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군
덤프버전 : (♥ 1)
조선 선조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은 덕흥대원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충선왕의 서자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인(宮人) 소생. 이름은 왕혜(王譓), 몽골식 이름은 왕타스테무르(王塔思帖木兒). 봉호인 덕흥(德興)은 이후 조선 중종의 서자이자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대원군과 한자까지 동일하다.
어릴 때 승려가 되었으나 종손자 충정왕이 폐위되고 조카 공민왕이 즉위할 때 원나라로 도주했다.
공민왕이 친원파의 거두였던 기철을 숙청한 직후, 그의 여동생이자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3] 를 세자로 세우려고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 12월, 덕흥군은 최유 등과 함께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하고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공민왕은 그를 고려로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원나라는 그에게 종기가 났다는 이유로 송환을 보류했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4]
1. 개요[편집]
충선왕의 서자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인(宮人) 소생. 이름은 왕혜(王譓), 몽골식 이름은 왕타스테무르(王塔思帖木兒). 봉호인 덕흥(德興)은 이후 조선 중종의 서자이자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대원군과 한자까지 동일하다.
2. 생애[편집]
어릴 때 승려가 되었으나 종손자 충정왕이 폐위되고 조카 공민왕이 즉위할 때 원나라로 도주했다.
공민왕이 친원파의 거두였던 기철을 숙청한 직후, 그의 여동생이자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3] 를 세자로 세우려고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 12월, 덕흥군은 최유 등과 함께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하고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공민왕은 그를 고려로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원나라는 그에게 종기가 났다는 이유로 송환을 보류했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4]
3. 대중매체[편집]
4. 둘러보기[편집]
[1] 경복흥 열전에서 언급이 되는데, 아마도 덕흥군이 반역을 일으키면서 과거 동오의 손침과 손준의 경우처럼 왕씨 성을 박탈당하고, 그리고 왕실 족보에서 파이면서 덕흥군이 백문거의 집에서 태어난 이유로 백씨로 성이 바뀐 경우라고 볼 수 있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2] 궁인이 출궁한 뒤 재혼한 원나라 사람이다.[3] 성이 기씨(奇氏)이고, 이름이 삼보노(三寶奴)이다. 즉 기황후가 고려 왕실을 아예 왕씨에서 자신의 가문인 기씨로 바꾸어서 역성혁명을 시도를 한 것이다. 참고로 대략적인 나이차는 덕흥군이 기삼보노보다 두 세대 위이다.[4]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엔 그가 원나라로 돌아간 후에 죄를 저질러 봉호도 삭탈당한 뒤 유배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사료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2 17:38:26에 나무위키 덕흥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