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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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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구한말 조선 ~ 대한제국의 권신으로 본관은 수안(遂安)[3] 이며, 제정러시아와 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천민 출신의 미천한 신분으로 고종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자리까지 입지전적의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나, 실각하고 앙심을 품어 고종 황제와 황태자 이척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2. 생애[편집]
2.1. 생애 초반[편집]
함경도 경흥도호부 출신이다.[4]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고 하며, 러시아와 인접한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살려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어부 생활을 하면서 러시아어를 배워 익혔다. 1886년 5월 10일, 북청군 신포진에 러시아 군함이 정박해서 북청군 부사 이준수가 러시아인 함장과 간단하게 대담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때 러시아군과 함께 일행으로 들어와서 통역을 섰던 것으로 처음 사료에 등장한다.[5] 이를 볼 때 러시아어 회화 실력은 괜찮았지만, 한문과 키릴 문자는 까막눈이었다고 하며, 일상회화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통역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다고 한다.[6][7] 이 일로 조선 조정의 눈에 들었는지[8]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김홍륙은 1888년 부장, 1889년 수문장으로 임명되는 등 무관 쪽으로 벼슬을 시작한 것이 확인된다. 수문장은 신분이 확실한 양반 자제들 중에서 차출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천출이었던 김홍륙을 수문장으로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특별 대우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조선도 러시아와 통상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주변에 가까이 두면서 유사시 통역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유사시는 생각보다 빨리 김홍륙에게 찾아왔다.[9]
2.2. 출세[편집]
이후 조선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김홍륙은 역관으로서 활약한다. 1894년에는 이범진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간의 조약 체결 시 통역을 맡았다. 춘생문 사건 당시에 가담했던 인원들 중 하나였으며, 1896년 1월에는 시종원 시종으로 임명된 후, 아관파천을 계기로 베베르와 고종 간의 통역을 맡으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시종원 시종에서 특별히 정3품 비서원승으로 승진하는 것으로 모자라, 정2품 판서에 준하는 자리를 거쳐, 아관파천이 끝난 이후로는 귀족원 경 자리까지 오를 정도로 위세가 대단해졌다. 누가 봐도 낙하산이었기에 신하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고종은 막무가내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궁금(宮禁)을 맑고 엄숙하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김홍륙을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려 주고, 이용익[10]
이 오래도록 자기 직책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11]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은 통역을 잘 하기 때문에 배려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2월 14일(계유, 양력 3월 16일)
윗사람들을 상대로 이미지 관리를 잘 했는지, 베베르 공사와 그의 아내는 김홍륙이 청빈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기록이 남아 있고, 고종이 김홍륙을 가까이해 사적으로 이런저런 일을 맡길 때에도 베베르는 김홍륙의 상관으로서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공사 부부의 바람과는 달리, 김홍륙은 상당히 부정축재와 매관매직에 능한 사람이었으며, 얼마 안 가 조선(훗날 대한제국)에서도 손 꼽히는 부자가 되었다.[12] 김홍륙의 가족 및 친인척도 그의 덕을 보아 권세를 휘두르며 학정을 일삼았다.[13] 그 위세만큼 자연히 김홍륙은 적을 많이 만들었으며,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해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고종과 베베르의 비호로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
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당일인 양력 2월 22일, 김홍륙은 경무청에서 딸려준 순검 2명의 호위를 받으며 퇴궐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는 길에 암살자 4명의 습격을 받았다. 암살자들은 순검들을 제압하고 김홍륙의 목을 찔렀지만, 당시 김홍륙은 털로 된 방한용 머리쓰개인 휘양(揮揚)을 쓰고 있던 덕분에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이 테러 사건은 같은 친러파였지만 김홍륙과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재순이 사주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니 김홍륙 본인도 세간의 시선이 신경쓰였는지, 사직을 요청했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귀족원 경(貴族院卿) 김홍륙(金鴻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보잘것없는 인물입니다만, 외람되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은혜를 입다 보니 전후로 분에 넘치는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기량이 부족하고 성품이 우매하여 가는 데마다 죄만 지었습니다. 그러나 견마(犬馬)와 같은 마음에 성상을 향한 간절한 충심(衷心)을 금할 길이 없어 오직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신이 당한 일은 조정에 있어서는 벼슬아치들의 크나큰 수치이고 신에게 있어서는 죽어도 씻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용렬하고 어리석은 신이 한갓 의분(義分)이 소중한 줄만 알고 일찍이 자중(自重)하지 않아서 함정에 빠질 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차라리 홀연히 죽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신하된 자가 이런 죄를 지고서 어찌 하루라도 얼굴을 들고 다시 반열에 나와 거듭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오장(五臟)이 제 기능을 못하고 사지가 벌벌 떨리는 등, 숨이 끊어질 듯하여 몸을 보전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사적인 분수로 보나 공적인 격식으로 보나 반드시 사직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충심을 토로하여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의 직명을 속히 체차하심으로써 나라의 체모를 바로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주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난번의 일은 세상이 변해서 그런 것이니, 경 한 사람만이 당한 일이 아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를 이유로 사직까지 하는 것은 만부당하다. 좀더 조리를 잘하고 속히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35년 무술(1898) 2월 14일(무진, 양력 3월 6일)
그래도 한 차례 다시 몸조리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이를 수락하고 얼마 안 가 김홍륙을 한성부 판윤[14] 에 임명한다. 이때가지만 해도 고종은 적어도 겉으로는 김홍륙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성 판윤으로 임명받은 김홍륙이 계속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업무를 해야 할 시간에 어찌 상소만 일삼는가"라며 타이르는 데 그쳤다.
이 무렵 김홍륙의 상관인 러시아 공사는 베베르에서 슈페이에르 공사를 거쳐, 1898년 4월 마튜닌으로 바뀌었다. 조선인들의 불만을 의식한[15] 마튜닌은 김홍륙을 러시아 공사관에서 해임했고, 이로 인해 김홍륙은 서서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기다렸던 듯, 고종은 1898년 8월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혐의로 김홍륙을 파직한 후 흑산도로 유배 조치를 내렸다[16] .
“조령(詔令)을 내렸다. ‘정2품 김홍륙은 말로써 일찍이 약간의 공로를 세웠기에 조정에서 그 벼슬을 높여주고 그 봉급을 후하게 한 것은 대체로 염치를 기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교활한 성품으로 속임수가 버릇이 돼 공무(公務)를 빙자해 사욕을 채우는 데에 온갖 짓을 다했으니, 백성들의 마음에 울분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재직 중에 탐묵(貪墨)한 자는 규례대로 판결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법부로 하여금 의율(擬律)해 유배하게 하라.’”
고종실록 1898년 8월 23일
2.3. 김홍륙 독차[17] 사건[편집]
○ 황송한 일) 그저께 밤에 가피차를 황태자 전하계서 많이 진어하신 후 곧 토하시고 정신이 혼미하사 위석(委席)하시고, 황상 폐하께서는 조금 진어하신 후 조금 있다 토하시고, 근시 김한종, 김석태 양씨와 엄 상궁이 퇴선을 맛본 후 김한종 씨는 곧 혼도하여 인사불성하매 업어내여 가고, 하인 넷이 나머지를 먹고 또 병이 들었다 하니, 황상 폐하께옵서와 황태자 전하께옵서 돌리신(고비를 넘긴) 일은 감축하오나 수라 맡은 사람들의 조심 아니한 것은 황송한 일이로다.
지난 11일 밤 10시경 궐내의 만찬에 부름을 받았을 때 황제 폐하 및 황태자 전하께서는 갑자기 병을 얻어 폐하, 전하가 함께 토사하고 전하는 한때 인사불성이 되어서 궁정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선부(膳部) 중에서 무엇인가 식사의 장애를 일으키게 한 소행이 있었는지 각각 그 원인을 추구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때때로 즐겨 양식을 찾으시는 일이 있는데 항상 먼저 커피를 찾으시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날 밤에도 역시 전례와 같이 먼저 커피를 드렸는데 커피는 상시로 변하는 것인지 맛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아주 소량으로 두세 번 마셨고 황태자께서는 거의 한두 번에 반잔을 마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두 분 모두 불쾌함을 느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토사하고 곧 이어서 황제께서도 역시 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시봉(侍奉)한 자의 면면은 내시(內侍) 7명, 여관(女官) 3명, 별입시(別入侍)[19]
1명으로 그 중 남은 커피를 시음한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중독되어, 이로써 그 해독이 음식물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898년 9월 25일, 주한 일본 변리공사 카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오쿠마 시게노부 당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비밀서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20]
"방금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와 태자(太子)가 동시에 건강을 상하였다고 하는데 수라(水剌)를 진공(進供)할 때 애당초 신중히 살피지 못하여 몸이 편치 않게 되었으니, 너무나 놀랍고 송구합니다. 거행한 사람들을 모두 법부(法部)로 하여금 철저히 구핵(鉤覈)하게 하고 근본 원인을 조사하여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근본 원인을 엄히 밝혀내게 하겠다."
하였다.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金鴻陸)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詔勅)을 받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金光植)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21]
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凶逆)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孔洪植)[22] 에게 주면서 어선(御膳)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金鍾和)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藥物)을 어공(御供)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元)의 은(銀)[23] 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고지기〔庫直〕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汰去)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실록 38권, 고종 35년(1898년) 9월 12일 양력 2번째 기사
유배형을 받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황제와 황태자가 마실 커피에 아편을 넣어 독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아편은 많이 먹으면 사람이 죽고도 남을만큼 충분한 독이었고, 고종은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 터라 독살의 성공 가능성도 어느정도 존재했다.
고종의 47세 생일인 1898년 9월 12일, 김홍륙은 궁내에서 일하던 공홍식과 김종화를 매수하여 아편을 잔뜩 넣은 커피를 고종에게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이 평소와 다르게 맛이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24] 두세 모금만 마셔 보고는 바로 뱉어버려서 실패했다. 부작용은 속이 조금 메스꺼운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다만 문제는 황태자에게 닥쳤다. 황태자 순종은 커피에 익숙하지 않아서 커피 맛을 잘 모르다 보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꽤 많은 양의[25] 커피를 들이키고 말았다. 가뜩이나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순종이[26] 대량의 아편을 먹었으니 몸이 멀쩡할리가 없었다. 순종은 구토와 실신을 거듭하며 혈변을 쏟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몸을 크게 상했고, 남은 일생동안 틀니를 하고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불어 후유증으로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은 단순히 떡밥에만 그치지 않고, 고종 사후에 복벽주의가 사라지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정해지는 기반이 되었을 정도로 순종의 인기와 신뢰를 크게 깎아먹는 등, 사건의 여파는 매우 심각했다.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가비(영화) 문서로. 소설 토지에도 김홍륙의 진독 사건으로 나온다.
2.4. 사형 이후 연좌제 관련 논란[편집]
이러한 대형 사건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고종은 크게 분노했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방금 겸임 경무사(兼任警務使) 민영기(閔泳綺)가 보고한 것을 보니, ‘죄인을 신문하는 즈음에 종신 유형(終身流刑) 죄인 김홍륙(金鴻陸)이 구초(口招)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김홍륙을 지금 잡아다 심문(審問)하여야 하는데, 특지(特旨)로 인한 유배 죄인(流配罪人)이므로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삼가 아룁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잡아다 심문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8권, 고종 35년 9월 14일 양력 2번째 기사
조사 끝에 김홍륙과 그 공범 두 명을 잡아[27] 10월 10일 오후 6시 경 교수형에 처했는데[28][29] , 여기까지는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법부대신 신기선이 범인들의 가족까지 잡아와 고문하는 연좌제를 행한 것도 모자라, 범인들의 시신을 방치하여 분노한 민중들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한 것이다. 유럽이라면 18세기 중반 즈음까지나 가능했을 행태이며, 조선 기준으로 보더라도 갑오개혁 이후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된 지 한참 되었던 시대인데 이를 무시하는 초법적인 행위를 한 것. 일단 고종이 개입했다는 명백한 물증은 나오지 않았지만, 김홍륙 처형 직후 신기선을 파직하긴 했으나 이것도 보여주기 식이었을 뿐 사실은 고종이 뒤에서 사주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정황상 처형 과정에서 고종의 의중이 크게 반영되었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애초에 신기선이 독단적으로 저런 조치를 취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도 아니었고. 당시에도 공론화만 하지 못했을 뿐 암암리에 그러한 짐작이 많았다. 물론 고종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도 김홍륙의 아편 커피를 마시고 죽을 뻔했고, 아들인 순종은 아예 염라대왕 코 앞까지 갔다가 골병이 든 채 겨우 살아남았으니 심정적으로 이해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명색이 근대 국가의 왕이 전제군주마냥 국법을 어기고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는 의혹을 사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큰 타격이며, 이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이러한 처사로 인해 국제적 비난은 물론이고, 김홍륙을 척결하려고 벼르고 있던 독립협회에서조차 지금 시대에 연좌제가 웬말이냐며 매우 강력하게 반발했다. 김홍륙의 아내 김조이[30] 역시 남편이 역모를 꾸미는데도 모를 리가 없다는 이유로 처음에 태형 100대와 노역형을 선고받았다가, 민심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추후 칙령에 따라 3년 백령도 유배형으로 대체되었다. 김홍륙은 유배를 떠나기 직전에 아내에게 공홍식이 건네는 편지는 지체하지 말고 자기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언질을 줬던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것이 아내의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 함태영[31] 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김홍륙이 독살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어 그를 무죄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민씨 척족[32] 으로부터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함태영이 증거도 없이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자, 고종이 직접 판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여 기어코 김홍륙을 역모죄로 사형에 처했다고 하니 확실히 의심스럽다.[33]
이후 1960년대 초에 함태영이 남긴 회고에 의하면, 김홍륙은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홍륙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 김재준 목사와 함태영의 대화 기록이다. 출처
‘함’옹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민씨’네가 조작한 음모였다고 한다. 김명길저 “낙선재 주변” 31면에 보면 이 일은 1989년 7월 26일 고종탄일 다음날에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 보면 김홍륙은 시베리아에서 서양 요리인으로 이름난 ‘김종호’를 궁중요리사로 추천하여, 오래전에 고종과 황태자의 수라상(음식차림)을 차려드렸다 한다. 수라상은 내소주방(內燒廚房)에서 접시와 음식을 먼저 검사하고 맛보고서야 드리는 것인데 그 ‘커피’를 맛본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씨 가문이나 '이등박문'의 모략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고 쓰여 있다.
[범용기 제2권] (97) 다시 한신 캠퍼스에 – 김홍륙이란 인간
김홍륙의 마지막 러시아인 상관인 마튜닌 공사도 김홍륙의 죽음을 정치적인 음모로 해석했으며, 실제 배후로 이재순을 지목했다. 김종화를 궁에 처음 들인 사람이 이재순이기도 했고, 이전부터 김홍륙과 이재순은 서로 경쟁 관계였기 때문이다.
3. 기타[편집]
김홍륙은 독립협회 입장에서는 척결 1순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으나, 독립협회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 시에 의외로 김홍륙도 자금을 대 준 기록이 남아 있다. 그가 냈던 돈은 1원이며, 2020년 기준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만원 정도.[34]
김홍륙의 집은 돈의문에서 대여섯 보 떨어진 남쪽 대로변에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공사관과 매우 가까이 있었기에, 그의 집은 러시아 해군 대위 흐멜레프 (Khmelev)가 시위대 등 일부 조선군 병력을 훈련시키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그의 집 근처에는 한러은행 서울 지점이 설립되기도 했으나 영업한 지 1개월 8일 만에 문을 닫았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김홍륙의 명의로 된 연초 소매점 한 군데가 황해도 해주면에 서류상으로 1919년까지 한동안 남아있다가, 회사령의 일환으로 연월일 불상 소멸을 사유로 허가를 취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벌렸던 사업의 규모가 상당히 넓었던 듯하다.
1864년 러시아로 불법 월경하며 러시아인의 투서를 전달한 혐의로 조선 조정에 의해 참수당한 조선인 중 김홍순(金鴻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활동 지역과 항렬자가 겹치는 것으로 보아 김홍륙과 인근에 살던 가족 혹은 친인척, 혹은 최소한 수안 김씨에 속했던 인물인 듯 보이나, 사료가 없어 정확한 관계는 불명이다.
이상재와 관련된 야사가 있다. 아관파천 시절, 매관매직을 청탁받은 김홍륙이 인사발령 문서를 보자기에 싸서 고종에게 올렸는데, 마침 일 때문에 공사관을 찾은 이상재가 이를 눈치채곤 "날이 추우니까 폐하를 위해 땔감을 가져오셨구려"라고 말하고는 그 보자기를 집어채 불타는 벽난로에 던져버렸다는 일화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남정철은 내부 대신 자리를 노리고 당시 외부협판 김홍륙의 첩과 자신의 첩이 자매 관계를 맺게 해서 내부 대신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남정철의 첩이 김홍륙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김홍륙의 첩은 남정철이 베푼 연회에 난입해서 남정철에게 욕을 퍼부으며 '첩 간수도 제대로 안 하고 남의 애정에 훼방이나 놓는 네가 그러고도 대신이냐'며 따졌고, 이로 인해 다른 손님들에게 제대로 망신당한 남정철은 다른 일을 핑계로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내부 대신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맹꽁이 서당 고종편에서 잠깐 등장한다. 단발을 하고 콧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오는데, 실제 김홍륙은 수염을 기르지는 않았다. 김홍륙의 단발 여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미 단발령이 한 차례 시행된 이후이기도 했거니와 그와 비슷하게 러시아어 통역이던 김도일이 단발을 했던 것을 보면 김홍륙도 상투를 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륙이 등장하는 각종 대중매체에서는 그가 함경도 사투리와 서울말을 섞어 쓰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데, 실제 김홍륙의 출신지(경흥)를 고려하면 육진 방언 구사자였을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