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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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59대 감독 거스 히딩크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명실상부 역대 최강의 대표팀으로 꼽히는 팀이다. 2002 FIFA 월드컵 준결승 진출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 대회 이후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는 화려하게 부활하며 각 국의 대표팀과 유럽 유수의 팀들을 두루 맡았고,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의 선수들은 지금까지도 축구계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다. 여러모로 한국 축구에 대단히 많은 긍정적 유산을 남긴 팀이다.
2. 감독 선임 과정[편집]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진출한 차범근호는 거스 히딩크가 이끌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0:5로 대패 탈락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축구 9위와 레바논 아시안컵 3위로 우승에 실패하여 허정무호도 이렇다 할 성적[6] 을 내지 못하면서 국가대표팀에 대한 우려는 극에 달했다. 2000년에 열린 아시안 청소년 대회 U-16/U-19 대회 모두 우승에 실패하고, 일본은 2000 올림픽 축구 8강(5위)과 2000 아시안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대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2라운드 진출 실패 개최국이 되겠다며 비난 여론이 벌떼처럼 들끓었다. 만약 대한민국이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일본이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면, 이는 국민 정서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J리그의 흥행에 이어, 프랑스 출신 명장 필립 트루시에를 영입해 1999년 U-20 월드컵 준우승, 2000 시드니 올림픽 8강 5위,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우승,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준우승 등 많은 성과를 냈다. 세리에 A에서 활약을 펼치던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와 당시 아시아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 이나모토 준이치[7] 가 활약한 것도 이때다.
당시 기술위원장으로 일한 이용수의 회상에 의하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작한 하루 일과가 대국민 사과문을 작성하고 다시 수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정몽준은 이용수에게 대표팀이 16강에 못 든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한강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농담이기야 하지만 이 말한 사람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에 국회의원까지 지낸 거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어떤 부담일지 생각해보자.
그들은 월드컵 국대의 운명을 '외국인 감독 영입'이라는 승부수에 걸었다. 기술위원회는 누구를 감독으로 영입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했고, 여지껏 주로 기용해온 값싼 동유럽 감독들은[8] 제외하고, 어차피 돈을 써서 지를거면 화끈하게 지르자는 생각으로 세계 초일류급 감독을 영입할 계획을 세운다. 새 감독을 선임하기 위한 감독 후보 1순위는 프랑스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에메 자케. 당시 자케는 프랑스 축구 연맹에서 기술고문으로 유유자적했기 때문에 연봉 협상만 잘 되면 영입이 어렵지 않을거라는 예상이었다. 그 다음 2순위는
당시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 가삼현은 1순위 자케와 2순위 거스 히딩크를 순차적으로 만나 한국 대표팀 감독직에 대한 의향을 타진했는데, 자케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 커리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고, 실제로 2000년 11월 21일 프랑스 축구 연맹에서 가삼현과 만나 최종적으로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거절했다. 반면 거스 히딩크는 선뜻 수락만 안했을뿐 자케와는 달리 거절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 본프레레와 블라제비치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히딩크와 계약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실 2000년 말 시점의 히딩크 또한 감독 커리어에 있어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는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위에 올려놓은 후 레알 마드리드 CF와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에서 연이어 경질당해 야인으로 있던 상황이었다.[9] 그래서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감독직에 도전하는 것을 두고 갈등하다 2000년 12월 7일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겠다고 통보한 뒤 2000년 12월 18일 대한축구협회를 찾아 정식 계약을 한 후 마침내 2001년 1월 1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당시 가삼현의 회고에 따르면, 거스 히딩크는 협상 도중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에 가삼현이 한국 선수들은 그렇게 할거라고 답하자 만족스러워 했다고. 또한 히딩크의 자서전에 따르면 처음에 네덜란드에서 가삼현을 만났을 때 감독직 수락이 내키지 않는 대신, 가볍게 조언해 줄 겸 "한국 팀은 장기 합숙을 통해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10] 다시 만난 가삼현이 언제든 원할 때 장기 합숙에 돌입할 수 있도록 K리그 구단들과 합의했다는 답변을 했고, 결국 감독직 수락 여부를 확실하게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11]
사실 히딩크는 전력이 약한 한국이 무엇보다 조직력을 끌어올리는게 2002 월드컵에서 만날 유럽/남미 강팀을 상대할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장기 합숙 훈련이 급선무라는 취지로 조언한 것이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대한축구협회가 자신의 조언을 바로 실행에 옮기자 본인도 한국 대표팀을 맡아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뒤 유럽/남미의 여러 강팀들과 친선 경기를 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는데 이것 역시 대한축구협회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결국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2000년 당시의 거스 히딩크는 스페인에서의 연이은 실패로 서서히 퇴물 취급을 받았기에 에메 자케처럼 쉽게 거절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도박수라도 던져봐야 하는 입장이었고, 반대로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는 아무리 거스 히딩크의 최근 커리어가 안 좋다 해도 전체적인 커리어와 한국의 역대 월드컵 성적을 감안하면 반드시 영입해야 할 인물이었기에, 결국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히딩크의 한국 감독 취임이 성사되었다. 실제로 히딩크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향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한국전쟁 참전 용사가 있어[12] 그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한국 감독을 한 번 맡아보라는 권유를 했다고 한다.
3. 코칭스태프[편집]
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관련[편집]
4.1. 최종 명단[편집]
- 월드컵 당시 박지성, 설기현, 차두리는 K리그 출장 경력이 없었다.[18]
- 당시 소속팀 기준으로 K리거 15명, J리거 5명, 유럽파 2명, 대학생 1명이다.
- 포르투갈전 승리 후, 월드컵 첫 2라운드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당시 경기장을 방문한 대통령 김대중에게, 주장 홍명보가 직접 미필 선수에 대한 병역 면제를 건의하여 10명의 미필 선수가 수혜를 받게 되었다.
- 현영민이 K리그 1 2017 시즌을 마치고 은퇴함에 따라 23인 엔트리 선수 모두 현역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2024-07-04 12:10:36 기준으로 지도자 16명[19][20] , 행정가 3명[21] , 방송인 3명[22] 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5월 21일에 발표된 23인의 월드컵 출전 최종 엔트리. 이동국, 김도훈, 고종수, 심재원, 김용대 등이 탈락했다. 히딩크는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이동국은 당시 경쟁 공격수가 워낙 많아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이고[23] , 김도훈은 수비 능력이 너무 떨어졌고, 고종수는 히딩크호 초기 황태자로 불리며 붙박이 주전이었으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됐다. 심재원 또한 베테랑 수비수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보다 피지컬로나 정신적으로나 능력이 부족했으며(심재원 항목에 가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기술이 되어있으니 참고), 김용대는 체중 관리를 못 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했던 것 때문이다. 특히 김용대는 식사 때마다 많이 먹는 것은 물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챙겨먹는 것을 보고는 완전히 학을 뗄 정도로 히딩크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선배 심부름 때문에 사온 것이라는 후문이 있긴 하다)
이영표는 훈련 중 차두리와 부딪혀 부상을 입어 히딩크는 이영표를 엔트리에서 뺄까 고민했지만 회복을 믿었고, 이영표는 본선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 전부터 활약을 하게 된다. 이영표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이을용이 그자리를 대체했고, 그는 맹활약을 펼치며 이영표와 함께 동반 기용되었다. 이영표가 부상을 입은 직후에 팀닥터는 근육 파열로 보고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히딩크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심한 부상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핌 베어벡의 소개를 통해 네덜란드의 물리치료사 존 랑엔도엔을 따로 불러 재검사를 했고[24] , 근육 파열이 아니라 타박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엔트리를 보면 알겠지만, 스쿼드는 포백을 기반으로 짜여진 것 같다. 이을용, 유상철 등 수비수가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가 포함은 되었으나 대회 내내 이루어진 쓰리백을 토너먼트 대회 동안 별탈 없이 제대로 돌리려면 센터백이 가능한 선수가 최소 5명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쿼드 상 전문 센터백 자원은 홍명보, 최진철 등 4명이다. 반대로 공격 자원은 멀티 자원 포함하여 최대 8명이 있다.[25] 실제로 본선 무대 전까지 히딩크는 당시까지만 해도 어색하던 포백을 수차례 시도해 패배하고 언론에 비판을 받았음에도 도전을 계속 하였다. 이후 한국 축구의 이상은 포백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26] 결과론적으로 본선에서는 현실적인 쓰리백을 선택하여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이런 스쿼드 구성을 극복한 조직력과 정신력 그리고 전술적 이해력이 빛난 결과라 할 수 있다.
4.1.1. 출전 여부[편집]
◎ : 선발 출전, △ : 교체 출전
4.2. 조별리그 D조 본선[65][편집]
2001년 12월 부산광역시 BEXCO에서 치러진 본선 조 추첨에서 한국은 D조 톱시드에 배치되었는데,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이라는 모두 역대 월드컵 3위 팀들과 같은 조가 되어 험난한 조별리그 대진을 받아들었다.
- 포르투갈: 1966 월드컵 당시 펠레의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며 66월드컵 3위를 기록한 팀이며, 스페인의 전통 이웃 라이벌, 실질적인 톱시드 팀으로, 유로 2000[66] 에서 유로 디펜딩챔피언 독일을 3:0, 잉글랜드를 3:2로 격파하며 유로 4강(4위)을 이끈 루이스 피구 등의 황금 세대가 포진한 FIFA 랭킹 5위의 우승 후보다. 유럽 예선에서는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본선에 올라왔는데, 네덜란드는 바로 4년 전 월드컵에서 한국을 5:0으로 털어버린 팀이다. 당시에는 FIFA 랭킹 뿐만 아니라 최근 월드컵 실적까지 시드 배정에 반영한 까닭에 1998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못 한 포르투갈이 시드를 받지 못했는데, 하필 한국과 같은 조에 편성된 것이다.
- 폴란드: 1974 월드컵, 1982 월드컵 3위팀이자 당시 한 끗발 날리던 리버풀 FC의 주전 골키퍼 예지 두덱과 공격수 엠마누엘 올리사데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동유럽의 다크호스다. 안드리 셰브첸코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우크라이나가 있었고, 4년 전 월드컵에서 브라질에게 1승을 거두고 16강에 올라간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노르웨이가 있어, 유럽 예선의 폴란드가 속한 조에서 폴란드가 본선에 오를 것이라 생각한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폴란드가 16년 만에 덜컥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해버렸으니 한국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상대로 인식되었다. 특히 이 월드컵 8강팀 미국[67] 을 3:1로 격파하였다.[68]
- 미국: 1930 월드컵 3위[69] 팀이자 그나마 해볼 만하다고 평가됐지만, 1999년 2월 A매치에서는 미국이 유로 1996 우승팀 독일을 3:0으로 완파하고, 7월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독일을 2:0으로 완파하며 대회 3위를 기록해 2경기 연속으로 독일을 완파하였고, 2002골드컵 우승과 북중미 예선을 통과한 FIFA 랭킹 13위의 북중미 강호이다. 이 월드컵 16강전에서 라이벌 멕시코를 탈락시키고 8강에 진출했으며 게다가 앞서 골드컵에서 깨진 적이 있었다.[70] 프리미어 리그 정규리그 최다 연속 출전 기록을 세운 레전드 골키퍼 브래드 프리델이 있었다.
전혀 개최국 톱 시드 혜택을 받지 못한 조편성이다. 다른 대회와 비교하자면 1998년 네덜란드, 벨기에, 멕시코에 버금가는 난이도의 조편성을 톱 시드임에도 비슷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최국은 최소 2라운드 진출한 것이 사실이라 조별리그 광탈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했다.[71]
사실 월드컵 본선은 거의 모든 진출팀이 한국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D조 대진은 특히 험난했다.[72][73] 공동개최국 일본의 H조 대진(벨기에, 러시아, 튀니지)[74] 과 비교하면 한국이 사실상 개최국 이점을 못 받아 불운한 것은 사실이다. 이때만 해도 한국이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1라운드 통과에 실패하는 개최국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국민들에게 돌았다.
5. 활동[편집]
5.1. 2001년[편집]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2002년[편집]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2년/1~5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각주]
6. 분석[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진출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그에 따른 경험도 많으며 자국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번히 1승 조차 못 거두고 지난 대회에서는 5:0 안드로메다 관광까지 당해가며 탈락하는 굴욕을 겪던 승점자판기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팀이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며 세계 4위에 오른 것은 당시 경기를 직관한 관중들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적에 가까운 성과다.
당시 대한민국이 현재와 비교하면 유럽파가 거의 없던 시절의 전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결과는 계속 말하듯 기적에 가까운 성과다. 대다수의 해외 언론 및 전문가들은 축구계에서 비주류인 아시아 국가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이는 국내 여론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얻어낸 결과였으니 더더욱 값진 성과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분명 기대 이상의 성과이기는 했으나 충분히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6.1. 동기부여[편집]
히딩크호에 승선한 대표팀 선수들의 동기 부여는 대부분 뛰어난 수준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절실한 이유와 성공에 대한 열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것이 히딩크호의 성공의 발판이 되어 주었다.
가장 먼저 대표팀의 맏형 황선홍이 컨페드컵에서 프랑스에게 5:0으로 처참하게 지고 난 뒤 히딩크 앞에서 펑펑 울며 서러워한 일화는 유명하다. 황선홍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그는 한때 월드컵 본선에서 잇달아 찬스를 날려먹은 전적이 있고,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정확히는 명단에는 있었지만 이미 엔트리 제출이 끝났기 때문에 교체 불가능)하는 흑역사가 있었다.[75]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은 황선홍은 2002 월드컵을 앞두고 국내 스포츠 전문 웹진 후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전 다시 한국에 가야 합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기에 그 인식을 모두 바꾸고 은퇴하려고요."라며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할 만큼 월드컵에서의 골과 승리에 목마른 처지였다.[76]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참여했기에 2002년 월드컵 첫 경기에서 역사적인 첫 골을 넣고 승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주장 홍명보 역시 장기적인 부상을 입어 폼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수비를 3백에서 4백으로 바꿀 의도가 있던 히딩크의 희망사항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할 위기에 몰렸고 여론 역시 홍명보가 이제는 대표팀의 짐이 될 것이며, 차세대 중앙 수비수로는 송종국이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홍명보는 절치부심하여 대표팀에 승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1994년 월드컵에서 는 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이며 선전했으나, 1998년 월드컵에서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2002년 월드컵에서는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내고 승리를 얻고 싶어했기에 홍명보는 부상 회복과 재활에 집중했으며 대표팀에 복귀한 이후에도 히딩크의 요구사항을 소화하며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며 결국 2002년 월드컵에서 브론즈볼을 수상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운재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교체 멤버로 참가하여 분전했지만 팀이 탈락하는 경험을 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결핵으로 쓰러져 낙마했다. 이 당시에 받은 좌절감은 큰 한이 되었고 더불어 선배 골키퍼 김병지와의 경쟁 속에서 지지 않겠다는 일념이 생겨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이운재는 히딩크의 신뢰와 김병지의 실책이 겹친 행운에 따른 기회를 잡아 최고의 골키퍼로 거듭나며 대표팀의 골문을 지키는 든든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안정환,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 등 많은 히딩크호의 멤버들이 이번에야말로 월드컵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분발의 마음을 가진 것은 물론 자국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에 대표팀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훈련 중 부상을 입더라도 선후배 순서로 치료받기보다 후보 멤버인 선배가 주전 멤버인 후배들에게 치료 순서를 자진해서 양보할 정도로 대표팀의 성공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실했다.
다만 최태욱처럼 자주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멤버들은 열정과 의욕이 가득했고 그들만의 절실한 이유로 동기 부여가 높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독인 히딩크의 경우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베티스에서 실패한 이후 바닥을 치고 올라가겠다는 의욕이 있었으며 본인이 과거 교사 생활을 통해 심리전에 능숙하다는 점도 선수들의 사기 진작과 동기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전에서 미스를 남발한 설기현이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터트린 점, 미국전에서 PK를 실축한 이을용이 바로 그 경기에 동점 어시스트를 만들어 낸 점, 이탈리아전에서 역시 PK를 실축한 안정환이 연장 골든골을 터뜨린 점 등 선수들이 경기 중에 이를 만회하는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히딩크의 이러한 전략 때문이었다.
6.2. 한국 축구계의 전폭적 지원과 홈 이점 활용[편집]
앞서 언급했듯이,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첫승과 첫 2라운드 16강을 위해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이 역대 홈 팀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준비한 팀이 되었고, 유례없을 정도로 엄청난 지원과 장기 합숙 훈련을 했다. 히딩크 부임 기간에만 2001년 1월 홍콩과 오만, 2월에는 UAE, 4월에는 이집트, 8월에는 네덜란드, 2002년 1월에는 미국, 2월에는 우루과이, 3월에는 스페인에서 장기 전지훈련을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코칭 스태프를 마음껏 꾸릴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더불어 이런 수많은 전지훈련을 위한 시도 때도 없는 차출 요구에 K리그 팀들도 군소리 하나 없이 순순히 응해줬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대표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조직력을 갖추게 되어 전력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히딩크 이전이나 이후의 대한민국 감독 뿐 아니라 다른 나라 대표팀의 감독들을 봐도 이 정도의 지원을 받은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2002 월드컵이 전국민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은 대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클럽 감독은 1년은 거쳐야 팀 컬러가 정립되고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특히 국가대표팀 감독은 클럽팀처럼 매일을 함께하지는 않기 때문에 감독의 전술철학과 그에 맞는 선수구성을 짜려면 1년 반~2년 이상 꾸준히 수행해야 팀이 정비된다. 게다가 당시 한국은 히딩크의 언급대로 시스템의 전문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최소 3년은 걸려야 성과를 드러낼 만 했었다. 그러나 히딩크가 약 1년 반 만에 팀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한 건 K리그의 과감한 희생 덕이 컸다. 상기했듯 선수들이 A매치 기간에만 차출되어 국가대표에 소집되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의 완성이 느린 것인데, K리그의 과감한 희생 덕분에 평소 같았으면 대표팀이 리그를 뛸 시간에 장기 합숙 훈련을 하면서 이른 시간에 조직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히딩크호를 예시로 들며 감독이 바뀌면 짧은 시간에 강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며, 당시 알렉스 퍼거슨이 히딩크호의 활약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K리그의 희생을 잊어선 안된다"고 괜히 말한게 아니다. 실제 히딩크도 이때를 회상하면서 "월드컵에 클럽 팀이 끼어든 격", "국가대표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팀"이라 평가했다.
이때문에 일각에서는 히딩크호의 4강 신화는 합숙빨이라고 폄하하기도 하는데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개최국 카타르 역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장기 합숙을 하였지만 본선에서 무승부 승점 1점도 얻지 못하고 3전 3패 전체 32등으로 탈락했다. 이 직전 중국 또한 최초 월드컵 진출을 위해 슈퍼리그까지 중단하며 합숙하였지만 최종예선에서 단 1승만 거두고 탈락했다.# 히딩크호의 장기 합숙이 탄탄한 조직력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방증한 것이다.
또한 히딩크호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은 체계적인 관리와 선수 관리, 상대팀 분석이 이루어졌다. 체력 관리 트레이너나[77] 비디오 분석관[78] 등의 보직이 생겨 감독을 보좌하고 선수들에게 폭넓은 정보를 줬다. 이전에는 이런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훈련도 주먹구구식으로 해왔고, 선수 관리나 상대 팀 분석 같은 건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79] 히딩크가 부임해 첫 훈련을 했을 때도 이런 문제로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80]
여기에 의무팀도 전속 계약을 맺고 선수들을 면밀히 관리했다. 이영표가 대회를 앞두고 부상 당했을 땐 히딩크는 이들마저 못 미덥게 여겨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네덜란드 의료진에 따로 문의했을 정도. 이후 대표팀의 팀 닥터가 흉부외과 전문[81] 이라든지, 제대로 계약도 안 한 봉사 수준이던 점을 생각하면 현재보다 훨씬 관리가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82]
그리고 당시 경기들을 보았을 때, 현재의 국가대표보다 훨씬 빠른 선수들의 움직임이 돋보이는데 이는 홈팀의 이점이기도 했다. 히딩크가 경기 전 경기장의 잔디를 짧게 손질하고 스프링클러를 가동해 달라는 주문을 넣었기 때문. 축구화의 스터드에 잔디가 길수록 빠른 볼 컨트롤과 스피드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는 것이 그 이유. 이 사실은 2003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밝혔다.[83]
6.3. 최정예 멤버[편집]
히딩크호는 전무후무할 지원을 등에 업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팀을 새로 만들다시피했다. 히딩크호는 FC 코리아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선수들을 성장시키고 가능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바쁜 일정들을 소화했다. 선수들의 훈련 프로그램을 지시하는 한편,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가지고 선수의 포지션 자체를 변경하는 실험을 자주 했다. 예를 들어 송종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오른쪽 윙백/미드필더는 물론, 센터백을 겸할 수 있었으며 골드컵때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실험했다. 이영표는 2002년 3월 이전까지는 꾸준하게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다 김남일이 해당 위치에 자리잡은 이후에야 본래 포지션인 왼쪽 미드필더로 돌아갔으며, 박지성 역시 월드컵 직전에야 우리가 흔히 아는 윙어로 자리잡았을 뿐, 그 전까지 히딩크호 내에서 주로 중앙 미드필더를 소화했다. 이처럼 히딩크호의 장점으로 꼽히는 멀티플레이어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 유상철과 같은 선수들의 대거 등장은 재능있는 선수들을 다양한 포지션에 넣어져 실험한 결과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84]
특히 윙어로 뽑아놓은 선수 중에 설기현은 그 활약이 엄청났는데, 16강까지만 갈 수 있었던 히딩크호에게 8강으로 가는 관문을 뚫어놓는 선물을 줬다.[85] 히딩크호 최대의 신의 한 수 중 하나가 바로 설기현 그 자체였다.
센터백으로 엔트리된 홍명보와 김태영, 이민성은 1998 월드컵 당시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이었으며,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과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서 0-5 패배를 당할 때 당시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하지만 히딩크호의 손을 거치자 이들은 결국 월드컵 4위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낸 선수들이 되었다.
그 결과 히딩크호의 멤버들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정예 멤버로 완성되었으며, 히딩크의 지도 하에 의해 완성된 한국식 토탈 사커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는 균형 잡힌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골키퍼 이운재[86] , 공격수 황선홍, 수비수 홍명보, 미드필더에 유상철 등 한국 축구사상 최고의 핵심 멤버들이 포진했으며 각자의 개성이 다양해 균형이 잘 잡혔다.[87] 게다가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수많은 선수들을 단기간에 빡세게 실험해 본 후 추리는 유리함까지 있었다.
잘 추려냈기 때문에 굳이 선수를 하나하나 나열할 것까지도 없이 이 당시 출전한 멤버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폼도 상당히 좋았으며, 비교적 균형도 잘 맞는 편이었다. 다만 멀티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엔트리에 주전을 제외한 전문 중앙 수비수 자원이 이민성 1명 뿐이라 주전이자 베테랑인 30대 스리백 3명을 4강까지 내내 돌린 것은 아쉬우며, 현영민, 최성용 등 윙백 교체 자원의 무게감이 부족해 멀티플레이어 이을용만 활용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아무래도 윙백이나 수비수 교체 자원이 김남일이나 유상철에 준하는 수비력으로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는 강력한 수비력을 지닌 자원이었거나 차두리가 일찌감치 공격수와 윙백을 소화 가능했으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스쿼드에 선발되었으나 출전 횟수가 적거나 없던 2군 멤버 최용수, 최태욱, 차두리, 윤정환, 최성용, 이민성, 김병지, 최은성 그리고 2002 월드컵 스쿼드에 선발되지 못한 이동국, 김도훈, 서정원 등의 능력을 2010년대 국가대표들과 비교해 보면 2002년 멤버들의 무게감이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88] 이동국은 2015년 아시안컵 주전 멤버로 예상되다 부상으로 탈락했으나 2017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경기를 뛰었으며, 차두리는 2015년 아시안컵에서 훌륭한 활약을 하고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했다.
훗날 최진철은 월드컵 데뷔전을 떠올리며 "너무 떨려 도망가고 싶었다. 폴란드전에 애국가를 부르는데 복도 입구만이 보였다. 당장 거기로 뛰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압박감이 심했다는 뜻이다. 해당 기사
이후 히딩크가 중국 U-23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했을 때 "중국이 월드컵 진출하려면 개최 말고는 답이 없다"고 할 만큼 선수들의 질이 매우 안 좋았고, 히딩크 본인이 20세 이하에서까지 선수들을 찾으려 할 정도였다. 한국 대표팀을 맡을 땐 조직력을 끌어올리면 강호들과 겨룰 수준은 될 거라고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2002년 시절 기량과 잠재력이 높은 한국 선수들이 제법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89] 즉 히딩크의 지도력도 좋았지만 기본적인 선수풀 또한 좋았다.
6.4. 탄탄한 조직력[편집]
축구는 조직력이 생명이다. 애초에 팀을 구성할 때 선수들끼리 손발을 무지하게 많이 맞춰봤다. 그 결과 손발이 잘맞는 조합인 안정환-설기현의 공격진과 송종국-박지성-김남일-이영표-이운재의 수비진을 구축했으며 그 연결고리로 유상철을 택했다. 게다가 그들을 아우를 노장으로 홍명보-황선홍 콤비를 택했다. 차두리의 경우 좀 우려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분데스리가의 전설 차범근이기 때문에 혹시나 약관을 갓 넘긴 젊은 선수가 스타 의식에 젖을까봐 걱정도 했다. 허나 차두리는 아버지와 자기는 별개의 선수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차두리는 차범근의 후광을 이기려고 전심전력을 다했다.[90]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엄청나게 강한 그 원동력이 바로 조직력이며 히딩크 역시 조직력을 극대화해 대한민국 국민들과 대표팀의 목표인 16강을 훨씬 뛰어넘는 4위라는 성적을 달성시킨 것이다. 21년 뒤 김은중호도 조직력 원툴로 2연속 4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낸다.
6.5. 거스 히딩크의 지도력[편집]
상기 서술한 선수들의 사기 충천 + 전폭적인 지원 요소를 등에 업은 히딩크로선 성과를 못 낼 수가 없을 노릇. 그나마 방해되는 요소는 오직 여론 뿐이었고 당시 히딩크는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준비 과정에서 쏟아지는 비판은 수용하되, 월드컵 본선 대회에만 철저히 올인하여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91] 선수들을 선발했으며 전략, 전술을 짜고 고도의 체력 훈련을 감행하였다. 이 결과 대한민국 선수들의 전력은 웬만한 유럽, 남미팀 급으로 수직상승하였으며 이에 맞선 유럽의 강팀들을 집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었다. 특히 체력적인 면에서의 비약적인 발전은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상대로 대등한 접전을 벌이고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을 차례로 상대하면서도 체력 방전 없이 꾸준히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셈. 체력과 몸싸움의 발전은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로 뽑히곤 한다.
그리고 히딩크는 2002년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같이 실력은 세계 최정상급으로 뛰어나지만 플레이 스타일이 독불장군형인 선수는 과감히 배제했다. 얼마나 동료 선수들을 위해 희생하느냐, 얼마나 팀에 기여하느냐 오직 이 두가지만 보고 엔트리 멤버를 차출했다. 일례로 홍명보의 경우는 팀의 맏형이라 맏형으로서 팀을 장악하려들자 히딩크는 그런 홍명보를 과감하게 팀에서 내쫓았다. 이에 홍명보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경기에 임하겠다고 해서야 겨우 히딩크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히딩크는 연습경기이든 평가전이든 실제 월드컵 경기이든 간에 골을 어시스트한 선수를 매우 크게 칭찬했다.
일각에서, 특히 한국의 몇몇 거물급 축구 지도자들은 히딩크호의 성과를 위에서 제시한 축구협회의 전폭적 지원 덕으로만 치부하며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지원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월드컵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히딩크 이전의 한국 축구계는 상대팀 분석은 고사하고 한국 축구 자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조차 오판하고 있었다. 당시 히딩크가 보여주었던 한국 축구에 대한 냉철한 평가, 한국 축구에 도입한 훈련 시스템, 실력 위주의 선수 선발 방식, 선수단 장악 능력, 언론 및 여론에 대한 대응 능력 중에서 단 한가지라도 부족했다면 단순히 긴 시간과 예산만 가지고 성과를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히딩크 이전 부임한 데트마어 크라머, 아나톨리 비쇼베츠 두 외국인 감독에 대해 한국 축구인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보면 한국 축구인들이 히딩크를 대신해 성과를 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야망 또한 남달랐다. 알려진대로 당시 축구협회장 정몽준이 목표는 우승이라며 할 수 있냐고 말했을 때 그 부분이 마음에 들어 팀을 맡았다고 이야기했고 막상 대한민국 국민들이 32개국 본선 조편성을 보고 16강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까를 걱정했을 당시 히딩크는 최소 4강 이상의 성과를 바라봤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6강으로 이끈 다음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I am still hungry)."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는 붉은 악마의 4강전 카드 섹션 '꿈★은 이루어진다'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될 2002년의 상징적인 문구로 자리잡았다.
선수들 앞에서도 이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한국이 16강에 오른 직후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스페인이 아일랜드를 꺾고 8강에 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페인의 전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스페인과 8강전에서 붙을 각오로 이탈리아를 꺾는다."는 의도와 함께 스페인-아일랜드전을 관전하러 가는 패기갑스런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이런 감독의 행보 하에서 대표팀은 16강 진출 이후 해이해진 정신을 다 잡았고, 16강, 8강, 4강전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았다.
히딩크는 전술적으로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수비 라인에서 백3와 백4를, 공격에서는 3톱과 2톱을 모두 사용했다. 월드컵 경기 내내 선발 라인업은 3-4-3이지만 원래는 4-3-3을 사용하려 했고, 경기 도중에는 선수 교체에 따라 혹은 선수들의 위치 조절 만으로 4-3-3[92] 이나 4-4-2[93] 로 변화시키는 변화무쌍한 전략을 사용했다. 히딩크는 이러한 유연하고 뛰어난 전술로, 기존 전술적 흐름에서 사장되어 가던 리베로와 판타지스타를 모두 적절히 사용했다. 특히 히딩크의 전술적 능력은 이탈리아전에서 돋보였는데,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빼고 공격수만 셋을 추가로 투입하면서도 수비 밸런스를 유지, 세계 최강급 전력이던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이탈리아를 침몰시켰다. 이러한 전술적 능력은 선수 육성과 더불어 히딩크 매직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하였고, 이후 뛰어난 감독들의 성과를 매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로이스터 매직 등)의 원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