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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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폴란드어: Kazimierz IV Jagiellończyk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리투아니아어: Kazimieras IV Jogailaitis (카지미에라스 요가일라이티스)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의 루테니아 출신 네번째 아내 조피아의 셋째 아들[1] 로 태어나 꼭두각시로 써먹히기 위해 옹립당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동군연합을 공고히 다졌고, 튜튼 기사단을 몰아내어 그단스크를 탈환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명군으로 보이겠지만, 그가 아무 생각없이 남발했던 조항[2] 들은 후대에 폴란드 왕권을 제한하는 족쇄로 작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멸망의 씨앗이 되었다.
2. 행적[편집]
2.1. 어린시절[편집]
개요에서 설명되듯이 네번째 아내의 둘째 아들이란 입지 때문인지 별다른 교육도 못받고 관심도 못받는 상당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하게되자 법적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래봐야 사실 말이 좋아야 상속자지 아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다시 밀릴 운명이었다.
2.2. 리투아니아 대공[편집]
그런데 때마침 리투아니아 대공인 스비트리가일라가 후계자없이 사망하자[3] 브와디스와프 3세의 명으로 총독으로 파견된다. 그런데 써먹기 편한 꼭두각시를 원한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강제로 그를 대공으로 추대하고, 한동안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를 통치했다.
2.3. 즉위[편집]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식도 남기지 못한채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자, 폴란드 국왕도 겸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리투아니아로 건너갔기 때문에 폴란드의 궁정 생활보다 리투아니아에서 사냥하면서 노는 것을 더 즐겨 폴란드 국정에 관해서는 주교 임명권을 제외하면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폴란드 귀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며 한발 물러섰다.
1454년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엘리자베트[4] 와 결혼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결혼 생활중 무려 13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고, 이 또한 그의 정통성과 권력 외교관계를 강화시키는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4. 튜튼 기사단 복속[편집]
그리고 결혼식이 이뤄진 1454년 카지미에시 4세는 프로이센의 반 튜튼 기사단 세력과 밀약을 맺고 기사단을 공격해 13년 동안의 전쟁을 통해 단치히를 포함한 비스와 강 하류 영토를 모조리 탈환하고 튜튼 기사단을 쾨니히스베르크에 몰아넣은 뒤 이들을 겁박해 복속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폴란드 왕국 입장에서는 150년 만에 고토 회복이었다. 이후 그단스크는 비스와 강 수운을 이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농산물을 서유럽으로 수출하는 창구로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2.5. 사망[편집]
1492년 현 벨라루스의 흐로드나(Гро́дна)[5] 에서 죽음을 맞이하며[6] 유해는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3. 주요 자녀들[편집]
- 헝가리-크로아티아 왕 울라슬로 2세: 보헤미아의 블라디슬라프. 러요시 2세의 아버지
- 카지미에시(성 가시미로): 가톨릭 성인
- 얀 1세 올브라흐트: 폴란드 국왕
-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지그문트 1세: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4. 기타[편집]
아들 중 한 명인 카지미에시(성 가시미로, 1458~1484)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사후 빌뉴스에 묻혔는데 기적을 인정받아 1522년에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성인으로 선포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Europa Universalis IV에서 4/4/1의 능력치와 기본적으로 학자 트레잇(기술 비용 -5%)을 가지고 있는 군주로 등장한다. 시작 시점인 1444년에 재위 중이지는 않고, 공위기를 거쳐 1440년대 후반에 뜨는 왕위 계승 이벤트를 통해 즉위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마차시 1세가 개혁교회를 받아들이자 이에 반발한 헝가리 귀족들이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언급된다. 물론 상대가 그 마차시라 헝가리 귀족들이 박살나는 바람에 직접 등장하진 않는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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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째 형 이름도 카지미에시였으나 어린 시절 사망했다.[2] 물론 니힐 노비(Nihil novi)와 같은 특권은 4남 알렉산데르가 승인하기도 했고, 그가 승인했던 조항들은 정작 그가 살아있을 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고 선거왕제가 들어서 외국인 군주들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폴란드 왕권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3] 브와디스와프 2세&비타우타스 연배라 즉위할 때 이미 노인이었다.[4] 카지미에시 3세의 후손인데, 정확히 말하면 카지미에시 3세의 딸이 엘즈비에타 카지미에쥬부나인데 바로 엘즈비에타의 현손이다.[5] 폴란드어로는 그로드노(Grodno), 리투아니아어로는 가르디나스(Gardinas)[6] 사인은 폐렴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