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ay ( [0] => ||<-3><tablealign=right><bgcolor=#c0c0ff> {{{+1 '''곡옥대진(曲沃代晉)'''}}}[* 곡옥이 [[진(춘추오패)|진(晉)나라]]를 대신한다는 뜻. 해석하기에 따라 곡옥이 진(晉)나라의 대를 이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bgcolor=#c0c0ff> '''시기''' ||<-2>기원전 745년 ~ 기원전 679년[* 내내 내전만 벌인 것은 아니고, 휴전기는 있다.] || ||<bgcolor=#c0c0ff> '''장소''' ||<-2>진(晉)나라의 수도 익(翼)성. || ||<bgcolor=#c0c0ff> '''원인''' ||<-2>진(晉)나라에서 봉한 [[곡옥]](曲沃)이 강성해져 진(晉)나라를 대신하려 함. || ||<bgcolor=#c0c0ff> '''교전국''' ||{{{+1 진}}} ||{{{+1 곡옥}}}[* 단 이 나라들 외에 [[주나라]], [[괵나라]], [[정나라]], [[형나라]] 등도 개입했었다.] || ||<bgcolor=#c0c0ff> '''지휘관''' ||진(晉)나라의 [[군주]]들†[* 설에 따라 오락가락하지만, 2명 내지 1명 빼고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1>곡옥(曲沃)의 군주들 || ||<bgcolor=#c0c0ff> '''병력''' ||<-2>불명 || ||<bgcolor=#c0c0ff> '''피해''' ||<-2>불명 || ||<bgcolor=#c0c0ff> '''결과''' ||<-2>곡옥(曲沃)의 승리. || ||<bgcolor=#c0c0ff> '''영향''' ||<-2>곡옥(曲沃)이 [[진(춘추오패)|진(晉)나라]]의 정통 차지.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KE2K1ttz-wE)]|| 달리 곡옥대익(曲沃代翼)[* 이것은 국호보다는 도읍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 곡옥극진(曲沃克晉)[* 곡옥이 진(晉)나라를 이기다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창기에 [[진(춘추오패)|진(晉)나라]]에서 일어난 약 70여 년간의 [[내전]]을 일컫는 말이다. 최종적으로 진(晉)나라의 공족인 곡옥무공(曲沃武公)이 진(晉)나라의 수도인 익(翼) 성에 쳐들어가 [[진후민]](晉侯緡)을 이겨서 죽이고[* 일설에는 그냥 내쫓겼다고 전해진다.] 진(晉)나라의 정통을 곡옥이 차지해 버린 즉 직계 자손[* [[진문후]](晉文侯)의 자손.] 대신 방계 자손[*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자손.]이 찬탈한 최초의 사건이다.[* 비슷한 사례로 훗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송(춘추전국시대)|송(宋)나라]]의 군주인 [[송후환공]](宋後桓公)의 [[송(성씨)|송씨]](宋氏)를 축출하고 방계 공족인 척성군의 세력 즉 대씨(戴氏)가 송나라의 공위를 대신하는 사건과 비슷하다.] 춘추시대 초기 진(晉)나라에서 발생한 수차례의 골육상잔(骨肉相殘)으로 정확히 67년 동안 싸웠다. 그 원인은 곡옥의 백작이자 진(晉)나라의 방계 공족인 [[곡옥환숙]](曲沃桓叔), [[곡옥장백]](曲沃莊伯), [[진무공]](晉武公). 조부 3대가 직계 공족을 죽이거나 내 쫓아 그들을 멸해 그들이 진(晉)나라의 정통이 된 사건이다. == 사건 진행 == === 요약 === 기원전 745년, 진 소후(晉昭侯)는 숙부인 희성사(姬成師)를 곡옥 땅에 봉해 그가 곡옥환숙이 되었고, 곡옥장백, 곡옥무공을 거쳐 이어졌다. 기원전 705년 겨울,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史記)에서는 기원전 706년, 당시 곡옥의 세력이 나날이 강성해져서 곡옥무공이 [[진소자후]](晉小子侯)를 유인해 죽였다. 이에 [[환왕|주환왕]]은 괵중과 함께 곡옥무공을 치는 바람에 다시 곡옥으로 돌아갔다. 주환왕은 [[진애후]](晉哀侯)의 동생인 진후 민을 진(晉)나라의 군줄 세우니 진(晉)나라를 병합시키지 못했다. 기원전 678년, 곡옥무공은 또다시 진후 민을 쳐서 진(晉)나라를 멸했다. 그리고 진(晉)나라에서 약탈한 재물을 [[주희왕]]에게 바쳐 주 희왕은 곡옥무공을 진후에 봉하니 곡옥환숙의 자손이 진 문후의 자손에게서 진(晉)나라를 빼앗았다. === 복선 === 진(晉)나라의 시조 [[당숙우]](唐叔虞) 이래로 진(晉)나라는 주왕실의 고굉지신으로 활약하였다. 진 목후 7년(기원전 806년), 주선왕을 따라 조융과 문융과 싸워 패했을 때, 공자 구(仇)[* 훗날의 진 문후]를 얻었다. 이름을 구로 지은 이유는 융족들에게 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한다. 진 목후 10년(기원전 802년), [[진목후]](晉穆侯)는 천무의 융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공자 성사(成師)를 낳았다.[*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 그러자 국인들이 말했다. "공자 구의 이름이 불길하여 상서롭지 못하고, 반대로 성사의 이름은 길하다. 그러니 성사가 태자 구를 멸할 것이다." 기원전 785년, 진 목후가 죽고 그 아우 [[진상숙]](晉殤叔)이 즉위했으나 기원전 780년, 태자 구는 상숙을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문후]](晉文侯)다. 기원전 745년, 진 문후가 죽고 태자 백(伯)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소후]](晉昭侯)다. === [[진소후]](晉昭侯) 곡옥을 신설 === 진 소후 원년(기원전 745년), 진 소후(晉昭侯)는 그 숙부인 희성사를 곡옥에 봉하니 그가 바로 곡옥환숙이다. 진 정후의 서손이자 곡옥환숙의 작은 할아버지 난빈(欒賓)의 보좌를 받아 곡옥이 진(晉)나라의 수도인 익보다 더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곡옥환숙은 익을 병탄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당연히 진(晉)나라에서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닌지라 대부 사복(師服)이 이를 우려했다고 한다. === 진 소후를 살해하다 === 분봉 당시 곡옥환숙의 나이는 58세로 나이에 걸맞게 정치 경험이 지극히 풍부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진(晉)나라의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와 곡옥의 싸움은 날로 날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곡옥환숙의 세력이 진(晉)나라에 도전할 만큼 강대해졌기 때문이다. 진 소후 7년(기원전 739년), 진(晉)나라의 대신 반보가 진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환숙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진(晉)나라의 국인들이 이에 항거해 합심하여 곡옥환숙을 몰아냈다. 그리하여 곡옥 환숙은 진(晉)나라를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晉)나라의 국인들이 진 소후의 아들인 태자 평(平)을 세우니 그가 바로 [[진효후]](晉孝侯)다. 진 효후는 반보 일당을 주살했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1전투다. 여기서 곡옥이 패하고 진(晉)나라가 이겼다. ===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사망 === 진 효후 8년(기원전 731년), 곡옥환숙이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선(鱓)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곡옥 장백이다. 곡옥장백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진(晉)나라를 곡옥이 대신하게 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혈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진 효후와 곡옥장백이 8촌 이내므로 가까운 친척이다.] === 진 효후(晉孝侯)도 살해 되고... === 진 효후 15년(기원전 724년), 곡옥장백이 자객을 보내 진(晉)나라의 수도 익 성에서 진 효후를 [[살해]]했다. 그러자 진(晉)나라의 국인들이 순(荀)나라 등 여러 제후국들의 원조를 받아 반격을 가했고, 곡옥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되쫓겨갔다.[* 그만큼 곡옥이 강성해졌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국인들은 진 효후의 동생인 공자 극(郤)을 세우니 그가 바로 [[진악후]](晉鄂侯)다. 이것은 곡옥대진 제2전투다. 여기서도 곡옥이 패하고 진(晉)나라가 승리했다. === 진 악후(晉鄂侯) 내쫓기다 === 진 악후 6년(기원전 718년) 봄, 곡옥 장백이 주왕실에 뇌물을 바쳐, [[정나라]], 형나라와 함께 다시 진(晉)나라를 쳤다. 주 환왕은 대부 윤씨와 과씨에게 병사를 주어 이들을 돕게 했다. 이에 곡옥군의 사기가 매우 드높아졌다. 진 악후가 패해 수읍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곡옥 장백이 주 환왕에게 배신을 때렸으므로 주환왕은 크게 노했다. 가을 주 환왕은 괵공을 파견하여 곡옥장백을 토벌했다. 이에 곡옥 장백은 또다시 실패했다. 그리고는 곡옥으로 되돌아갔다. 주환왕은 악후의 아들인 광(光)을 진후(晉侯)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 애후다. 이것은 곡옥대진 제3전투다. 여기서도 곡옥이 패했고 진(晉)나라가 승리했고, 곡옥의 힘이 많이 빠졌다.[* 아예 천자국 주나라의 공격을 받아서 쫓겨났고 오래도록 전쟁에 나서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 곡옥장백(曲沃莊伯)의 사망 === 진 애후 2년(기원전 716년), 곡옥장백이 분사했고, 그 아들인 칭(稱)이 이으니 그가 바로 곡옥무공이다. === 진 애후(晉哀侯)도 살해되다 === 진 애후 8년(기원전 710년), 진 애후는 형정 땅 남쪽에 침입했다. 진 애후 9년(기원전 709년), 이에 형정과 곡옥무공이 짜고 진(晉)나라를 쳤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와 곡옥의 내전이 재점화되었다. 결국 곡옥 무공이 분습 땅에서 진 애후를 몰아냈다. 밤중에 곡옥 무공이 진 애후를 습격해 사로잡았다. 그러나 난공숙이 진(晉)나라 공실을 받들어 저항을 시도하자 곡옥 무공은 진 애후를 살해하고 진(晉)나라를 차지하려 했다. 이에 진(晉)나라에서 진 애후의 아들을 세우니 그가 바로 진 소자후다. 이거이 곡옥대진 제4전투다. === 소자후(小子侯)를 유인해 죽이다 === 기원전 705년, 곡옥무공이 진 소자후를 유인해 살해했다. 이에 주 환왕은 괵중을 보내 곡옥 무공을 치게했다. 곡옥무공이 그 기세에 눌려 곡옥으로 쫓겨갔다. 주 환왕은 진 애후의 동생인 민을 진후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후 민이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5전투다. === 곡옥(曲沃) 결국 진(晉)을 병탄하여 진나라를 대신하다 === 진후 민 28년(기원전 678년), 곡옥무공이 진후 민을 쳐서 진(晉)나라를 멸하여 병탄했다. 이때 주 왕실의 개입을 사전에 막았기에 이 승리가 가능했었던 것이다. 곡옥무공은 약탈한 보물을 주 희왕에게 바치니 주 희왕이 1군만 두는 조건으로 곡옥무공을 진(晉)나라 군주에 정식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가 곡옥무공이 아닌 진 무공(晉武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일로 곡옥환숙 희성사의 일족이 진 문후의 일족을 멸해 진(晉)나라의 정통을 잇게 되었다. 곡옥무공은 수도를 익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진(晉)이라 했다. 이것이 곡옥환숙이 분봉 받은 지 꼭 67년 만의 일이었다. == 후일담 == 곡옥환숙과 곡옥장백과 진 문후 자손의 세력이 진 무공대가 아닌 [[진헌공]](晉獻公) 대에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진 헌공은 대부 사위(士蔿)를 시켜 이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 괵나라로 달아났고, 그들 중 극씨(郤氏)[* 상술된 진 문후의 자손, 정확히는 진 악후의 자손이다.][* 근거는 옛날에 조상의 이름을 따서 씨를 만드는 관습이 있다. 예컨대 주 환왕의 휘에서 딴 임(林)씨.], 난씨(欒氏), [[한(성씨)|한씨]](韓氏) 등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이 훗날 진(晉)나라의 경이 된다.[* 다만 극씨와 난씨는 춘추시대 중후기에 몰락한다.] [[진문공]](晉文公) 대에 이들의 도움으로 패업을 이룩했으나 이들이 진(晉)나라를 잠식해 끝내는 [[삼진(전국시대)|삼가분진]](三家分晉)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 평가 == 이것의 역사적 의의는 곡옥환숙이 곡옥에 봉 받아 67년간 진(晉)나라 5명의 군주를 살해하고, 1명의 군주를 축출했으며, 끝내 주나라에게 제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일로 진(晉)나라가 팽창해 150년간 패업을 유지하는 계기가 된다. [[분류:왕위 계승 전쟁]][[분류:춘추전국시대]][[분류:지상전]][[분류:내전]] [include(틀:포크됨2, title=곡옥대진, d=2023-11-13 01:26:09)]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