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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사 페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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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와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차녀. 이사벨 2세의 동생이다.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과 결혼해 몽팡시에 공작부인이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스페인의 추정 상속인[편집]
1832년 1월 30일에 마드리드 궁에서 페르난도 7세의 딸로 태어났다.
1833년 9월 29일, 아버지 페르난도 7세가 세상을 떠나고 언니 이사벨 2세가 여왕으로 등극했다. 당시 이사벨 2세는 3살이었기에 유일한 동생인 루이사 페르난다가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2.2. 결혼[편집]
1846년 10월 10일에 14살의 나이로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과 결혼했다. 몽팡시에 공작은 프랑스의 루이필리프의 6남으로, 이 결혼으로 오를레앙-갈레리아 가문이 개창되었다. 1848년에 루이필리프가 퇴위하고 부부는 계속 스페인에서 살았다.
몽팡시에 공작은 루이사의 언니 이사벨 2세와 자주 충돌했다. 이사벨 2세의 남편인 카디스 공작이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몽팡시에 공작은 계승 서열 1위인 아내를 믿고 스페인 왕위를 노렸다. 1851년에 이사벨 2세의 첫 자식이 태어났음에도 몽팡시에 공작은 욕심을 접지 않았다. 루이사 페르난다는 특별히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이진 않았지만, 당대의 일반적인 여성처럼 남편의 뜻을 거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868년에 몽팡시에 공작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안 프림 장군을 지원해 이사벨 2세를 공격했다. 그러나 몽팡시에 공작의 기대와는 달리 스페인에서는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왕조 출신의 아마데오 1세를 옹립했다. 루이사 페르난다의 가족은 다른 왕실 가족처럼 망명을 가야했다.
1890년에 남편이 사망하고 루이사 페르난다는 죽을 때까지 세비야에서 살았다. 유해는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남편 몽팡시에 공작과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두었지만 그 중에서 루이사 페르난다 보다 오래 산 자식은 장녀 마리아 이사벨과 3남 안토니오 뿐이었다.
왕정이 복고되고 딸 오를레앙의 메르세데스가 왕위에 오른 조카 알폰소 12세와 결혼해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메르세데스는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