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 (r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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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외교-군사적 실책

이름여호사밧
생몰 년도기원전 907년 ~ 기원전 849년
재위 기간기원전 870년 ~ 기원전 848년
부모아사(유다)
자녀여호람
종교유대교
국적남유다 왕국
이전 국왕아사(유다)
다음 국왕여호람(유다)

1. 개요[편집]


남유다 왕국의 제 4대 왕. 행정적으로는 뛰어났고 외교력을 동원해 국력을 신장시켰으나 전투 한번 잘못 참여했다 군사력을 모조리 날려먹은(...) 왕이다.

주요 치적으로는 유대 왕국의 체제를 정비하였고 국력을 모아 주요 강국으로 성장시켜 그동안 적대했던 북이스라엘과 동맹 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이웃 약소국가인 모압, 에돔에서 받아내는 등 유대 왕국의 영향력을 크게 늘렸다. 또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민심을 결집시켜 내부민족 결속을 다지는 등 내치에서는 굉장히 유능한 면모를 보였다. 아래 후술할 실책 이후에는 재판관들을 각지에 세우는 등, 체제 정비에 힘썼다.


2. 외교-군사적 실책[편집]


다만 이 여호사밧의 단점이 있었다면 지나친 민족주의자였다는 점. 이것이 자기가 쌓아놓은 국력을 깎아먹는 원인이 된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연합하고, 길르앗 라못 공략전에 공동전선을 이뤄 공격해 들어가지만, 결과는 실 지휘를 맡았던 북왕국 왕 아합이 전사하면서 연합군의 대패(...)[1]

여기서 유대 국방력의 대부분을 날려먹어버리는 통에 결국 굴복시켰던 이웃 국가들이 침공해오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런 여호사밧의 기질은 변하지 않아서 북왕국과 또 공동으로 다시스의 금무역을 시도했다가 해양력을 대부분 까먹어버리는 등(...) 국력을 신장시켰으나 그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이 국력을 깎아먹어 멸망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볼 수도 있다.


[1] 혹자는 성서무오설을 들이밀며 여호사밧의 총 군사력은 친위대만 116만에 달하고 그 외에 지방군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이라고 주장하나, 과장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뒤에 나오는 이웃 부족국가들의 침공시기를 보면 정황상 이 전투에서 여호사밧은 군사력을 크게 잃었으며 만일 저 정도 숫자를 잃었다면 바로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게 현실이다. 그 수나라조차도 대규모 군사를 수차례 일으켜 고구려와의 전쟁을 벌였으나 국력의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멸망한 것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