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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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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남승철(南昇喆)
자 / 호덕현(德玄) / 자은(紫隱) 또는 자음(紫陰)
본관영양 남씨[1]
출생1851년 2월 25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신포동
(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거성리 신풍마을)[2]
사망1922년 11월 23일
경상북도 청송군
매장지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석술남석인은 그의 5촌 조카, 즉 종질(從姪)이다.

2. 생애[편집]


남승철은 1851년 2월 25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신포동(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거성리 신풍마을)에서 아버지 남희장(南熙章)[3]과 어머니 여강 이씨 이준상(李晙祥)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족숙 남희태(南熙泰)에 입양되었다.

1896년 1월 29일 청송의 유생들은 을미사변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키고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때 남승철은 참모에 임명되어 모집된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사병도총(司兵都摠)에 선임되어 의병 모집과 훈련 등을 담당했고 의병을 사칭해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리를 처단하기도 했다. 또 선봉장 홍병태(洪秉泰)와 함께 흥해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기도 했다. 이후 대구에서 일본군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심성지의 지휘하에 감은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적병 7~8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이 내려지자 의병대가 해산되었고, 그는 자택에 은거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다 1922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 사후에 <자음선생문집(紫陰先生文集)> 6권 3책이 발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남승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송정공파(松亭公派)-청송 문중 14대손 철(喆) 하(夏) 항렬. 영양 남씨 22세[2] 인근의 개일리·월매리·도평리와 함께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석광·남승하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영양 남씨 청송 입향조인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9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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