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일본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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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4년 10월 22일부터 10월 29일까지 열린 일본프로야구의 제45회 일본시리즈. 센트럴리그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리그 우승팀 세이부 라이온즈가 맞붙어 요미우리가 4승 2패로 1989년 일본시리즈 이래 5년 만에 통산 18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였던 V9 시대[1] 의 주축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모리 마사아키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나가시마 시게오가 1기 감독 시절(1975~1980) 이루지 못한 숙원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처음으로 달성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2. 양팀 상황[편집]
주요 타선, 투수진 성적은 이 곳(#1#2)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2.1. 요미우리 자이언츠[편집]
나가시마 시게오가 13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한 첫 해인 1993 시즌에 15년 만의 루징 시즌이란 굴욕을 맛본 요미우리는 시즌 종료 후 이 해부터 새롭게 도입된 FA 제도를 통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오치아이 히로미츠를[3] , 메이저리그에서 왕년의 리드오프 댄 글래든, 헨리 코토, 지미 존스를 영입하는 등 대대적인 보강에 나서며 구단 창단 60주년을 맞이하는 1994년에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렇게 대대적인 보강을 마치고 맞이한 1994 시즌, 요미우리는 개막 초부터 1위로 치고 올라가며 한 때 2위와 최대 10게임차까지 벌리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이 확실시되기까지 했으나, 올스타전 직전에 5연패를 당하며 삐걱거리더니 7~9월에 모두 루징을 기록한 것도 모자라 8월 말부터는 8연패로 급격히 추락하는 등 후반전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순식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우승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나마 히로시마는 9월 후반부터 DTD로 우승 전선에서 밀려났지만 이번엔 주니치 드래곤즈가 급상승세를 타며 요미우리를 맹렬히 추격해왔고, 결국 최종전을 남겨두고 요미우리, 주니치가 동률이 되면서 우승팀을 가리는 10.8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10.8 결전에서 요미우리가 승리하면서 마지막에 위기를 겪었지만 어찌저찌 4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5년만의 리턴 매치에 돌입하게 된다.
2.2. 세이부 라이온즈[편집]
전년도인 1993년 시즌에 리그 4연패를 달성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지난 해 대결해서 우승을 차지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역으로 패하면서 퍼시픽리그 최초 일본시리즈 4연패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세이부는 시즌 종료 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4] 와의 맞트레이드로 아키야마 코지, 와타나베 토미오, 우치야마 토모유키를 방출하고 사사키 마코토, 무라타 카츠요시, 하시모토 타케히로를 영입하는 전력 보강을 단행했다.
그렇게 맞이한 1994년 시즌, 세이부는 개막 초부터 다이에와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한 경쟁을 벌이며 리그 1위를 달렸으나 올스타전 전후로 팀 성적이 정체되면서 급기야 8월에는 시즌 초부터 우승 경쟁에 뛰어든 다이에를 비롯해 오릭스 블루웨이브, 킨테츠 버팔로즈까지 치고 올라오는 통에 1위 자리를 두고 4팀이 경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이 되며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9월부터 궈타이위안, 이시이 타케히로 등 기존의 선발 투수진들을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 등의 구원으로 전환하는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을 포함해 몇몇 선수들이 바뀌긴 했으나 여전히 두터운 선수단을 바탕으로 11연승을 기록, 다이에 등의 추격을 뿌리치고 재차 상승세를 타면서 결국 10월 2일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전에서 승리하여 퍼시픽리그 최초의 리그 5연패를 달성함과 동시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5년 만의 리턴 매치를 맞이하게 된다.
3. 일정 및 결과[편집]
4. 경기 내용[편집]
4.1. 1차전[편집]
▲ 승리투수 : 세이부 - 와타나베 히사노부 (1승)
▲ 패전투수 : 요미우리 - 쿠와타 마스미 (1패)
▲ 홈런 : 세이부 - 키요하라 카즈히로 1호 (2회 초, 1점), 타나베 노리오 1호 (7회 말, 만루)
4.2. 2차전[편집]
▲ 승리투수 : 요미우리 - 마키하라 히로미 (1승)
▲ 패전투수 : 세이부 - 쿠도 키미야스 (1패)
4.3. 3차전[편집]
▲ 승리투수 : 요미우리 - 이시게 히로시 (1승)
▲ 패전투수 : 세이부 - 이시이 타케히로 (1패)
▲ 세이브 : 요미우리 - 쿠와타 마스미 (1패 1세이브)
4.4. 4차전[편집]
▲ 승리투수 : 세이부 - 이시이 타케히로 (1승 1패)
▲ 패전투수 : 요미우리 - 키다 마사오 (1패)
▲ 홈런 : 요미우리 - 마츠이 히데키 1호 (5회 초, 2점), 오쿠보 히로모토 1호 (9회 초, 1점) / 세이부 - 키요하라 카즈히로 2호 (6회 말, 1점)
4.5. 5차전[편집]
▲ 승리투수 : 요미우리 - 쿠와타 마스미 (1승 1패 1세이브)
▲ 패전투수 : 세이부 - 스기야마 켄토 (1패)
▲ 홈런 : 요미우리 - 요시무라 사다아키 1호 (3회 초, 1점), 오가타 코이치 1호 (6회 초, 만루), 헨리 코토 1호 (8회 초, 2점) / 세이부 - 키요하라 카즈히로 3, 4호 (6회 말, 1점 + 8회 말, 1점)
4.6. 6차전[편집]
▲ 승리투수 : 요미우리 - 마키하라 히로미 (2승)
▲ 패전투수 : 세이부 - 쿠도 키미야스 (2패)
▲ 홈런 : 요미우리 - 헨리 코토 2호 (8회 말, 1점)
4.7. 타이틀 시상[편집]
- 시리즈 MVP : [[요미우리 자이언츠|{{{#fe5a1d 요미우리}}}]] - 마키하라 히로미 (2시합 등판, 2완투 1완봉, 2승 0패, 평균자책점 0.50)
- 우수선수상 : [[요미우리 자이언츠|{{{#fe5a1d 요미우리}}}]] - 쿠와타 마스미 (3시합 등판, 1승 1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02)
- 우수선수상 : [[요미우리 자이언츠|{{{#fe5a1d 요미우리}}}]] - 헨리 코토 (21타수 6안타, 타율 .286 2홈런 3타점)
- 우수선수상 : [[세이부 라이온즈|{{{#289DD5 세이부}}}]] - 츠지 하츠히코 (28타수 10안타, 타율 .357 0홈런 1타점)
5. 둘러보기 틀[편집]
6. 기타[편집]
- 1964년 일본시리즈 이래 30년 만에 모든 평일 경기가 야간경기로 치러지면서 사상 처음으로 낮경기와 야간경기를 병행해서 개최한 일본시리즈로 기록되었다. 원래 일본시리즈는 평일, 주말을 포함한 모든 경기를 낮경기로 개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6] 이해 시리즈의 평일 야간경기 개최가 호평을 받으면서 이듬해인 1995년 일본시리즈부터 모든 경기를 야간경기로 치르게 되었다.[7]
-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현역 시절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시리즈다. 오치아이 본인은 10.8 결전 때의 부상 때문에 이 해 일본시리즈에선 3차전을 빼곤 출장조차 하지 못했지만 어찌됐든 팀이 시리즈를 제패하면서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 이 해를 끝으로[8] 이시게 히로미치[9] , 쿠도 키미야스, 츠지 하츠히코, 와타나베 히사노부,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나베 노리오, 궈타이위안 등 8~90년대 초중반 세이부의 황금기를 쌓아올린 주축 선수들의 대다수가 FA나 전력외통보로 잇달아 팀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세이부 황금기를 이끈 주축 선수들이 잇달아 팀을 떠나게 되면서 2000년대 들어서는 이들 중 일찌감찌 감독 후보로 선정된 이토 츠토무만이 유일하게 현역으로 세이부에 남게 되었다.[10]
- 시리즈 6차전 개최 직전에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퇴임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요미우리 측에서 시합 전 연습 때 이 소식을 도쿄돔 전광판에 대놓고 띄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연하겠지만 장본인인 모리 마사아키는 물론 세이부 선수단은 요미우리의 이러한 만행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으며, 세간에서도 상대팀을 비겁하게 뒤흔드는 행동이자 자팀 OB이기도 한 상대팀 감독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는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 1~2, 6차전에서 아키야마 코지가 게스트 해설을 맡기도 했다. 아키야마 본인으로썬 다이에로 이적하게 되면서 전년도까지 뛰었던 친정팀의 일본시리즈를 직접 뛰는 게 아닌 중계석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서 기분이 묘했을 듯.
- 1994년 시즌 도중의 파업사태로 메이저리그의 시즌 잔여경기와 포스트시즌이 모조리 취소되면서 미국 일부 방송국에서 대체재로 이 해 일본시리즈를 중계하기도 했으며 일본시리즈에서 투구하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사진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로 실리기도 했다.[11]
- TBS 테레비는 이전까지 일본시리즈 세이부 홈경기의 중계방송을 매년마다 편성해왔으나, 이 해 일본시리즈에선 TV 아사히가 세이부의 홈경기인 3~5차전을 전부 중계방송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세이부전 중계에서 빠졌다. 참고로 요미우리의 홈경기였던 1~2, 6차전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요미우리 신문 산하의 니혼 TV에서 중계방송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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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5~1973년까지 9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2] 1990~2000년 센트럴리그는 무승부가 나온 경기에 대해 무조건 재경기를 치르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기본적으론 130시합 제도이나 무승부에 따라 구단별로 시합수가 다르다.[3] 이 당시 오치아이의 요미우리 이적이 유력해지자 포지션이 겹쳤던 기존의 주전 1루수 코마다 노리히로가 FA를 선언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다. 결과적으로 오치아이, 코마다의 FA 이적은 두 선수 모두 이적한 팀에서 우승에 공헌하며 서로 윈윈이 되었다.[4] 당시 세이부의 황금기를 닦았던 네모토 리쿠오가 전무 겸 감독을 역임 중이었으며, 이 트레이드엔 당시 계속해서 리그 하위권을 전전했던 다이에의 전력 강화를 노린 네모토의 구상 또한 담겨 있었다.[5] 패배한 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상.[6] 예외적으로 1964년은 도쿄 올림픽 때문에 평년보다 일찍 개최되어서 야간경기가 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전경기 야간경기로 개최되었다.[7] 이후 일본시리즈 낮경기는 2011년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야 재등장하게 된다.[8] 정확히는 전년도인 1993년 시즌 오프에 아키야마 코지를 3대3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떠나보낸 것이 시작이긴 하나 황금기의 주력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게 되는 기점은 1994년부터이다.[9] 이 해 시즌 종료 후 감독 취임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현역 연장을 위해 FA 선언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적을 선택했다.[10] 이토는 2003년 은퇴 후 곧바로 감독으로 취임하여 200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토조차도 2007년 성적 부진과 구단과의 불화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2004년 투수 코치로 복귀했던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후임 감독에 취임해 2008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비롯해 2013년까지 팀을 잘 이끌어 나갔고 퇴임 후에도 GM으로써 계속 세이부에 남아있다. 추가로 쿠도 키미야스도 세이부를 떠난 뒤 다이에-요미우리-요코하마 3구단을 떠돌았으나 2010년 세이부로 복귀하여 친정팀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11] 덤으로 파업이 이듬해인 1995년 시즌 개막 직전까지 계속되면서(결국 1995년 시즌은 162경기에서 18경기가 단축된 144경기 체제로 치러졌다.) 케빈 미첼, 훌리오 프랑코 등 일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들이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선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