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낙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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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성공회의 제7대 대전교구장, 16대 관구장을 역임한 現 서더크교구 보좌주교.
2. 생애[편집]
유낙준 주교는 3대째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생 때까지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다. 집안이 유복한 편은 아니어서 고등학교는 당시 학비가 거의 공짜에 기숙사도 제공하던 국악고를 다녔다. 충남대 재학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잦은 투옥과 고문을 겪었다. 충남대 졸업 후에도 약 3년여간 노동운동을 벌였다가, 건강악화로 휴식하던 중 우연히 기회를 얻어 성 미카엘 신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이재정 총장과 신영복 교수 등은 신학생이었던 유 주교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것이 오늘날의 유 주교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93년에 부제 서품을, 1994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사제 생활 초기부터 수많은 가출청소년 숙소와 자활센터들을 지어 청소년과 빈민 사역에 힘써왔다. 청소년 사역의 성과와 기초생활보장제도 입법과정에서 자문위원으로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1월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Wee 스쿨 제도를 처음으로 고안했고, 대전가정법원에서 운영하는 로드스쿨(Road School) 프로그램[6] 도 유 주교가 고안한 정책이다.
2014년 8월 열린 전국의회[7] 에서 권희연 주교의 정년 퇴임 이후 2년 가까이 공석이었던[8] 대전교구장 자리에 유낙준 주교를 선출[9] , 12월 6일에 서품을 받고 같은날 승좌하였다.
2022년 12월, 유낙준 주교는 교구 상임위원회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듬해 4월 30일부로 퇴임하기로 결정되었다.[10]
3. 여담[편집]
- 국악고에서 해금을 전공했지만, 음악으로 먹고살긴 힘들겠다고 판단해, 대학교는 일반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래도 그 때 배운 해금 실력이 녹슬지 않아, 교구 행사 등에서 가끔씩은 성가를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1]
4. 둘러보기[편집]
[1]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유낙준 중장과 동명이인에 한자까지 같다.[2] #[3] 8년 4개월 25일[4] 2년 2개월 12일[5] 필립 1,21[6] 지리산 산책로(약 230 km)를 걸으며, 소년범죄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성실히 수료한 청소년에게는 처벌 감경의 혜택이 있다.[7] 원래 교구장은 교구의회에서 선출해야 하나, 장기간 당선자를 정하지 못한 경우에는 전국의회에서 결정한다.[8] 당시 서울교구장이자 관구장이었던 김근상 바우로 주교가 관리주교를 맡았다.[9] 유낙준 주교는 대전교구의회 투표와 전국의회 투표에서 계속 중하위권을 기록해 사실상 낙선된 상태였는데, 대의원들의 파벌 갈등으로 선거가 진흙탕 싸움으로 변했고, 2번의 교구의회, 4번의 전국의회, 총 1년 9개월여의 오랜 투표 끝에 정말 얼떨결에 교구장 주교로 당선됐다. 그런데, 대전교구는 이전 교구장인 권희연 미카엘 주교를 뽑을때도 이러한 갈등이 있었다.[10] 퇴임 사유는 영국의 북한이탈주민 사목을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11] 지난 2018년 4월, 뉴욕교구를 방문 했을 때 한 공연이다. 영상 중후반부터는 허성우 사모의 강연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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