 극장에서도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1942년, 《강박관념》[2] 으로 데뷔. 그런데 한창 전쟁중이라 판권 허락도 안 받고 그냥 찍어 버렸고 개봉 며칠만에 상영 금지의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3] 때문에 해외 정식 공개는 본인의 사후 미국 76년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서 겨우 이루어 졌다고. 본작을 가지고 최초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고도 하는데 흔히 최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45년작, 《무방비도시》라고 하지만 반파시즘적 내용이나 야외촬영, 아마추어 배우 기용은 본작이 최초라고 감독이 주장하고 있다.
이후 한동안은 연극 무대 연출, 오페라 연출에 전념했는데 전후 48년 공산당의 자금 지원으로 네오 리얼리즘의 걸작《흔들리는 대지》(La terra trema: episodio del mare)로 영화연출에 복귀했으나 영화를 치졸한 이념선전물로 만들려는 공산당의 참견에 반발하여 바로 탈당한다.
1950년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담당했던 무대 연출들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연출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고 평가되는 공연이 1955년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었는데 마리아 칼라스의 혼신의 연기는 라 스칼라 극장 관객들의 기립 박수까지 이끌어냈다. 그 연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자료가 적기는 하지만 남아있는 녹음을 통해 그의 뛰어난 연출력을 알아낼 수 있다.
3. 필모그래피[편집]
- 70년대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영화화 작업에 착수해 알랭 들롱, 더스틴 호프먼, 실바나 만가노, 말론 브란도, 그레타 가르보가 캐스팅 물망에 올랐으나 제작 무산되었다.
4. 기타[편집]
그는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하며 르네상스 문화를 연 명문 '비스콘티' 백작위를 가진 명문 귀족이었다.[5] 그라차노 비스콘티 공작 주세페(1879-1941)[6] 의 3남으로 태어났다. 가문의 수장인 공작 작위는 맏형, 작은형과 그 후손 계통으로 이어진 데 비해, 루키노는 가문의 수장이 아니어서 백작 작위만 갖게 됐다. 때문에 다른 이탈리아 감독들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도 영어를 못해 쩔쩔맨 것과는 달리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등 수개국어에 능했고 파시스트 정권에 반발해
공산당 전적이 증명하듯 그는 착취와 자본적 지배에 대해 반반심이 있었다. 불운한 하층민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영화인 흔들리는 대지에서는 비스콘티의 그런 면을 잘 드러난다. 그런 비스콘티조차 유럽과 이탈리아에서 불었던 급진적인 운동과 공산주의 분파들의 야욕 다툼 때문에 점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2차 대전 때는 파시즘 저항 활동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스파이 활동을 하던 여자 배우의 도움으로 구명되었다. 해당 배우는 비스콘티가 자신에게 특별히 감사 인사를 하지도 않고 이후로도 자신을 무시했다며 분노했다.
젊은 시절부터 사교계의 총아에다 뛰어난 미적감각으로 이름이 높아 루이뷔통이 듣보잡이던 시절부터 뷔통의 가방만 들고다녔으며[8] 30살 무렵 장 르누아르의 연출 보조로 영화계에 발을 딛었는데 그를 르느와르에게 소개시킨 사람은 샤넬의 창립자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다.
한편 어지간히 디테일에 신경을 쓴 모양인지,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9] 영화에 보석함이 나오는 장면이 있으면 설령 그 보석함을 열어보는 장면이 없다 할지라도 그 보석함에 보석을, 그것도 불가리의 최고급 보석으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레오파드 후반부의 무도회 시퀀스에서는 실제 시칠리아 귀족들을 엑스트라로 섭외했다.
양성애자로 당당하게 커밍아웃 했는데 사실 부친도 양성애자였다고... 때문에 영화를 찍을 때에는 여배우는 물론이고 남자배우와도 종종 염문설이 돌곤 했는데 그중에는 심지어 알랭 들롱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연인은 오스트리아 출신 배우 헬무트 베르거이며 이외에도 감독, 배우, 사진가 등등 여러 사람과 연인 관계가 되었었다. 그가 이탈리아의 귀족이나 왕족 중 일부와도 그런 사이였다는 풍문도 들려온다.
2회 이상 기용한 배우로는 버트 랭카스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알랭 들롱, 더크 보가드, 그리고 헬무트 베르거 등이 있다.
비스콘티는 뇌졸중을 겪다가 사망했는데 죽을 때까지도 담배를 즐겼다. 얼마나 담배를 많이 폈으면 하루에 120개비를 폈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도 담배를 계속 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순수의 시대가 비스콘티 감독의 귀족 영화에 영향 받은 작품이다. 스콜세지는 레오파드의 화질 복원 작업에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구찌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비스콘티가 어린 시절 머물던 코모 호수의 별장은 현재 공공에 개방되었는데 미국 가수 그웬 스테파니의 노래 《Cool》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쓰였다. 영상
비스콘티가 50년대에 여름 별장 용도로 구매한 토스카나의 성 카스텔로 디 카졸레(Castello di Casole)는 현재 호텔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1] Luchino를 국내에선 영어식으로 루치노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탈리아식인 루키노로 읽는 게 맞다. 심지어 국내 영화 서적이나 정식 DVD에도 루치노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영어권에서도 현지 표현을 존중해 루키노로 부르는 것이 함정[2]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가 원작[3] 판권 탓이 아닌 반 파시즘 내용 탓이란 주장도 있다.[4] 햅번에게 제의가 갔던 역에 이탈리아 유명 배우 실바나 만가노가 출연했는데 실바나의 의상을 펜디에서 담당했다. 펜디는 실바나에게 헌정하는 '실바나백'을 론칭하기도 했다. 또, 헬무트 베르거 의상은 입생로랑에서 담당했다.[5] 한니발 렉터가 상당한 귀족 취미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원작 소설에서는 그가 비스콘티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가 렉터의 모델이라는 풍문도 있다.[6] 1914-1919년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회장이었다.[7]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주의자가 되는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8] 모두들 뷔통의 로고가 비스콘티의 이니셜을 박아넣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루이 뷔통(Louis Vuitton)이나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나 둘 다 이니셜이 LV다. 비스콘티 정도의 재력이면 개인 이니셜을 박은 가방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기도 했고.[9] <셰틀랜드의 가마우지~> 참고. '리얼리티'에 신경쓰는 광고업자들을 그에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