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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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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어별 명칭[편집]
2. 개요[편집]
파일:9년 전쟁 프랑스 외교.png
유럽 여러나라들이 참여한 1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국제전으로, 사실상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과 프랑스가 싸운 전쟁이다. 대동맹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옛 서적들에는 팔츠 계승 전쟁이라고 적혀있는 서적들도 간혹 있다.
당시 유럽은 대 튀르크 전쟁이 벌어지는 중으로, 이 전쟁은 중부+동부유럽 vs 오스만 제국의 구도였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던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서 축출되기 직전에 이르자 시원찮은 전쟁명분을 꺼내들어 반오스만 전쟁의 맹주였던 오스트리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오스트리아는 주력을 오스만과의 전쟁에 내보냈지만, 대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스웨덴, 스페인 등이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참전했다. 루이 14세 본인도 이렇게 프랑스가 다굴당하는 전쟁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선조인 프랑수아 1세가 그랬던 마찬가지로 기독교 세계인 유럽에서 이슬람과 동맹을 맺은 배신자로 비난받았으나 루이 14세 본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이 전쟁에 많은 국력을 소모했지만 결국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8]
3. 내용[편집]
호전적인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주변국들을 침략하여 귀속 전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재결합 전쟁 등을 일으켰다. 이에 유럽 각국들은 루이 14세의 호전성을 크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한편 1683년 오스만 제국이 유럽 침공을 감행하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 국가들,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이 연합하여 빈 인근에서 오스만군을 격퇴했고, 내친김에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을 뒤쫓아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한 대 튀르크 전쟁이 벌어졌다.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회하자 프랑스는 더욱더 내부 결속이 단단해졌고 대부분이 가톨릭이었던 프랑스의 시민들은 이 결정을 환호하였으나 당연히 위그노들은 반발하며 해외로 도주했고 위그노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 나가면서 탈출한 위그노들이 타국에 루이 14세의 위그노 탄압과 호전성을 선전하자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루이 14세의 호전성에 더욱더 경각심을 가졌다.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던 루이 14세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오스만이 호기롭게 시작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실패하고 유럽 국가들이 신성 동맹을 결성하여 그동안 오스만에게 당했던 패배를 배로 갚아주기 위해 오스만을 다굴하기 시작하자 오스만은 순식간에 헝가리를 내어주고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였던 벨그라드까지 함락되었다. 결국 도나우 전선이 붕괴되고 신성 동맹이 오스만 제국의 본진격이었던 발칸 반도로 진입하는 걸 허용하자 오스만 제국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졌다.
여기에 신성 동맹의 남하를 본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이 대거 반오스만 봉기를 일으켰고 기세를 탄 신성 동맹은 그동안 오스만한테 당한 것도 많고 이번 기회에 오스만을 아예 유럽 땅에서 몰아내자는 계획으로 최종 목표인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신성 동맹이 소피아까지 남하하자 다급해진 오스만은 신성 동맹의 수장이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화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정 화의를 맺고 싶으면 헝가리부터 콘스탄티노플까지 발칸 반도 전체를 내놓으라고 최후통첩을 날리면서 오스만의 화의 제안을 거부했다. 오스만 제국이 이 정도로 위기상황에 몰린건 바르나 전투 이후 처음이었고 결국 오스만은 마지막 수단으로 유럽 내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스만이 예상 외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본 루이 14세는 동맹국의 도움 요청까지 받자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오스만이 패배해 유럽에서 쫓겨나면 발칸 반도가 전부 합스부르크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고[9] 그렇게 되면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의 대결에서 열세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입장에서는 합스부르크가 지금 대 튀르크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는 지금이 바로 상대적으로 대비에 소홀한 라인강 일대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하여 루이 14세는 오스만 제국을 도와 대 튀르크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간에 프랑스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고 같은 가톨릭 국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신성 동맹이 이교도 튀르크놈들을 두들겨 패는 도중 가톨릭 국가가 동맹국을 도와야한다는 명분으로 거기에 훼방을 놓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 개입할 다른 명분을 쥐어짜내야 했는데 그렇게 해서 쥐어 짜낸 명분이 바로 팔츠 선제후국이었다. 팔츠를 통치하던 비텔스바흐 가문 지메른 분가의 카를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해 대가 끊기고 먼 친척인 노이부르크 분가의 필리프 빌헬름이 즉위하자 자신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한 오를레앙 공의 부인이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의 딸이니 프랑스가 팔츠를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같은 기독교 국가임에도 수세기동안 유럽을 괴롭혀온 공공의 적 오스만 제국을 도와주면서 겸사겸사 자신의 세력 확장도 시도하는 루이 14세에게 전 유럽 국가들은 격노했고 이에 유럽 각국들은 1689년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와 맞선다. 대동맹의 목표는 프랑스의 영토를 1659년 국경으로 되돌리고 프랑스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초반에 팔츠 도시들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곧 동맹군의 반격으로 팔츠 선제후국 대부분을 내주었고 이에 도리어 공격받게 된 입장이 된 프랑스는 하이델베르크 등 팔츠 선제후국을 파괴하는 잔혹한 짓을 저지른다. 이에 타 국가들은 프랑스에 더욱 더 분개하였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주 전장인 플랑드르에서 프랑스는 동맹군에 밀리지 않고 플랑드르의 요새들을 확보하며 선전했고 팔츠 방면으로도 공격을 지속했으며 해상에서도 초반에는 프랑스가 우세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군이 우세를 보였다.
프랑스는 이상기후로 인한 대기근과 전쟁 후기로 갈수록 군비 지출로 인한 재정난이 심각해 지면서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지키는 요충지인 나뮈르를 빼앗긴 1695년 이후 전쟁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카를로스 2세의 병세가 악화되고 스페인 왕위가 공석이 될 것으로 보이자 루이 14세는 동맹국을 분리시켜 스페인 왕위를 얻고자 했고 이를 위해 룩셈부르크와 팔츠를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다. 결국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동맹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협상안에 만족한 동맹국도 이를 받아들여 강화가 이루어졌다.
4. 결과[편집]
전쟁이 마무리되고 레이스베이크 조약이 맺어졌다. 프랑스는 1679년 네이메헌 조약 이후 점령한 영토를 모두 반환해야 했고, 스페인은 저지대 영토를 돌려받았다. 영국은 이 전쟁을 기점으로 유럽 대륙의 주요 군사 세력으로의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 루이 14세의 팽창주의는 확실하게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다만 프랑스는 발칸 반도에서 쫒겨나기 직전의 오스만이 회복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도왔고 알자스 점령을 확실하게 인정받았고 카를로스 2세의 호감을 산 데다가 야전에서는 거의 다 승리했기 때문에 전 유럽에 프랑스의 강력함을 입증했다. 그러나 전쟁은 양측 모두 목표 달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사실상 무승부였고 카를로스 2세가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홀로 전 유럽을 대적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라고 생각하여 프랑스 왕자 필리프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전 유럽은 또다시 경악했으며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5. 영토 변화[편집]
- 프라이부르크 일대[10] 를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로 반환.
- 카탈루냐와 룩셈부르크를 프랑스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로 반환.
- 라인강 우안과 팔츠에서 프랑스 철병(란다우 제외).
- 프랑스에 의해 폐위된 로트링겐 공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복위.
- 프랑스의 퐁디셰리 (인도), 아카디아 (캐나다 핼리팩스 일대) 회복, 생도맹그 획득
-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스트라스부르 포함) 영유 확인.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동군연합[2] 팔츠 계승 전쟁.[3] 미국에서는 윌리엄 왕의 전쟁(King William's War)으로 부른다.[4] 9년 전쟁.[5] 9년 전쟁.[6] 대동맹 전쟁.[7] 9년 전쟁.[8] 물론 거의 멸망할 위기에 있던 오스만 제국을 구원했다는건 훗날 합스부르크 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를로스 2세가 합스부르크 대신 부르봉에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 또한 이 전쟁에서 보여준 프랑스의 선전 때문이었고, 합스부르크는 9년전쟁으로 대확장의 기회를 놓치고 이후 스페인을 빼앗기면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9] 실제로 레오폴트는 베네치아 공화국 몫으로 배정해놓은 달마티아와 모레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체를 자신이 먹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올리면서 자신이 부활시킨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통합하여 정통 로마 제국을 부활시킬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였다.[10] 당시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로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월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