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r4판)

편집일시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의 배우에 대한 내용은 오카다 유키코(배우) 문서
오카다 유키코(배우)번 문단을
오카다 유키코(배우)#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Yukiko logo (1984).png
[ SINGLE ]
파일:[1984.04.21] First Date (ファースト・デイト) (VBR).jpg
파일:リトル プリンセス.png
파일:dreaminggirl.png
파일:546712506_pic1_full.jpg

싱글 1집

1984. 04. 21

싱글 2집

1984. 07. 18

싱글 3집

1984. 09. 21

싱글 4집

1985. 01. 16
파일:Summer beach-앨범커버.jpg
파일:슬픈예감.png
파일:lovefair.png
파일:R-3915488-1537621959-8197.jpg

싱글 5집

1985. 04. 17

싱글 6집

1985. 07. 17

싱글 7집

1985. 10. 05

싱글 8집

1986. 01. 29
파일:꽃의이미지.webp
파일:ab67616d0000b2731e01bf1f421885d6e8c25dce.jpg

싱글 9집

1986. 05. 14

싱글 10집

2002. 12. 04
[ ALBUM ]
파일:신데렐라-앨범커버.jpg
파일:FAIRY-앨범커버.jpg
파일:시월의인어.jpg
파일:qlsjtmxkstod.webp

정규 1집

1984. 09. 05

정규 2집

1985. 03. 21

정규 3집

1985. 09. 18

정규 4집

1986. 03. 21
[ OTHER ]
파일:贈りものI.jpg
파일:235352!.webp
파일:220039821.jpg
파일:intgzomeimsx_200200000079_001_0_1.jpg

베스트 1집

1984. 11. 28

베스트 2집

1985. 12. 05

베스트 3집

1999. 03. 17

베스트 4집

2002. 05. 15
파일:贈りものIII.png
파일:ザ・プレミアムベスト 岡田有希子.jpg
파일:goldenidolYUKIKO.jpg
파일:1569223802740l0.jpg

베스트 5집

2002.12.18
[[ザ・プレミアムベスト 岡田有希子|{{{#fff ザ・プレミアムベスト
岡田有希子}}}]]

베스트 6집

2012. 11. 21
[[ゴールデン☆アイドル 岡田有希子|{{{#fff ゴールデン☆アイドル
岡田有希子}}}]]

베스트 7집

2014. 07. 30
[[岡田有希子 Mariya's Songbook|{{{#fff 岡田有希子
Mariya's Songbook}}}]]

베스트 8집

2019. 10. 16



오카다 유키코
(( 有希子( | Yukiko Okada
파일:岡田有希子 ヴィーナス誕生.jpg
본명(( 佳代( (사토 카요, Kayo Sato)
애칭윳코 (ユッコ)
출생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사망1986년 4월 8일 (향년 18세)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묘소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1] 57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직업가수, 배우
데뷔1984년 4월 21일 싱글 1집
(데뷔일로부터 14684일, 40주년)
활동 기간1984년 4월 21일~1986년 4월 7일
팬클럽1984년 7월 29일~1986년 5월 2일
서명파일:오카다 유키코 서명.png
링크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펼치기 · 접기 ]

신체155cm, 45kg, O형
가족아버지 사토 카즈히코
어머니 사토 타카코(19??~1991)
언니 사토 치카(1965년생)
학력나고야시립 타카쿠라 소학교 (졸업)
나고야시립 사와카미 중학교 (졸업)
나고야시립 코우요우 고등학교 (전학)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전
2.2. 데뷔 후
3.1. 후일담
3.2. 미디어에서의 취급
4. 음반
4.1. 싱글 음반 목록
4.2. 정규 음반 목록
5. 출연
5.1. 드라마
5.2. 예능
5.3. 라디오
5.4. CM/광고/모델
5.5. 비디오
5.6. DVD
5.7. 포스터
5.8. 기타 활동
6. 수상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아마추어 같이 팔리는 오냥코 클럽의 인기 절정.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와 함께, 프로 아이돌 가수의 시대도 끝났다
時素人売ニャン子クラブ人気絶頂。岡田有希子(死)共、プロアイドル歌手時代終


{{{-2 음악평론가 다카하시 슈
}}}

일본쇼와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2]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 활동 기간은 717일로 다소 짧은 기간이며 현재는 사후의 시간이 오래 지난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변치않고 지금까지 응원하는 당시의 팬 세대와 오늘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새롭게 생겨난 팬 세대까지 존재할 만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3]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파일:o0800102615163342470.jpg

1967년(쇼와 42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제왕절개에 이른 난산으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직후엔 신체 47cm, 2.7kg의 미숙아였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유키코가 2살이 되었을 무렵 일본의 3대 신사 중 하나라 불리는 아츠타 신궁이 있는 나고야시 아츠타구로 이사하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데뷔 준비를 위해 고향을 떠나기 전 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파일:o0704058515163343017.jpg

유소년기 시절, 언어장애까지는 아니었으나 '사()행'을 발음하지 못해 '선생님(센세)'를 "텐테"라고밖에 발음하지 못했다.[4]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언니가 다녔던 YMCA의 체육 교실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운동신경이 부족하다 생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또한 귀가 크게 눈에 띄는 것으로부터 놀림을 받아서 귀를 숨기는 헤어스타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소꿉놀이를 하는 것보다는 도구를 사용하여 제작하는 것이나 조립하는 것을 좋아해서 조부모님이 유키코에게 선물로 갖고싶은 것을 물으면 '목공도구 세트'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파일:o0799102815321470952.jpg

초등학생 시절엔 그림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작품을 표현하는 화가같은 직업을 동경하였다고 한다. 4학년 때는 수채화를, 중학생이 되며 유화와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5] 재능이 있다면 어머니에게 예술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줬다고 한다.

파일:o0298032015163347795.jpg

1974년(쇼와 49년), 연예계 또한 동경하던 유키코는 초등학교 6학년에 연극부에 가입하며 학예회에서 옛날 이야기 우라시마 타로의 오토히메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극은 교장까지 보러올 정도였다고 한다.[6] 이것을 계기로 중학생이 되어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호리프로 탈렌트 캐러반' 등의 오디션에 응모하게 되었다.

1981년(쇼와 56년) 중학교 2학년에는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였는데 준 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7] 그리고 평소 동경하고 팬이었던 여성 아이돌 카와이 나오코초상화를 그려 본인에게 직접 보내려고 하였다.[8]
파일:1981년 니콘 프레쉬 걸 콘테스트 - 오카다 유키코.jpg
1981년(쇼와 56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게재된 광고[9]
그러던 중 1982년(쇼와 57년) 8월, 가수가 되기 위해 닛폰 테레비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11]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때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 학생기록부를 써주지 않겠다."라는 학교 선생님의 반대에 유키코는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나고야 지역 예선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 티켓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뿐만 아니라 유키코의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결사반대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12월에 열린 결승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다. 이에 유키코는 식사도 거르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자 보다 못한 가족들이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하였다.

1. 교내 테스트로 학년 1등급을 딸 것
2. 중부지역 통일모의고사에서 전교 5등 안에 들 것
3. 나고야 시립 코요고등학교에 합격할 것[12]


{{{-2 부모님이 유키코에게 제시했던 3가지 조건.
}}}

위에 상기한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이지만 특히 두 번째는 () 즉 유키코는 엄친딸이었다.[13]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지만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에 전념하였고 놀랍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이듬해 1983년 결승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당시 저명한 여러 개의 소속사의 오퍼를 받았으나 선 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부모님에게 각고의 설득을 한 끝에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오디션 예선과 결승전인 '스타 탄생!'에서 각각 부른 노래가 키타하라 사와코의 'MY BOYFRIEND'와 나카모리 아키나슬로우 모션. 참고로 아래 영상에서 함께 인터뷰하는 사람들 모두 아이돌 데뷔가 결정된 사람들이지만 유키코를 제외하고 모두 인기를 끌지 못했다. (...)

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jpg
1983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1983년(쇼와 58년) 스타 탄생!에 출연한 유키코.

1983년 7월 17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저명한 영능력자이자 성명 판단가[14]인 오키 히로코[15]에게 예명 오카다 하루코(岡田晴子), 오카다 카요코(岡田佳代子), 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라는 3개의 이름들을 후보로 정했으나 '하루코'는 같은 소속사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桑田靖子)와 한자가 비슷하였고 '카요코'는 성격적으로 약한 이름이라 격한 연예계 생활에 버틸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탈락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희망을 가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현재의 예명인 오카다 유키코로 결정되었다. 연예계에서의 목표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는 것이었고 또한 카와이 나오코에 대한 동경도 품고 있었다.

8월 25일, 도쿄로 상경하여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에서 하숙하며 동거인으로 1년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와 같은 '스타 탄생!' 합격자 타키 사토미가 있고 타키와는 룸메이트로 지냈다고 한다. 또한 나고야 코우요우 고등학교에서 9월 1일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편입하였다.

파일:tg001.jpg
오카다 유키코와 타케우치 마리야

12/10
今日初レコーディング!
오늘은 드디어 처음으로 레코딩을 했다!
上 自分!
의외로 올라가지 않아서 자신 스스로도 놀라버렸다!
気負
분명 신경을 제대로 쓰지 않아서인가
But 竹内来
하지만 타케우치 마리야씨가 와 주신 것은
感激
저엉말 감격!!이었다
素敵女性(ナ思
역시 멋진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2 1983년 12월 10일, 오카다 유키코의 일기 中
}}}

레이블 포니 캐년의 프로듀서는 오카다 유키코에 대한 이미지를 6대학 야구(도쿄를 소재지로 한 유서깊은 고교 야구 리그)를 보러 다니는 야마노테(도쿄 15구의 명칭)의 아가씨로 정하고 데뷔곡을 타케우치 마리야에게 의뢰하였고 아이돌 데뷔를 위해 박차를 가했다.


2.2. 데뷔 후 [편집]


1984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1984년 1월 10일, 남성지 잡지사 '스콜라'로부터 첫 취재를 시작으로, 3월 11일 도쿄의 메이지 싱궁 회화관 앞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벤트 '토비라! 팝시티 과자 페어'가 개최되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티 파티 형식의 팬 교류회인 '모여라 유키코 프렌즈'를 나고야를 시작으로 전국 7개의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3월 25일에는 음악 프로그램 TBS의 더 히든 스테이지[16], 4월 14일에는 테레비 도쿄에서 방송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와 TV 아사히에서 방영된 '아이돌 펀치'에서 가수로서 처음으로 여러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カフェゼリー[17]CM

2/18
오늘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스스로는 최선을 다해 일한다고 생각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겐 폐만 끼치는 것 같아..
아~아 내가 싫다
하지만 스스로 머릿속에는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하면
긴장되는 걸
그렇지만 CM은 대단하네~~
라고 다시 생각했다.
시청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것
까지 최선을 다해 시간을 들여
하고 있는 거라구
카페젤리의 젤리의 무너지게 하는 방법이라던가
우유를 얹는 방법이라던가
빛을 받는방법이라던가...
굉장하다라고 생각했다


{{{-2 1984년 2월 18일, 오카다 유키코의 일기 中
}}}

파일:ファースト・デイト image.jpg

4월 21일, 싱글 1집 'ファースト・デイト'로 정식 데뷔하였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줘, 멋진 나라에서 찾아 온 리틀 프린세스
、一緒 ステキ国来リトル・プリンセス


{{{-2 데뷔 당시 캐치프레이즈
}}}

ファースト・デイト 무대

ファースト・デイト 더 베스트 텐 스포트라이트 무대

5월 31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 아이돌로 데뷔한 키쿠치 모모코와 함께 TBS의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 텐의 스포트라이트 코너에 출연하였다.[18] 당시 더 베스트 텐 ファースト・デイト차트 순위에서 21위를 기록하였기에 정식 출연은 아니였고 당시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쿠메 히로시가 유키코의 이름을 '오카다 키코'로 착각하여 부르며 곡명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실수했던 일화가 존재한다.

이후 10월 15일, 닛폰 테레비의 음악 프로그램인 더 톱텐에서는 8위, 10월 18일에는 더 베스트 텐에서는 10위를 달성해 드디어 정식 출연에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 26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 신인상까지 수상하였다. 줄곧 사무소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고 언론에서 칭했지만 정작 유키코 본인은 역시 자신은 자신일 뿐이니까, 마츠다 세이코를 따라하고 싶지 않다.라고 얘기하였으며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오카다 유키코라는 답변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프로듀서 등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リトル プリンセス 무대

リトル プリンセス 제10회 일본 TV 음악제(예선)

リトル プリンセス 제10회 일본 TV 음악제(본선)

1984년(쇼와 59년) 8월 23일, 9월 6일 제10회 일본 TV 음악제가 개최되어 リトル プリンセス[19]를 예선으로 통과하였고, 본선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Dreaming Girl 恋、 무대

유키코의 귀엽고 청순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데뷔 초부터 똑똑하고 총명한 면모도 돋보였는데 음반 영업소에 인사차 그녀를 데리고 갔을 때에, "애인이 있으신 분들은 1/3을, 사모님이 계신 분은 1/4이면 되니까 자신에게 애정을 주세요."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린 소녀가 영업직 앞에서 귀여우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파일:1985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jpg
1985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1).jpg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2).jpg
파일:1985년 고향 나고야에 방문한 오카다 유키코(3).jpg
1985년 나고야에 놀러간 유키코[20]

二人セレモニー 무대

二人セレモニー 무대

둘만의 세리머니 발매 당시와 5개월 후의 무대를 비교해 보면 발성이 조금 바뀌었다. 이전보다 더욱 어른스러워졌고 곡에 대한 해석 또한 늘어났고 가창력이 더욱 늘어나는 유키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Summer Beach 무대

哀予感 무대

당시 아이돌이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은 사소한 일이였는데 예를 들어 마츠다 세이코는 '붉은 스위트 피'로, 기존 세이코짱 컷에서 숏컷 헤어스타일로 바꾸게 되며 난리가 났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부릿코' 노선에서 벗어나 여성 팬들이 생겨났고 코이즈미 쿄코의 경우에도 당시 사무소에 말하지 않고 멋대로 머리를 자른 뒤 발매한 5번째 싱글 '새빨간 여자아이'의 이미지와 어울려 성공하였다. 아마 유키코도 그런 선배들의 성공 사례를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1984년 여름부터, 숏컷을 하고 싶은 생각을 비췄으나 선뮤직에서는 기존의 '오카다 유키코의 이미지가 있다'고 계속 반대된 것 같다. 그러나 이후 5번째 싱글 'Summer Beach'를 발매하던 시기에 '여름 곡이고, 숏컷도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허락하게 되었고 이 곡의 발매는 4월 17일. 그 한발 앞서, 투어를 통해 팬들에게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유키코의 숏컷 헤어스타일 변화는 기존 팬덤 내 이탈을 발생시키는 등 득보단 실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숏컷이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목덜미가 짧고, 앞머리를 시치조에게 세우고 꽤 보이쉬하게 바뀌었다. 예전의 세이코나 쿄코의 소프트한 숏컷에 비해 다소 공격적이었고 눈썹 메이크업도 눈썹 끝이 올려져 전체적으로 80년대 활발한 여성상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부드러운 신데렐라 컨셉 노선에서 대담한 이미지 변신이었던 것이다.

파일:Okada_Yukiko_hair.jpg
1985년 가을호 헤어 카탈로그


유키코짱 숏컷한 지 상당히 지났는데 이득을 본 적 있어?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 이득을 본 적? 옷이 어울리게 된 것일까, 어른스러운 옷이나 어린아이스러운 올마이티한 것이다.
블로우나 세트 보다도 편해?
아침, 시간이 있을 때 드라이기와 빗을 써서 시험해 보네요. 하지만 시간이 없으면 그대로 무스 발라서 내츄럴한 헤어에요.
그렇구나 ~ 정수리와 정면이 기니까 바리에이션도 즐길 수 있네
그렇죠. 가끔식은 고데기를 사용해 컬을 넣어보거나 합니다.
블로우 방법의 하나로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는 거네.
그렇지, 헤어・카타 여름호 때 뒤에서 이마의 쪽까지 머리가 내려오는 느낌의 블로우로 했었죠! 그것만으로도 얼굴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려서 놀라버렸어! (웃음)
앞으로도 계속 숏컷으로 갈 거네?
으~음 조금 고민하고 있어 또 길러볼까 라며 역시 긴 편이 여자아이 같고 좋을지도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게다가 겨울에는 시려워서 추운 기분이 드니까 (웃음)
목덜미가? 그럴 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어중간한 시기도 있겠죠 정리되지 않을 시기가 거기에 견딜 수 있는 자신이 없으니까 기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오리지널 비디오 Yukiko in 스위스 (포니) 발매도 했죠.
9월 21일에는 LP 시월의 인어(캐넌)에서 나옵니다 ~ 가을에는 드라마 출연도 결정되었고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역할에 직책이 있는 여자아이 같은 역할이기에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웃음)
좀처럼 여배우 업계에서도 꿰뚫고 있네요. 관심! 관심!
역시, 여러 헤어스타일에도 도전해 보고 싶네, 물론 자신에 어울리는 범위 한해서 하지만 종류가 없으니까~
역시, 마음에 드는 숏컷을 소중히 해 갈 것 같네
이것저것 헤메이다 결국에는 이거니까 싫어져 (웃음)


{{{-2 잡지사 헤어 카탈로그 1985년 가을호 오카다 유키코 인터뷰 中
}}}

Love Fair 무대

언제나 근면성실한 타입으로 남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된 연예인 생활 동안,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라고 해서 다이어트에 대한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콘텍트 렌즈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21] 또한 무리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어가던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고 결국 1985년(쇼와 60년) 12월,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瞳ダイアモンド 커버 무대

커버 무대

노래 커버 프로그램에서 소속사 선배 마츠다 세이코눈동자는 다이아몬드카와이 나오코의 열렬한 팬이였던 유키코가 을 부르기도 하였다.

파일:1986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파일:1986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2.jpg
1986년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 회지


1986년 1월 1일부터 6일까지 홍콩&마카오에서 사진 촬영, 1월 2일 '올스타 첫 꿈 대합전'의 연재 소설 '멜로디 라인은 꿈속'의 집필이 시작되었고 1월 8일부터 시작된 '비너스 탄생' 레코딩이 28일 종료되었다.

Network 무대[22]

1986년(쇼와 61년) 1월 29일, 8번째 싱글 Network를 발매하였다. 당시 작사는 소속사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23]가 맡았고 작곡, 편곡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게 되며 상당히 호화로운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출산 이후 연예계 활동을 쉬고 있던 세이코가 처음으로 다른 가수에게 작사를 해줬다는 점으로 발매하기 전부터 여러 기사에서 오르는 등 화제가 되었다.[24] 당시 싱글 판매량이 23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유키코의 최고 히트곡으로 자리 매김하였고, 2월 10일 오리콘 데일리 차트 1위로 첫 등장하였다.

3월 3일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나카노 선플라자 홀에서 열린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친구인 타나카 쿠미와 손을 잡고 취재를 받았다.

파일:오카다 유키코 1986.3.6 사인.jpg
"졸업 ・・・ 이번 봄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회인으로서 힘낼게요! 잘부탁해요"


{{{-2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기념 사인
}}}

수업 중에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추억으로 남아 있네요.
앞으로는, 자유로운 시간이 늘어난 만큼, 건강을 위해서라도 스포츠라도 할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식 인터뷰 中
}}}

코사카 아키코의 커버 무대 영상

1986년 3월로 추정되며, 1973년 발매된 코사카 아키코의 ''[25] 커버 무대로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스위스의 알프스 소녀가 되었다는 설정이다.[26]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1.jpg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2.jpg

파일:오카다 유키코 졸업사진 3.jpg

첫 번째 사진에서는 좌측의 네 번째, 두 번째 사진과 세 번째 사진에서의 가운데가 유키코 본인이며 그녀가 속한 반에는 미나미노 요코, 혼다 미나코[27], 나가야마 요코[28], 이시노 요코, 타나카 쿠미 등 이미 아이돌로 데뷔한 학우들이 많았다. 유키코의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와 데뷔 동기인 오기노메 요코와 직속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도 유키코와 같은 고교 동문 출신이다.

TBS 테레비의 연속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29]'에서 주연으로 등장, 1월에 발매한 싱글 '입술 Network'의 오리콘 차트 1위 달성, 4월 5일부터 개최되고 있었던 전국 콘서트, 4월 10일부터 테레비 아사히의 드라마 가출소녀[30] 촬영 일정과 싱글 '꽃의 이미지' 발매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인기를 얻어가던 쇼와시대의 톱 아이돌, 오카타 유키코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3. 사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후일담[편집]


사건 직후 선뮤직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기자회견을 열었고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이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저를 기다리던 유키코가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하여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 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스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이 괴롭다고 극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키코는 미네기시 씨에게 연심을 품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했습니다.


{{{-2 기자회견에서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인터뷰 中
}}}

인터뷰에서 아이자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이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 왔던 연심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아이자와 사장의 사무실 벽에는 유키코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있었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유키코의 사진이 붙어져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라며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링크]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유키코와 생전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 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식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 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후에 회상하였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떠도는 얘기들을 참고하면 유키코는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86년 3월 직후부터 적어도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으로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고 아직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가수에서 탤런트로 전향할 생각도 있었다고, 그리고 탤런트로 전향 후에는 일을 조금씩만 하고 싶다고 소속사 선 뮤직 프로덕션에 의견을 전달하였지만 유키코의 말을 듣고 당황한 소속사는 지금 한창 잘 나가는데 갑자기 그런 결정을 꺼낸 부분에 대해 상품성이 떨어질 우려로 급한 마음이였는지 드라마, 비디오, 음반 등 스케줄을 잇달아 많이 잡는 행보를 보이며 이를 통해 유키코는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이런 소속사의 무책임한 태도로 단지 상품으로만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결국 소속사 선뮤직 측이 유키코가 자살에 이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현지 팬들은 유키코의 자살의 유력한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31]

사건 직후 요츠야서로 달려온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그 해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카요와 대면한 것은 요츠야서였습니다.
카요의 얼굴은 전부 포대에 둥글둥글 휘감겨 씌워져 있었습니다.
단, 입가는 붕대에 감겨있지 않아서 그 입가를 보고 저는 바로 카요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건 어릴 적부터 계속 보아온 카요의 잠든 입가 그대로였습니다.
조금은 오므라든 듯한, 부끄러운 듯한.
'카요'라고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항상 밝았던 그 목소리로 "뭐야? 엄마"라고 대답해줄 것 같은.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물론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습니다.


{{{-2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유키코 어머니의 인터뷰 中
}}}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연예계를 꿈꿔왔던 1981년 유키코가 중학교 2학년이였던 시절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니콘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합격한 것과 학교 성적이 좋아 선생님들께 예쁨 받았던 것을 주변 친구들이 질투하여 고민하고 있었을 당시에 일어난 것으로 어느 날, 유키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고기 만두 같은 것을 데워 먹으려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나중에 가스 냄새를 알아채고서야 껐다는 유키코 본인의 증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한 후 유키코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자살이 아니고 그냥 죽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죽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유키코가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여긴 어머니는 '혹시 자살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어림짐작했다고 밝혔다.

1988년 7월 1일,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생전 유키코가 썼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岡田有希子 - 愛)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책의 이름은 생전 유키코가 좋아하던 아이돌인 카와이 나오코의 곡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32]

안타깝게도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는 딸의 사망 5년 뒤인 1991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4월 10일 13시경 도쿄도 나카노구/호센지에서 본장·고별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팬 전용 헌화대가 설치되며, 많은 팬과 연예인을 합쳐 총 7000명이 참석하였다.[33]

이제 여러분은 알고 계시겠지만요.
더 베스트 텐에 몇 번이고 나와 주신 오카다 유키코씨가 돌아가셨어요.
18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이가 좋았던 가수인 아키나짱이나 미나미노 요코짱
그 외 여러 가수분들이 정말 슬픔을 참고 불러주셨어요.
18살의 오카다 유키코씨에게 그 고민을 우리가 알아주지 못해서 .. 정말 미안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TV에 나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팬 여러분 그리고 가족 여러분에게 이 슬픔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항상 밝고 정말 든든한 유키코씨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 아름답고 건강한 미소를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활기차던 때의 유키코씨의 모습을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보고, 여러분과 함께 명복을 빕니다.
유키코씨의 그 밝은 미소와 아름다운 얼굴이 영원히 여러분의 마음에 남기를 기원합니다.
유키코씨 정말 고마웠습니다.


{{{-2 더 베스트 텐 MC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추모 인사 中
}}}

같은 날 더 베스트 텐 통상회 엔딩으로 진행되던 기념 사진 촬영을 앞 당긴 뒤 추모 인사를 전하였고 종래의 엔딩곡이 아닌 유키코의 '입술 Network'가 흐르는 가운데, 지난 날 유키코의 인터뷰 장면들이 지나가면서 프로그램의 엔딩 롤이 흐르고 방송이 종료되었다.

4월 12일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취소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되었지만 오사카에서 개최 예정이였던 콘서트는 결국 취소되었다.

정규 앨범과 동일한 이름의 사진집 '비너스 탄생'이 4월 4일에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황을 전부 회수되었다. 또한, 잡지 '중일시대'에서는 1986년 4월호부터 오카다가 집필한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지만 이 또한 취소되었다. 음악 정보지 '오리콘 위클리'에서는 4월 28일호를 긴급 추모호로 내기도 하였다. 한편, 유키코의 프로마이드의 판매는 계속 진행되었고, 랭킹 상위 5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프로마이드 판매점 '마르벨도'의 상무인 미츠자와 히로시는 "제2의 아카기 케이이치로[34]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35]

사후 포니캐년에서 유키코의 라이브 영상이 담긴 DVD 박스를 발매하는데 그녀의 남은 유가족들이 이를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36]

업투보이 1986년 5월호의 오카다 유키코 인터뷰

언제나 스스로도 1등 상을 원한다는 의식은 딱히 없었으니까요.
앗, 이런 거 말하면 안 돼. 그게 아니라,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놀랐다고 할까요.
이번 경우는 특별하기도 했을 겁니다. 세이코 씨와 사카모토 류이치 씨가 참가해 주었다든가, 대단했으니까요.
이미 내놓는다고 정해진 시점에서 신문 등에도 크게 실리거나
− 뭔가 화제가 많았는데요. 그만큼 부담도 있었겠죠.
네, 그러니까 1등 상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라기보다는, 좋았어! 라는 느낌. 솔직히 남의 일 같은 곳이 있었다.
− 그렇지만, 일단 1등 상을 얻으면, 또! 라는 기분이 들지 않아요?
음~ 글쎄요, 처음부터 이런 건 이번 한정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으니까요.
− 그래도, 너무 약하진 않아요.
약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건, 잘 알고 있어요. 나는 아직 그만큼의 가수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이 계기로, 좀 더 어른들에게도 흥미를 가져주시면 좋을 텐데요.


{{{-2 잡지사 업투보이 1986년 5월호[37] 오카다 유키코 인터뷰 中
}}}

위의 인터뷰를 보면서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사카모토 류이치마츠다 세이코라는 유명인들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에 '입술 Network' 라는 곡은 어쩌면 유키코에게 큰 압박감 속에서 오리콘 1위를 달성하고 안심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황스러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얽히는 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정상에 올라, 앞으로 더 높은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면 18살의 나이의 유키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중압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싱글 판매 호조에 한정하면 훨씬 더 잘 나갔던 사람은 몇 명이나 있다. 그러나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고 여겨졌을 데뷔 3년 째에 사라져버린 가수는 전무후무하다.[38] 팬에게 꿈을 안겨주고 순수하게 아이돌을 응원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아이돌이 아이돌로서 존재하는 고난과 고통도 던져주었으며 없어지고 나서 더욱 더 존재가 커진 존재이다.


{{{-2 데뷔 때부터 유키코의 작곡을 담당했던 타케우치 마리야의 인터뷰 中[39]
}}}

1986년(쇼와 61년) 5월 2일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이 해산했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있다. 이후 6월 1일 추모 사진집 '안녕 유키코'가 발매되었다.

반짝반짝한 눈을 빛내며 인사하는 유키코를 보며 이 아이는 되겠구나, 하고 저는 직감했습니다. 긴 시간 매니저를 하고 있으면 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스타가 될 지 아닐 지를. 그녀의 눈은 제가 담당했던 적이 있는 마츠다 세이코의 반짝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다른 아이들의 5배 이상을 노력하며 열심히 해왔습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이코처럼 무리를 하지 않고도 그 자질이 빛나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빛을 내는 타입이며 세이코가 천재형이라고 하면, 유키코는 노력형이라고 하는 편이 좋았을 지 모릅니다. 유키코는 지는 걸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집중력은 놀랄 만큼 굉장했습니다.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하면 그것에 몰두해 몇 번을 불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아이였기 때문에 매니저인 저로써는 전혀 관리할 필요가 없는 편한 아이였습니다.

파일:1983년 오카다 유키코 사진 모음1.jpg
여러분에게 사랑받은 오카다 유키코는 먼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여러분에겐 정말 면목이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고 싶은 기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카다 유키코는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 덕에 아주 행복한 연예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응원 덕에 마침내 여기까지 와 준 오카다 유키코는 이제부터 여러분과 함께 걸음을 같이 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후 오카다 유키코의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주신 마음이 정말로 따스해지는 응원은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의 응원이 오카다 유키코를 향한 더할 나위 없는 공양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카다 유키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갈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2년 간의 응원,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치프 매니저 미조구치 노부오.


{{{-2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 中
}}}

데뷔 이전부터 유키코 매니저라는 역할을 맡았고 사망 당시의 모습까지 눈 앞에서 목격했던 미조구치 노부오(溝口伸郎)는 이후 후배 아이돌인 사카이 노리코의 매니저를 담당하였고 2000년(헤이세이 12년) 7월 8일 생전 유키코가 마지막으로 들렸던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실 5층의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앓던 지병을 괴로워하며 목을 매달아 향년 54세로 자살하였다.

2016년 12월 2일에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영상 링크 자살 당시 보도된 방송들과 호리코시 동창생들이 유키코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방송에서 소속사 선뮤직에 보관되어있던 유키코의 자료를 훔쳐간 '리처드'라는 호주 출신 외국인이 나온다. 이 외국인은 유키코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그녀의 사후 반 년 뒤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당시 다니던 죠치 대학교의 학부생이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 아이돌이었던 하야미 유와 친해져 1989년 선뮤직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마츠다 세이코미국 진출에 관련해서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나 1991년 우연히 유키코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던 다른 직원들이 "쓸 일 없으니 창고에 넣어두라."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격분한 나머지 회사가 보관한 유키코의 굿즈를 몰래 훔쳐 달아남과 함께 퇴사했다. 30년 만에 공개된 굿즈는 총 194점이며, 데뷔 초기의 생사진과 브로마이드,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 광고 필름과 레코드의 오픈릴, 육성이 담긴 미공개 영상 등이었고 모두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유키코가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사랑받는 이유는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았고 노화할 일도 없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영원한 18세이기 때문이다.'


{{{-2 동세대 아이돌이자 절친한 동창생이었던 미나미노 요코의 인터뷰 中
}}}

기일인 4월 8일 정오 12시에는 매년 신주쿠구의 요츠야 선 뮤직 프로덕션 사무소 앞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열고 있으며,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40]에 잠든 유키코의 묘에도 37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단 한 번도 마를 날이 없이 꾸준히 장식된다고 한다. 당시 중고등학생이나 20대였을 팬들은 4-50대 중장년이나 60대 중후반[41]이 되었고 당시 삼촌팬이었던 이들은 노인이 되었는데[42] 사진 속의 유키코는 10대 후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참 짠하다.

데뷔 동기이자 같은 시기 아이돌로 활동했던 타나카 쿠미는 생전 유키코와 특히 사이가 좋았었는데, 그녀가 2012년부터 수년 간 방송했던 후쿠오카의 로컬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회 반드시 유키코의 곡을 틀었다. 그 계기는 유키코의 27주기였던 2012년 4월 8일, 추모 현장인 요츠야의 추모 이벤트에 참석해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팬들이 유키코를 그리워하며 묵념하는 것을 보며 "유키코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송은 전 세계의 웹에서도 들을 수 있어, 해외에 거주하는 열성적인 팬들에게도 유키코에 대한 사연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2019년(헤이세이 31년) 1월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묘소 조만지(成満寺)에서의 성묘 영상.

파일:yukiko0.jpg
2016년(헤이세이 28년) 30여 년만에 열린 팬미팅 현장.
2016년 4월부터 시작한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인 토카이 라디오에서 생전 유키코가 진행을 맡았던 '도키도키 라디오(ドキドキラジオ)'라는 방송명을 본따 'ドットーレ山口의 도키도키 라디오 84(ドットーレ山口ドキドキラジオ'84)'라는 트리뷰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생전 유키코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쿄포니캐년 사내와 나고야의 토카이 라디오 회장에서 '오카다 유키코 팬미팅'을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이 응모하여 참석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매우 좋았는지 2019년까지도 열린다. 해당 기획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던 의사이자 진행자 야마구치 사토루(47)가 시작한 것으로,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50주년 생일인 8월에 열었던 이벤트가 대반향을 일으켜 유키코의 생전 첫 팬미팅 날짜에 근 30년 만에 재차 팬미팅이 열렸다. 이벤트는 당시의 굿즈와 포스터, 미발표 사진 감상과 관계자들의 토크쇼와 가라오케 대회 등으로 차려졌다.
파일:photo_170408.jpg
2017년(헤이세이 29년) 4월 8일 도쿄도 신주쿠구 요츠야 교차로에서 열린 사망 31주기 추모 현장.

파일:external/s29.postimg.org/img_0_m.jpg
休 油絵描・・・
만약 긴 휴가를 받는다면 유화를 그리고 싶어요・・・
ファーストビデオ行 スイス山々
첫 비디오를 찍을 때 갔던 스위스의 산등성이를
白キャンバス描・・・
새하얀 캔버스에 그리고 싶어요・・・
幼頃 画家私。
어릴 적 어떻게든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나.
素顔私戻 キャンバス色時
지금 보통의 나로 돌아가 캔버스에 색을 입히면서
安覚。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낀답니다.


{{{-2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조만지(成満寺)에 위치한 오카다 유키코의 묘비에 적힌 직필로 쓰인 기념비 中
}}}

3.2. 미디어에서의 취급[편집]


투신 현장을 지켜봤던 기자들은 당시 상황에서 수습이 아닌 유키코의 시신 사진을 촬영하여 모자이크 처리 과정 없이 흑백으로 그대로 잡지에 싣고 아스팔트에 피와 뇌수[43]가 흥건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행위 등의 비도덕적인 미디어의 보도 태도[44]는 대중들에게 매우 지탄을 받아왔다. 이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갔다라는 말과 가져서가 살점을 먹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다. 그렇게 4월 9일 닛폰 테레비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고별식이 방송되기도 하였다.

1986년 5월 28일 나카모리 아키나의 집시퀸 무대

평소 유키코를 귀여워하던 선배인 나카모리 아키나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의 심야 라이브 무대 영상[45]에 유키코의 유령이 찍혔다는 소문과 유키코의 시신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가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있다. 2002년 12월 1일, 우리나라에서도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하였으며 여기서는 '진실'로 밝혔다. 이 때문에 진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당연히 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다. 사진기자는 그 당시 죽지 않았으며, 유령의 경우 실제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46]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47] 한 마디로 저런 소문을 유키코가 듣는다면 당연히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라는 것.

유키코의 투신 사건과 더불어 일명 윳코 신드롬(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는 베르테르 효과가 발생하게 되면서 일본 전역에 다시 한번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번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해당 사태를 심각하게 취급하였고 결과적으로 유키코에 관련된 어떠한 것도 자제하고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발매되지 못했던 싱글 꽃의 이미지도 서명 운동[48]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1999년이 되어서야 시판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 방송계에서 오카다 유키코에 관해서는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였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하게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했고 그 여파도 컸으나 끝없이 재조명되었던 오자키 유타카, ZARD, hide 등과는 대조적인데, 이들과 달리 유키코의 경우엔 마지막 모습이 미디어까지 노출되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49],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키코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4. 음반[편집]



4.1. 싱글 음반 목록[편집]


파일:[1984.04.21] First Date (ファースト・デイト) (VBR).jpg
ファースト・デイト
20위(105,330장)
데뷔 싱글
||

파일:リトル プリンセス.png
リトル プリンセス
14위(93,970장)
-
||

파일:dreaminggirl.png
恋、
7위(128,830장)
글리코 세실 초콜릿 cm송
||

二人セレモニー
4위(146,850장)
도시바 Let's Chat cm송
||

파일:Summer beach-앨범커버.jpg
Summer Beach
5위(136,350장)
글리코 카페제리 cm송
||

파일:슬픈예감.png
哀予感
7위(88,580장)
-
||

파일:Love Fair.jpg
Love Fair
5위(120,020장)
글리코 세실 초콜릿 cm송
||

Network
1위(231,450장)
'가네보 화장품 86봄'의
이미지송
||

파일:꽃의이미지.webp
花イマージュ
-
발매 중지
||

파일:ab67616d0000b2731e01bf1f421885d6e8c25dce.jpg
Believe In You
63위(2,630장)
기존에 발표됐던 곡을 리믹스하여 재발매
||

4.2. 정규 음반 목록[편집]


파일:シンデレラ (1984).jpg
シンデレラ
7위
CD는 12월 21일 발매
||

파일:FAIRY.jpg
FAIRY
2위
-
||

十月人魚
4위
-
||

파일:qlsjtmxkstod.webp
ヴィーナス誕生
5위
-
||


4.3. 베스트 앨범[편집]


오카다 유키코/베스트 앨범 문서 참조.


5. 출연[편집]



5.1. 드라마[편집]


년도방송사제목배역방영 횟수비고
1983년NHK 나고야 방송국중학생 일기
(中学生日記)
엑스트라-정식 데뷔 전
파일:테레비 도쿄 로고(1981-1985).png양양 노래 스튜디오
(ヤンヤン歌スタジオ)
-5분 프레임 드라마매치의 청춘 가사 아이(아웃로우) PART2
1984년매치의 청춘 스크램블 PART1 - PART2
1985년파일:NHK 로고.svg사나다 태평기
(真田太平記)
조연45부작17화, 19화, 23화, 24화, 28화 출연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1957-1986).svg카구야 공주 날아서 첫 경험!?
(姫・初体験!?)
실즈 별의 소녀 밀 역단발 드라마'월요일 드라마 랜드'에서 방송된 단발 드라마
파일:TBS 테레비 로고(1961~1991).png금지된 마리코
(禁マリコ)
스기우라 마리코 역12부작연속 드라마 첫 주연 작품


5.2. 예능[편집]


년도방송사제목비고
1983년파일:테레비 도쿄 로고(1981-1985).png양양 노래 스튜디오
(ヤンヤン歌スタジオ)
86년까지 출연.
1984년파일:닛폰 테레비 일문 로고(1953-2003).svg까크라킨 대방송!!
(カックラキン大放送!!)
86년까지 출연.


5.3. 라디오[편집]


년도방송사제목비고
1983년닛폰 테레비Tobidase! Pop City1983년 10월 16일 - 1984년 3월 25일
MBS 라디오사토미・히토미・유키코의 뭔가 좋은 일이 없어.
(サトミ・ヒトミ・ユキコ何仔猫)
1983년 10월 16일 - 1984년 3월 9일
1984년문화방송백만명의 영어
(百万人英語)
1984년 2월 9일
도카이 라디오나미코·유키코·코오사토의 두근두근 라디오
(奈美子・有希子・小緒里ドキドキラジオ)
1984년 4월 9일 - 1985년 10월 7일


5.4. CM/광고/모델[편집]


기업명브랜드품목BGM
1984년
협동 유업글리코카페 젤리ファースト・デイト
도시바파소피아PASOPIA IQ MSX[50]Believe In You
에자키 글리코 주식회사세실초콜릿-Dreaming Girl- 恋、
1985년
도시바Let's Chat헤어케어 제품二人セレモニー
일본우편우체국전자우편
도시바퍼스널퍼스널 TV U·30二人セレモニー

5.5. 비디오[편집]


년도제목비고
1985년Yukiko in SWISS
Memories of Switzerland


5.6. DVD[편집]


년도제목비고
2002년Memories in Swiss기존에 발매한 비디오 두 장을 DVD로 발매

5.7. 포스터[편집]


기관비고
칸다 경찰서
(神田警察署)
연말 연시 방범 홍보
방위청
(防衛省)
자위관 모집 3등 육위의 여자 제복 차림으로 3대의 젊은 자위관 6명에게 안고 있는 도안[51]
소방청
(消防庁)
화재 예방 운동


5.8. 기타 활동[편집]




6. 수상[편집]


수상년도시상식수상 부문작품
1984년일본 유선 대상
(日本有線大賞)
상반기 유선 신인상
(上半期 有線新人賞)
ファースト・デイト[52]
제3회 메갈로폴리스 가요제
(第3回メガロポリス歌謡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ダイアモンド賞)
リトル プリンセス[53]
제10회 일본 TV 음악제
(第10回日本テレビ音楽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ABC 영 가요 대상
(ABCヤング歌謡大賞)
84 신인 그랑프리
(84 新人グランプリ)
-Dreaming Girl- 恋、[54]
제14회 긴자 음악 축제
(第14回銀座音楽祭)
그랑프리
(グランプリ)
제17회 신주쿠 음악제
(第17回新宿音楽祭)
금상
(金賞)
제11회 요코하마 음악제
(第11回横浜音楽祭)
신인 특별상
(新人特別賞)
제10회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 가요 음악제
(第10回選全日本歌謡音楽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제15회 일본 가요 대상
(第15回日本歌謡大賞)
우수 방송 음악 신인상
(優秀放送音楽新人賞)
일본 유선 대상 유선
(日本有線大賞)
유선 신인상
(有線新人賞)
전일본 유선 방송 대상
(全日本有線放送大賞)
신인상
(新人賞)
제11회 FNS 가요제
(第11回FNS歌謡祭)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FM 도쿄 리스너스 그랑프리
(FM東京リスナーズグランプリ)
5월 월간 그랑프리
(5月期月間グランプリ)
제26회 일본 레코드 대상
(第26回日本レコード大賞)
최우수 신인상
(最優秀新人賞)
1985년골든 애로우상음악 신인상二人セレモニー[55]
제4회 메갈로폴리스 가요제팝스 부문상Summer Beach
제11회 일본 TV 음악제금의 비둘기상哀予感[56]
제11회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 가요 음악제금상Love Fair
제12회 FNS 가요제우수 가창 음악상


7. 여담[편집]

























8. 관련 문서[편집]



[1] 成満寺[2] 정통파 아이돌 출신인 오카다 유키코가 죽지않고 계속해서 활동 하였다면 일본 정통파 아이돌의 전성기가 더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유키코가 모종의 이유로 빨리 은퇴하지 않는 한 훨씬 많은 명곡들을 남겼을 것이며, 그에 따라 유키코의 영향을 받은 후배 아이돌 또한 많이 생겨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3] 활동 기간이 짧았던 만큼 다른 아이돌과 비교하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데, 이는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4] 어린 아이들이 가장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발음이 /s/ 계열 발음이다. 재밌게도 이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반대로 /m/ 같은 입술소리는 가장 쉽게 발음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언어에서 '엄마'에 해당하는 단어에는 /m/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간다.[5] 추후 데뷔 이후에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며, 거울을 보면서 자화상을 그리며 이러한 의상을 입고 싶다는 방송이 송출된 적이 있다.[6] 당시 초등학교 졸업 작품에서 밝혀지길 장래희망이 성우였다고 하는데, 이 때부터 아마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관심에 갖게 된 것은 아닌가...[7] 이 콘테스트는 입상한 이들이 1982년 잡지에 게재되는가 하면 특대 포스터까지 제작되어 각 지에 붙여질 정도의 대형 콘테스트였다. 부상으로 여행까지 주어진 상이었다.[8] 이는 데뷔 후에 방송에서 공개되었다.[9] 데뷔 전에는 예명이 아닌 '사토 카요'라는 본명을 사용하였다.[10] 스타 탄생! 후반기의 합격자일 뿐 마지막 합격자는 아니다.[11] 모리 마사코를 시작으로, 사쿠라다 준코야마구치 모모에이와사키 히로미핑크레이디코이즈미 쿄코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 최후의 우승자[10]였고, 이후 스타 탄생!은 종영된다.[12]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높은 학군의 학교였다. 그러나 한 학기만 다니고 연예 활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해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학했다.[13]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가 교사라고 한다.[14] 성명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일[15] 마츠다 세이코를 비롯하여 하야미 유, 타무라 에리코 등 선뮤직 소속된 사람을 포함하여 50명 이상에게 예명을 붙여준 인물로 유명하다.[16] 유키코가 처음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였으나 이날 종방하였다.[17] 카페젤리[18] 파일:기쿠치 모모코와 오카다 유키코.jpg[19] 리틀 프린세스[20] 유키코의 어머니와 언니가 함께 등장한다.[21] 대중에 모습을 비치지 않을 때에는 높은 도수의 안경을 착용하고 생활하였다고 한다.[22] 영상 초반에 유키코가 드라마 '가출소녀'와 신곡 '꽃의 이미지'를 기대해달라고 언급한다.[23] 당시 가사의 내용에 대해 세이코는 너무 야하다고라고 생각했지만 유키코가 부르자 귀엽고 윤기 있는 곡이 되었다고 당시 오리콘에서 말했다.[24] 파일:사카모토 류이치, 마츠다 세이코, 오카다 유키코.jpg[25] 유키코의 애창곡 중 하나라고 한다.[26] 강아지 옆에 그대를 찾는 가사로 마지막에 강아지 모형을 든 아저씨가 "날 기다린거야?"라고 하며 나타나자 유키코는 기대와 달리 김 샜다는 듯이 "뭐에요 이건..!"이라며 옆으로 쓰려지는 코미디 장면으로 끝이 난다.[27] 1967~2005. 맨 오른쪽 위의 사진의 인물이다.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이름 뒤에 고의로 온점을 붙였다.[28] 아이돌 시절에는 비너스 등을 번안하여 히트를 쳤으나 대박을 내지는 못 했다. 이후 1993년(헤이세이 5년)에 엔카 가수로 전향하면서 다수의 히트를 내면서 NHK 홍백가합전에도 연속 출전하는 중견 여가수가 되었다.[29] 禁マリコ[30] 家出少女[링크] https://www.bilibili.com/video/BV18T4y1G74u/[31] 실제로 유키코가 데뷔 이후로 방송과 음반 비디오 등에 출연한 것을 보면 실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죽음의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사실에 입각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유키코는 1984년 4월 21일에 가수로 데뷔해 1986년 4월 8일 죽기 직전까지, 고작 2년 밖에 안 되는 사이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77곡의 노래를 발표했고 매우 바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물론 동시대 아이돌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금지된 마리코 이외에도 별 대사는 없었던 단역으로도 출연하며 연기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자살 원인에 대해서 실연이 원인이라는 등 분분하며 다양한 말들이 있지만 메모에는 실연을 줬다는 상대방의 이름은 실제로 없고 단지 소문에 불과하다. 아마도 유키코가 동경했던 연예계의 세상은 유키코 자신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에 몹시도 힘들어했던 것으로 자살한 것이 중론이다. 또한 유키코의 노트에서 발견된 '언제나 아이돌이고 싶다.'는 메모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2] 현재 이 도서는 절판되었으나 일본 아마존닷컴 등지에서는 구할 수 있다. 유키코의 팬이라면 한 번 사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33] 연예인 조문·헌화자 아카시야 산마/아사노 유코/아카자 미요코/이시바시 다카아키/이시카와 사유리/이키 히로시/이시카와 히토미/이시카와 히데미/이시노 마코/이시노 요코/이쿠타 토모코/이노우에 준/이와사키 요시미/이모리 미유키/이와이 토모미/에드 야마구치/오기노메 요코/오하시 준코/오자키 아미/카와이 나오코/카와이 카즈미/카와미 미유키/카시부치 테츠로/기타지마 사부로/요시카와 코지/키나시 노리타케/키무라 이치하치/키쿠치 모모코/키치 요코/쿠메 히로시/쿠로야나기 테츠코/쿠라자와 아츠미/쿠와타 야스코/코이즈미 쿄코/콘도 마사히코 /무로 테츠야 /코니시 히로유키/이마노 리에/더 드리프터스/사이조 히데키/사카모토 류이치/사카이 노리코/사카이 마사아키/사카키바라 이쿠에/사쿠라다 준코/사와구치 야스코/시부가키대/시마다 신스케/칸노 미카/시미즈 구니아키/세키구치 히로시/치 마사오/타케우치 마리야/타치 히로시/다이가와 요스케/다하라 토시히코/타나카 쿠미/다카베 토모코/타카미 치카/타키 사토미/체커즈/도미츠 카즈오/나오에 기이치/나카오 아키라/나카모리 아키나/나카야마 미호/나카하라 에/나가야마 요코/나가세 마사토시/니누마 겐지/니시무라 토모미/노구치 고로/노자와 나오코/하야미 유/하시모토 미카코/히로오카 슌/비트 다케시/후지무라 슌지/후루타치로/호리우치 타카오/호리 치에미/혼다 미나코/마츠다 세이코/마츠모토 노리코/마츠모토 유리/마키무라 미에코/미나미노 요코/미카미 히로시/미즈타니 마리/미네기시 토오루/미카츠 하루미/모리타 겐사쿠/모리 마사코/야시로 아키/야마모토 조지/야마모토 유카리/요시무라 마리/요시 이쿠조/류레이타/와다 아키코[34] 1939년생으로 배우로 활동하다 1961년, 향년 21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하였다.[35] 여담으로 유키코가 출연할 TV아사히 드라마 '가출소녀(家出少女)'에서 맡았던 배역은 추후 와타나베 노리코라는 배우로 교체되어 촬영되었고 같은 해 8월 4일 방영되었다고 한다.[36] 1986년 5월 14일 발매될 예정이었던 9집 싱글 꽃의 이미지도 처음에는 발매가 반대되었다고 한다. 그 후 13년 뒤인 1999년 3월 17일에 그녀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이것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팬들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37] 잡지는 3월에 발매되었다.[38] 실제로 오카다 유키코는 8집 싱글 입술 Network로 오리콘 차트 첫 싱글 1위를 하여 이제 막 탑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려던 참에 생을 마감하였고, 따라서 인지도에 비해 생전의 성적이 무언가 저조해 보인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살아 있었다면 더욱 전설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수들은 여럿 있으나, 물 들어올 때 노도 저어보기 전에 떠난 경우는 연예계에서 극히 보기 드문 사례.[39] 타케우치 마리야는 유키코를 기리는 의미로 2019년 발매한 40주년 기념 앨범의 발매일을 유키코의 생일 전날로 정하고, 본인이 써주었던 데뷔곡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를 셀프 커버하였다. 동년 3월에 방송한 NHK의 특집 방송에서 타케우치 마리야는, "몇 번이나 그녀의 곡을 불러보려 했지만 생각이 너무나 깊어져 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유키코의 멜로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며 마음을 밝혔다.[40] 메이테츠 비사이선 사야역에서 가깝다.[41] 유키코가 활동할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경우 한정.[42] 일부는 천수를 누리고 병이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43] 뇌척수액[44]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또한 시신의 수습이나 경찰과 병원으로 연락한 사람은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닌 그 상황을 나중에 목격한 유키코의 매니저가 했을 지경.[45] 1986년 5월 28일[46]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가요 프로그램인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는 원래 출연자가 무대 뒤쪽에 나란히 앉아있다.[47] 물론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흉흉했던 일본 사회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48] 팬덤인 유키코프렌즈를 중심으로 벌어졌었고 꽃의 이미지가 해금되기까지 소속사 선뮤직의 공헌도 있었겠지만 절친이였던 오기노메 요코의 공헌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49] 게다가 이 셋의 죽음이 갑작스럽긴 하였으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아니었으며, 생전 오랜 기간 활동하며 일본 가요계에 미친 영향 또한 활동기간이 짧았던 유키코와 비교하면 훨씬 컸던 점도 크다.[50] 컴퓨터[51] 파일:岡田 有希子 防衛省.jpg[52] 퍼스트 데이트[53] 리틀 프린세스[54] -Dreaming Girl-사랑,처음 뵙겠습니다[55] 둘만의 세레모니[56] 슬픈 예감[57] 윳코(유키코 별명) + 프렌즈(친구) ユッコフレンズ[58]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59]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를 하지 못해 건방진 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싫었다고 한다.[60] 十月人魚[61] 1986년(쇼와 61년) 4월에 출연하였지만 물론 출연의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애초에 프라이데이와 포커스와 플래시와 같은 황색 잡지에 유명인이 좋은 일로 출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62] 세이코의 직속 후배는 사실 1982년 데뷔한 하야미 유가 맞고 따라서 유키코는 하야미 유의 직속 후배이나 네임벨류의 차이 때문인지 항상 마츠다 세이코의 직속 후배라고 소개되었다.[63] 물론 유키코 또한 후세대 아이돌들에게는 똑같은 대선배격 존재이지만, 단지 오래 전 고인이 된 탓에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아이돌들과 친분을 쌓지도, 그들에게 선배 아이돌로서 가르침을 전하지도 못했을 뿐이다.[64] 유키코의 어머니가 쓰신 자서전에 있는 그녀의 일기장에 의하면 무대가 끝나고 내려와 카와이 나오코에게 인사를 했는데 웃으면서 받아줬으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힘내."라고 말해줘서 유키코의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설레였다는 일화가 있다.[65][66] 아이러니하게도 타치 히로시는 1983년(쇼와 58년), 즉 유키코의 데뷔 싱글이 나오기 1년 전에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로 들어갔다.[67] 岡村有希子[68] 岡村佳枝[69] 渡辺佳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