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r4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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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쇼와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2]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 활동 기간은 717일로 다소 짧은 기간이며 현재는 사후의 시간이 오래 지난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변치않고 지금까지 응원하는 당시의 팬 세대와 오늘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새롭게 생겨난 팬 세대까지 존재할 만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3]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1967년(쇼와 42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제왕절개에 이른 난산으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직후엔 신체 47cm, 2.7kg의 미숙아였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유키코가 2살이 되었을 무렵 일본의 3대 신사 중 하나라 불리는 아츠타 신궁이 있는 나고야시 아츠타구로 이사하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데뷔 준비를 위해 고향을 떠나기 전 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유소년기 시절, 언어장애까지는 아니었으나 '사()행'을 발음하지 못해 '선생님(센세)'를 "텐테"라고밖에 발음하지 못했다.[4]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언니가 다녔던 YMCA의 체육 교실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운동신경이 부족하다 생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또한 귀가 크게 눈에 띄는 것으로부터 놀림을 받아서 귀를 숨기는 헤어스타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소꿉놀이를 하는 것보다는 도구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것이나 조립하는 것을 좋아해서 조부모님이 유키코에게 선물로 갖고싶은 것을 물으면 '목공도구 세트'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엔 그림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작품을 표현하는 화가같은 직업을 동경하였다고 한다. 4학년 때는 수채화를, 중학생이 되며 유화와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5] 재능이 있다면 어머니에게 예술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줬다고 한다.
1974년(쇼와 49년), 연예계 또한 동경하던 유키코는 초등학교 6학년에 연극부에 가입하며 학예회에서 옛날 이야기 우라시마 타로의 오토히메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극은 교장까지 보러올 정도였다고 한다.[6] 이것을 계기로 중학생이 되어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호리프로 탈렌트 캐러반' 등의 오디션에 응모하게 되었다.
1981년(쇼와 56년) 중학교 2학년에는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였는데 준 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7] 그리고 평소 동경하고 팬이었던 여성 아이돌 카와이 나오코의 초상화를 그려 본인에게 직접 보내려고 하였다.[8]
그러던 중 1982년(쇼와 57년) 8월, 가수가 되기 위해 닛폰 테레비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11] 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때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 학생기록부를 써주지 않겠다."라는 학교 선생님의 반대에 유키코는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나고야 지역 예선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 티켓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뿐만 아니라 유키코의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결사반대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12월에 열린 결승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다. 이에 유키코는 식사도 거르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자 보다 못한 가족들이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위에 상기한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이지만 특히 두 번째는 () 즉 유키코는 엄친딸이었다.[13]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지만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에 전념하였고 놀랍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이듬해 1983년 결승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당시 저명한 여러 개의 소속사의 오퍼를 받았으나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부모님에게 각고의 설득을 한 끝에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오디션 예선과 결승전인 '스타 탄생!'에서 각각 부른 노래가 키타하라 사와코의 'MY BOYFRIEND'와 나카모리 아키나의 슬로우 모션. 참고로 아래 영상에서 함께 인터뷰하는 사람들 모두 아이돌 데뷔가 결정된 사람들이지만 유키코를 제외하고 모두 인기를 끌지 못했다. (...)
1983년 7월 17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저명한 영능력자이자 성명 판단가[14] 인 오키 히로코[15] 에게 예명 오카다 하루코(岡田晴子), 오카다 카요코(岡田佳代子), 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라는 3개의 이름들을 후보로 정했으나 '하루코'는 같은 소속사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桑田靖子)와 한자가 비슷하였고 '카요코'는 성격적으로 약한 이름이라 격한 연예계 생활에 버틸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탈락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희망을 가지다(希望有)라는 의미를 가진 현재의 예명인 오카다 유키코로 결정되었다. 연예계에서의 목표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는 것이었고 또한 카와이 나오코에 대한 동경도 품고 있었다.
8월 25일, 도쿄로 상경하여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에서 하숙하며 동거인으로 1년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와 같은 '스타 탄생!' 합격자 타키 사토미가 있고 타키와는 룸메이트로 지냈다고 한다. 또한 나고야 코우요우 고등학교에서 9월 1일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편입하였다.
레이블 포니 캐년의 프로듀서는 오카다 유키코에 대한 이미지를 6대학 야구(도쿄를 소재지로 한 유서깊은 고교 야구 리그)를 보러 다니는 야마노테(도쿄 15구의 명칭)의 아가씨로 정하고 데뷔곡을 타케우치 마리야에게 의뢰하였고 아이돌 데뷔를 위해 박차를 가했다.
2.2. 데뷔 후 [편집]
1984년 1월 10일, 남성지 잡지사 '스콜라'로부터 첫 취재를 시작으로, 3월 11일 도쿄의 메이지 싱궁 회화관 앞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벤트 '토비라! 팝시티 과자 페어'가 개최되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티 파티 형식의 팬 교류회인 '모여라 유키코 프렌즈'를 나고야를 시작으로 전국 7개의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3월 25일에는 음악 프로그램 TBS의 더 히든 스테이지[16] , 4월 14일에는 테레비 도쿄에서 방송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와 TV 아사히에서 방영된 '아이돌 펀치'에서 가수로서 처음으로 여러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4월 21일, 싱글 1집 'ファースト・デイト'로 정식 데뷔하였다.
5월 31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 아이돌로 데뷔한 키쿠치 모모코와 함께 TBS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스포트라이트 코너에 출연하였다.[18] 당시 더 베스트 텐 ファースト・デイト차트 순위에서 21위를 기록하였기에 정식 출연은 아니였고 당시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와 쿠메 히로시가 유키코의 이름을 '오카다 우키코'로 착각하여 부르며 곡명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실수했던 일화가 존재한다.
이후 10월 15일, 닛폰 테레비의 음악 프로그램인 더 톱텐에서는 8위, 10월 18일에는 더 베스트 텐에서는 10위를 달성해 드디어 정식 출연에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 26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 신인상까지 수상하였다. 줄곧 사무소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고 언론에서 칭했지만 정작 유키코 본인은 역시 자신은 자신일 뿐이니까, 마츠다 세이코를 따라하고 싶지 않다.라고 얘기하였으며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오카다 유키코라는 답변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프로듀서 등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1984년(쇼와 59년) 8월 23일, 9월 6일 제10회 일본 TV 음악제가 개최되어 リトル プリンセス[19] 를 예선으로 통과하였고, 본선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유키코의 귀엽고 청순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데뷔 초부터 똑똑하고 총명한 면모도 돋보였는데 음반 영업소에 인사차 그녀를 데리고 갔을 때에, "애인이 있으신 분들은 1/3을, 사모님이 계신 분은 1/4이면 되니까 자신에게 애정을 주세요."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린 소녀가 영업직 앞에서 귀여우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둘만의 세리머니 발매 당시와 5개월 후의 무대를 비교해 보면 발성이 조금 바뀌었다. 이전보다 더욱 어른스러워졌고 곡에 대한 해석 또한 늘어났고 가창력이 더욱 늘어나는 유키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아이돌이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은 사소한 일이였는데 예를 들어 마츠다 세이코는 '붉은 스위트 피'로, 기존 세이코짱 컷에서 숏컷 헤어스타일로 바꾸게 되며 난리가 났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부릿코' 노선에서 벗어나 여성 팬들이 생겨났고 코이즈미 쿄코의 경우에도 당시 사무소에 말하지 않고 멋대로 머리를 자른 뒤 발매한 5번째 싱글 '새빨간 여자아이'의 이미지와 어울려 성공하였다. 아마 유키코도 그런 선배들의 성공 사례를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1984년 여름부터, 숏컷을 하고 싶은 생각을 비췄으나 선뮤직에서는 기존의 '오카다 유키코의 이미지가 있다'고 계속 반대된 것 같다. 그러나 이후 5번째 싱글 'Summer Beach'를 발매하던 시기에 '여름 곡이고, 숏컷도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허락하게 되었고 이 곡의 발매는 4월 17일. 그 한발 앞서, 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유키코의 숏컷 헤어스타일 변화는 기존 팬덤 내 이탈을 발생시키는 등 득보단 실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숏컷이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목덜미가 짧고, 앞머리를 시치조에게 세우고 꽤 보이쉬하게 바뀌었다. 예전의 세이코나 쿄코의 소프트한 숏컷에 비해 다소 공격적이었고 눈썹 메이크업도 눈썹 끝이 올려져 전체적으로 80년대 활발한 여성상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부드러운 신데렐라 컨셉 노선에서 대담한 이미지 변신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근면성실한 타입으로 남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된 연예인 생활 동안,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라고 해서 다이어트에 대한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콘텍트 렌즈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21] 또한 무리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어가던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고 결국 1985년(쇼와 60년) 12월,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노래 커버 프로그램에서 소속사 선배 마츠다 세이코의 눈동자는 다이아몬드와 카와이 나오코의 열렬한 팬이였던 유키코가 을 부르기도 하였다.
1986년 1월 1일부터 6일까지 홍콩&마카오에서 사진 촬영, 1월 2일 '올스타 첫 꿈 대합전'의 연재 소설 '멜로디 라인은 꿈속'의 집필이 시작되었고 1월 8일부터 시작된 '비너스 탄생' 레코딩이 28일 종료되었다.
1986년(쇼와 61년) 1월 29일, 8번째 싱글 Network를 발매하였다. 당시 작사는 소속사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23] 가 맡았고 작곡, 편곡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게 되며 상당히 호화로운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출산 이후 연예계 활동을 쉬고 있던 세이코가 처음으로 다른 가수에게 작사를 해줬다는 점으로 발매하기 전부터 여러 기사에서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다.[24] 당시 싱글 판매량이 23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유키코의 최고 히트곡으로 자리 매김하였고, 2월 10일 오리콘 데일리 차트 1위로 첫 등장하였다.
3월 3일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나카노 선플라자 홀에서 열린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친구인 타나카 쿠미와 손을 잡고 취재를 받았다.
1986년 3월로 추정되며, 1973년 발매된 코사카 아키코의 ''[25] 커버 무대로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스위스의 알프스 소녀가 되었다는 설정이다.[26]
첫 번째 사진에서는 좌측의 네 번째, 두 번째 사진과 세 번째 사진에서의 가운데가 유키코 본인이며 그녀가 속한 반에는 미나미노 요코, 혼다 미나코[27] , 나가야마 요코[28] , 이시노 요코, 타나카 쿠미 등 이미 아이돌로 데뷔한 학우들이 많았다. 유키코의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와 데뷔 동기인 오기노메 요코와 직속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도 유키코와 같은 고교 동문 출신이다.
TBS 테레비의 연속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29] '에서 주연으로 등장, 1월에 발매한 싱글 '입술 Network'의 오리콘 차트 1위 달성, 4월 5일부터 개최되고 있었던 전국 콘서트, 4월 10일부터 테레비 아사히의 드라마 가출소녀[30] 촬영 일정과 싱글 '꽃의 이미지' 발매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인기를 얻어가던 쇼와시대의 톱 아이돌, 오카타 유키코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3. 사망[편집]
자세한 내용은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후일담[편집]
사건 직후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기자회견을 열었고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이다.
인터뷰에서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이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 왔던 연심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아이자와 사장의 사무실 벽에는 유키코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있었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유키코의 사진이 붙어져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라며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링크]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유키코와 생전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 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식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 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후에 회상하였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떠도는 얘기들을 참고하면 유키코는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86년 3월 직후부터 적어도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으로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고 아직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가수에서 탤런트로 전향할 생각도 있었다고, 그리고 탤런트로 전향 후에는 일을 조금씩만 하고 싶다고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에 의견을 전달하였지만 유키코의 말을 듣고 당황한 소속사는 지금 한창 잘 나가는데 갑자기 그런 결정을 꺼낸 부분에 대해 상품성이 떨어질 우려로 급한 마음이였는지 드라마, 비디오, 음반 등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를 보이며 이를 통해 유키코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이런 소속사의 무책임한 태도로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결국 소속사 선뮤직 측이 유키코가 자살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현지 팬들은 유키코의 자살의 유력한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31]
사건 직후 요츠야서로 달려온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그 해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연예계를 꿈꿔왔던 1981년 유키코가 중학교 2학년이였던 시절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니콘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합격한 것과 학교 성적이 좋아 선생님들께 예쁨 받았던 것을 주변 친구들이 질투하여 고민하고 있었을 당시에 일어난 것으로 어느 날, 유키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고기 만두 같은 것을 데워 먹으려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나중에 가스 냄새를 알아채고서야 껐다는 유키코 본인의 증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한 후 유키코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자살이 아니고 그냥 죽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죽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유키코가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여긴 어머니는 '혹시 자살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어림짐작했다고 밝혔다.
1988년 7월 1일,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생전 유키코가 썼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岡田有希子 - 愛)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책의 이름은 생전 유키코가 좋아하던 아이돌인 카와이 나오코의 곡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32]
안타깝게도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딸의 사망 5년 뒤인 1991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4월 10일 13시경 도쿄도 나카노구/호센지에서 본장·고별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팬 전용 헌화대가 설치되며, 많은 팬과 연예인을 합쳐 총 7000명이 참석하였다.[33]
같은 날 더 베스트 텐 통상회 엔딩으로 진행되던 기념 사진 촬영을 앞 당긴 뒤 추모 인사를 전하였고 종래의 엔딩곡이 아닌 유키코의 '입술 Network'가 흐르는 가운데, 지난 날 유키코의 인터뷰 장면들이 지나가면서 프로그램의 엔딩 롤이 흐르고 방송이 종료되었다.
4월 12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취소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되었지만 오사카에서 개최 예정이였던 콘서트는 결국 취소되었다.
정규 앨범과 동일한 이름의 사진집 '비너스 탄생'이 4월 4일에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황을 전부 회수되었다. 또한, 잡지 '중일시대'에서는 1986년 4월호부터 오카다가 집필한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지만 이 또한 취소되었다. 음악 정보지 '오리콘 위클리'에서는 4월 28일호를 긴급 추모호로 내기도 하였다. 한편, 유키코의 프로마이드의 판매는 계속 진행되었고, 랭킹 상위 5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프로마이드 판매점 '마르벨도'의 상무인 미츠자와 히로시는 "제2의 아카기 케이이치로[34] 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35]
사후 포니캐년에서 유키코의 라이브 영상이 담긴 DVD 박스를 발매하는데 그녀의 남은 유가족들이 이를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36]
위의 인터뷰를 보면서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사카모토 류이치와 마츠다 세이코라는 유명인들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에 '입술 Network' 라는 곡은 어쩌면 유키코에게 큰 압박감 속에서 오리콘 1위를 달성하고 안심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황스러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얽히는 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정상에 올라, 앞으로 더 높은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면 18살의 나이의 유키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중압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986년(쇼와 61년) 5월 2일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이 해산했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있다. 이후 6월 1일 추모 사진집 '안녕 유키코'가 발매되었다.
데뷔 이전부터 유키코 매니저라는 역할을 맡았고 사망 당시의 모습까지 눈 앞에서 목격했던 미조구치 노부오(溝口伸郎)는 이후 후배 아이돌인 사카이 노리코의 매니저를 담당하였고 2000년(헤이세이 12년) 7월 8일 생전 유키코가 마지막으로 들렸던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실 5층의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앓던 지병을 괴로워하며 목을 매달아 향년 54세로 자살하였다.
2016년 12월 2일에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영상 링크 자살 당시 보도된 방송들과 호리코시 동창생들이 유키코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방송에서 소속사 선뮤직에 보관되어있던 유키코의 자료를 훔쳐간 '리처드'라는 호주 출신 외국인이 나온다. 이 외국인은 유키코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그녀의 사후 반 년 뒤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당시 다니던 죠치 대학교의 학부생이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 아이돌이었던 하야미 유와 친해져 1989년 선뮤직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마츠다 세이코의 미국 진출에 관련해서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나 1991년 우연히 유키코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던 다른 직원들이 "쓸 일 없으니 창고에 넣어두라."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격분한 나머지 회사가 보관한 유키코의 굿즈를 몰래 훔쳐 달아남과 함께 퇴사했다. 30년 만에 공개된 굿즈는 총 194점이며, 데뷔 초기의 생사진과 브로마이드,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 광고 필름과 레코드의 오픈릴, 육성이 담긴 미공개 영상 등이었고 모두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기일인 4월 8일 정오 12시에는 매년 신주쿠구의 요츠야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소 앞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열고 있으며,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40] 에 잠든 유키코의 묘에도 37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단 한 번도 마를 날이 없이 꾸준히 장식된다고 한다. 당시 중고등학생이나 20대였을 팬들은 4-50대 중장년이나 60대 중후반[41] 이 되었고 당시 삼촌팬이었던 이들은 노인이 되었는데[42] 사진 속의 유키코는 10대 후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참 짠하다.
데뷔 동기이자 같은 시기 아이돌로 활동했던 타나카 쿠미는 생전 유키코와 특히 사이가 좋았었는데, 그녀가 2012년부터 수년 간 방송했던 후쿠오카의 로컬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회 반드시 유키코의 곡을 틀었다. 그 계기는 유키코의 27주기였던 2012년 4월 8일, 추모 현장인 요츠야의 추모 이벤트에 참석해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팬들이 유키코를 그리워하며 묵념하는 것을 보며 "유키코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송은 전 세계의 웹에서도 들을 수 있어, 해외에 거주하는 열성적인 팬들에게도 유키코에 대한 사연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2016년 4월부터 시작한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인 토카이 라디오에서 생전 유키코가 진행을 맡았던 '도키도키 라디오(ドキドキラジオ)'라는 방송명을 본따 'ドットーレ山口의 도키도키 라디오 84(ドットーレ山口ドキドキラジオ'84)'라는 트리뷰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생전 유키코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쿄의 포니캐년 사내와 나고야의 토카이 라디오 회장에서 '오카다 유키코 팬미팅'을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이 응모하여 참석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매우 좋았는지 2019년까지도 열린다. 해당 기획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던 의사이자 진행자 야마구치 사토루(47)가 시작한 것으로,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50주년 생일인 8월에 열었던 이벤트가 대반향을 일으켜 유키코의 생전 첫 팬미팅 날짜에 근 30년 만에 재차 팬미팅이 열렸다. 이벤트는 당시의 굿즈와 포스터, 미발표 사진 감상과 관계자들의 토크쇼와 가라오케 대회 등으로 차려졌다.
3.2. 미디어에서의 취급[편집]
투신 현장을 지켜봤던 기자들은 당시 상황에서 수습이 아닌 유키코의 시신 사진을 촬영하여 모자이크 처리 과정 없이 흑백으로 그대로 잡지에 싣고 아스팔트에 피와 뇌수[43] 가 흥건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행위 등의 비도덕적인 미디어의 보도 태도[44] 는 대중들에게 매우 지탄을 받아왔다. 이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갔다라는 말과 가져서가 살점을 먹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다. 그렇게 4월 9일 닛폰 테레비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고별식이 방송되기도 하였다.
평소 유키코를 귀여워하던 선배인 나카모리 아키나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의 심야 라이브 무대 영상[45] 에 유키코의 유령이 찍혔다는 소문과 유키코의 시신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가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있다. 2002년 12월 1일, 우리나라에서도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하였으며 여기서는 '진실'로 밝혔다. 이 때문에 진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당연히 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다. 사진기자는 그 당시 죽지 않았으며, 유령의 경우 실제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46] 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47] 한 마디로 저런 소문을 유키코가 듣는다면 당연히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라는 것.
유키코의 투신 사건과 더불어 일명 윳코 신드롬(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는 베르테르 효과가 발생하게 되면서 일본 전역에 다시 한번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번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해당 사태를 심각하게 취급하였고 결과적으로 유키코에 관련된 어떠한 것도 자제하고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발매되지 못했던 싱글 꽃의 이미지도 서명 운동[48] 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1999년이 되어서야 시판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 방송계에서 오카다 유키코에 관해서는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였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하게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했고 그 여파도 컸으나 끝없이 재조명되었던 오자키 유타카, ZARD, hide 등과는 대조적인데, 이들과 달리 유키코의 경우엔 마지막 모습이 미디어까지 노출되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49] ,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키코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