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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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621년(광해군 13년)에 옥천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서원이지만 조선시대 향전(鄕戰)의 첫 사례를 보여주는 서원으로 의미가 있다.
2. 역사[편집]
삼계서원(三溪書院)은[1] 옥천 최초의 서원인 쌍봉서원(雙峯書院)이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어 이를 중건하여 1621년에[2] 건립된 서원이다. 쌍봉서원은 1571년(선조 4년)에 세워졌으며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백촌(白村) 김문기와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낸 탄암(坦菴) 곽시(郭詩)가 배향되었다. 삼계서원으로 중건할 때는 쌍봉서원일 때 배향되었던 전팽령과 곽시를 그대로 배향하고 김문기 대신 중봉 조헌을 배향하였다.[3] 하지만 세력 간 갈등으로 인해 조헌의 위패는 표충사로 옮겨지게 되고 서인의 공격으로 삼계서원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숙종 때인 1675년에 삼양서원(三陽書院)으로 중건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훼철되고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3. 갈등[편집]
현재는 사라지고 지금은 서원이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는 유지비만 있는데 이 곳이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정개청이 배향된 자산서원과 함께 서원을 매개체로 벌어지는 조선시대 당쟁의 첫 사례가 되는 서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에는 단순히 당색을 이유로 벌어지는 갈등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갈등의 규모는 중앙 조정에도 보고되어 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3.1. 배경[편집]
서원에 조상의 위패를 모신다는 것은 모신 인물이 지역 양반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며 그 사람의 가문이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양반 가문이라는 의미였다. 특히 여러 개의 위패 중 순서가 위에 있을수록 그 위패 주인은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현(先賢)임과 동시에 그의 가문이 지역을 대표할 정도로 권세가 강한 가문이라는 증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향촌사회의 권력을 지닌 경우는 지역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또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서로 위패의 위치를 두고 경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향전(鄕戰)이라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이고 규모가 큰 향전으로 병호시비가 있다.
3.2. 발단[편집]
갈등은 쌍봉서원에서 삼계서원으로 중건하며 1608년(선조 41년)에 전팽령과 곽시 그리고 조헌을 배향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때 김약(金籥)과, 곽현(郭鉉), 송갑조(宋甲祚)[4] 를 대표로 한 조헌의 제자들이 조헌의 위패가 가장 아래에 위치한 것을 항의하고 또한 곽은(郭垠)[5] 의 위패도 배향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시작됐다. 특히 조헌의 경우 앞의 두 사람이 충의에 관련된 행적이 없으나 조헌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이므로 조헌의 위패가 가장 첫 순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수용되지 않은 채 대립하였다.[6]
이 대립의 정도를 송시열의 문집(文集)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통해 알 수 있다.[14] 위의 자료를 통해 양 세력 간 신경전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사족의 꾸준한 주장에도 곽은을 포함하여 네 사람을 배향하자는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원래의 결정대로 전팽령, 곽시, 조헌 이렇게 세 사람만을 배향하기로 하고 1621년 삼계서원이 건립되었다.내가[7]
정립(鄭雴)을[8] 대표로 한 무리가 모여있는 곳으로 가니 그의 세력 50여 인이 엄혹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는 큰소리를 지르고 나가면서 '김축의 사위가[9] 과연 향사하기에 적합한가, 곽시의 행동이 과연 향사하기에 마땅한가.[10] 내가 너희들과 따져 보겠다.'하자 정립 등이 일시에 흩어져 달아나면서 '그만둬라, 그만둬.'하였다. 그러므로 한여징이 수감된 여태를 풀어 주었다.[11][12]그곳에 향사하는 날을 당하여 나는 그 서원(書院)에 갑자기 뛰어들어가 선생(先生)의[13]
위판(位板)을 받들어 나오려 하자 진사(進士) 박융(朴肜)이 나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었다. 이 자는 바로 박정길(朴鼎吉)의 종숙(從叔)으로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주장하여 기세가 등등하였기 때문에 남보다 앞장서서 담당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김오자옹전(金五者翁傳) 中
3.3. 전개[편집]
이후 시간이 흘러 서인이 집권한 후인 인조 2년(1624년)에 김장생이 상소를 올려 서원의 폐단을 언급하며 정개청이 배향된 자산서원과 함께 삼계서원을 허물어야 한다고 했고 이를 인조가 윤허했다. 하지만 이럼에도 인조 17년(1639년) 충청도관찰사로 김육이 오기 전에는 수호세력의 힘이 너무 강해 명망있는 인물이어도 서원을 허물긴 커녕 위패조차 함부로 건들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관계로 김육이 관찰사로 직접 온 후에야 조헌의 위패를 표충사[17][18] 로 옮기며 갈등을 마무리한다. 이 상황을 기록한 김육의 잠곡유고(潛谷遺稿)에 따르면 이때 김육이 위패를 옮기며 삼계서원에 배향된 세 명의 인물이 살아서 이 상황을 마주쳤다면 이렇게 위패의 순서를 가지고 다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19] 논쟁의 대상인 조헌의 위패는 조헌을 위한 사당인 표충사로 옮기자고 제안하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2월에 옥천 군수(沃川郡守)에 제수되었다. 과거에 이 고을 사람 전팽령(全彭齡)ㆍ곽시(郭詩)가 사론(士論)에 평판이 좋지 못하였으나, 이 고장 호족들 대부분이 이들을 추대하여 서원을 세워 향사하면서, 중봉 선생(重峯先生)의 위판(位版)을 그들의 밑에 모셔 놓으니,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인조(仁祖) 초기에 사계 선생이 상소하여 서원의 폐단을 낱낱이 진술하며, 정개청(鄭介淸)ㆍ곽시 등의 서원도 아울러 철거하기를 청하여, 철거하라는 왕명(王命)이 이미 내렸는데도 명망 있는 방백과 수령들(名公望士)조차 모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주저하며 누구도 감히 왕명을 봉행하지 않았다. 김 문정공(金文貞公)이[15]
방백이 되어서도 다만 중봉 선생의 위판을 모셔 내었을 뿐이었다.
동춘당문집(同春堂文集)[16]
통정대부수전주부윤송공행장 中
이렇게 수호세력이 신사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자신들 중심으로 서원을 운영해 나갔던 이유는 지역에서 보유한 자신들의 위상때문이다. 앞서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원에 위패가 있고 그 위치가 높을수록 위패 주인의 가문은 지역에서 가장 힘 있는 가문이었다. 위패 중 가장 아래에 위치했던 조헌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이고 수호세력은 조헌과 함께 혹은 함께하지 않았더라도 의병을 일으킨 경험이 있다.[21] 따라서 수호세력도 그의 충심을 높이 평가하여 서원에 배향되는 것은 인정하지만[22] 신사족은 다른 지역에서 새롭게 입향하여 옥천에 오래 세거한 가문 즉 수호세력 자신들과는 혈연적 기반이 거의 없는 새로운 세력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헌의 위패를 앞으로 놓자는 계속되는 신사족의 주장이 단순히 그의 순절이 의미있기에 앞 순서에 두자는 의미보다 그들이 스승인 조헌의 행적을 이용해 위패순서를 앞으로 두어 기반이 적은 새로운 세력인데도 수호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기존의 향촌권력을 쥐고 있는 수호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호세력은 한 치의 양보 없이 신사족과 강하게 대립하였다.[23]도내의 옥천(沃川)에 사는 선비들이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현(鄕賢)들을 향사(享祀)하고 있는데, 전팽령(全彭齡)이 윗자리에 있고, 곽시(郭詩)가 그 다음에 있으며, 조헌은 그 아래에 배향되어 있습니다. 이에 조헌의 문인(門人)들은 "우리 선생은 나라 일로 죽어 절의가 해와 별처럼 빛난다. 그런데 전팽령과 곽시는 특별히 드러난 행실이 없는데, 어찌 윗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전팽령의 외손 정립(鄭雴) 등은 "마땅히 세대(世代)로써 차서를 정해야지 어찌 절의의 고하를 가지고 논하는가." 하면서, 이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여 다투었습니다.
...(중략)...
이에 신이 "죽은 자가 앎이 있다면, 여러 현인들의 마음은 반드시 나이가 자신이 많다거나 도와 덕이 자신이 높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덕이 미치지 못하면 반드시 편치 못해 하면서 겸양하여 물러날 마음이 있을 것이며, 위차(位次)를 개정하여 윗자리로 올라가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한 고을의 기구(耆舊)의 윗자리에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유명(幽明)의 사이에 정의(情意)가 어찌 다르겠는가. 본군에 있는 표충사는 바로 국가가 조헌을 위하여 사액(賜額)한 사(祠)이다. 지금 만약 조헌의 위판을 표충사로 옮겨 내가면 별로 서로 다툴 일이 없어서 양쪽이 모두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니, 여러 선비들이 모두 그 의논을 따랐습니다. 이에 즉시 위판을 내어 표충사로 돌려보냈습니다.
잠곡유고[20]
제8권 '조헌(趙憲)의 위판(位版)을 표충사(表忠祠)로 옮겨서 매안(埋安)한 데 대한 서장' 中
하지만 서인이 중앙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효종 5년(1654년) 옥천군수로 온 송국택(宋國澤)의 주도로 곽시의 위패는 철거되고 삼계서원에는 전팽령의 위패만 남는다. 두 사람 중 곽시의 위패만 철거된 이유는 곽시의 집안인 선산 곽씨가 송시열의 외가인 인연으로 송시열과 관련된 일부 종파는 송시열과 연결되어 서인으로서 신사족과 힘을 합쳤기에 곽시의 위패가 철거될 때 수호세력이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팽령의 위패를 서원에 모시도록 주도한 수호세력의 대표 정립이 조헌과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 때는 서인의 영수인 김장생의 휘하에 있었는데 정립이 전팽령의 외손자이므로 이러한 인연때문에 신사족이 전팽령의 위패는 명분이 없어 건드리지 못했다. 게다가 두 사람 중 전팽령의 위상이 더 높으니 곽시의 위패라도 먼저 철거한 것이다.[24][25][26]
곽시의 위패가 철거된 이후 당시 충청감사였던 서필원은 군관인 이두원에게 전팽령의 위패까지 마저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두원은 옥천으로 향하던 중 먼저 송준길에게 가서 서필원이 명령한 대로 할지 물어보자 송준길이 이를 만류하며 지금 철거하지 말고 상소를 올려 임금께 직접 윤허를 받고 철거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사실을 들은 서필원은 송준길의 제안대로 직접 철거하는 대신 중복되어 건립된 서원의 폐단이 심하므로 일부 서원을 철폐해야함을 주장하며 간접적으로 삼계서원의 철폐를 언급하였고 왕이 이를 윤허해 주기를 상소로 올렸다. 상소를 본 효종이 철폐를 윤허하며 효종 8년(1657년) 전팽령의 위패도 철거되며 삼계서원은 완전히 철폐된다.고을 사람들은 각자 당(黨)을 만들어 서로 등지고 반목하여 고을이 분리되는 일까지 있었다. 공이 부임하여 맨 먼저 그 의논을 주도한 몇 사람의 죄를 다스리고, 이어 곽시의 위판을 철거하여 왕명을 봉행하니, 고을의 의논이 조금 진정되었다. 사론은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
동춘당문집(同春堂文集) 통정대부수전주부윤송공행장 中
철폐가 된 이후 시간이 흘러 제 2차 예송논쟁으로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수호세력은 중앙 남인의 도움을 받아 삼계서원을 다시 중건하는데 이 서원이 바로 삼양서원(三陽書院)이다. 이 때의 중건을 주도한 사람은 정용(鄭墉)과 여이진(呂以振)이었다.[30] 남인의 힘이 강해지면서 삼양서원 복구를 반대하던 이들은 유배를 가기까지 한다.전팽령(全彭齡)ㆍ곽시(郭詩)ㆍ정개청(鄭介淸) 등의 서원을 헐었다. 이에 앞서 서필원(徐必遠)이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중복해 설립된 서원을 헐어야 한다고 청하자 그때 민정중(閔鼎重)이 옥당에 있으면서 동료들을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그 잘못을 쟁론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찬선 송준길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중략)...
또 곽시란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 30여 세에 신급제자(新及第者)로 관아에 들어가 술을 과음했다가 관아의 문 밖에서 죽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어찌 제향의 대열에 끼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팽령은 어떤 사람인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팽령의 행동은 말하기가 더러워 감히 법연(法筵)에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준길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정중이 아뢰기를,
“은미하게 저질러진 악행이라서 비록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또한 유추해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당초에 왜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단 말인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일찍이 혼조(昏朝)에서[27]
그의 외손자와[28] 이이첨ㆍ한찬남 무리가 상의해서 세웠답니다.”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모두 헐어버리라고 명한 것이다.
이 서원은 이전과 같이 전팽령과 곽시의 위패 외에 한강 정구의 위패를 두었는데 이는 당시 수호세력이 남인의 영수인 정구의 위패를 모시면서 중앙 남인의 지원을 받고자 한 것이다.[31][32] 기록을 보면 사액을 받으려고 했는데 정구가 배향된 다른 서원에 이미 사액을 한데다가 이전에 올린 상소와 얘기가 다르니 지금 당장은 사액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사액을 받지 못한다.[33]이에 앞서 옥천(沃川) 유소(儒疏) 때문에 전팽령(全彭齡)ㆍ곽시(郭詩) 등을 서원(書院)에 도로 제사하라고 명하였는데, 유생 박수흠(朴守欽) 등이 정론(正論)을 가지고 불가함을 고집하자, 흉당(凶黨)이 몹시 성내어 감사(監司) 조위명(趙威明)에게 호소하여 그 수창(首唱)한 사람을 과죄(科罪)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목내선(睦來善)이 복계(覆啓)하여 정배(定配)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먼 변경에 정배하게 하여, 박수흠(朴守欽)과 남명거(南溟擧)ㆍ여유형(呂有衡)ㆍ박명흠(朴明欽)ㆍ곽노(郭櫓) 다섯 사람이 모두 절역(絶域)에 귀양갔으니, 한때 이를 억울해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2년 4월 28일
하지만 얼마 안가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며 1680년에 삼양서원은 다시 사라진다. 이때부터 옥천지방은 서인 특히 노론이 완전히 주도하는 지역이 된다.[35][36]일찍이 을묘년(1675, 숙종 원년)에 옥천의 유학 여이진(呂以振) 등이 전팽령과 곽시를 위하여 향현사(鄕賢祠)를 다시 설립하는 것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에 권세를 잡은 간신인[34]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서 두 현인(賢人)을 모함하여, 그 위판을 축출하고 사우(祠宇)를 훼철하였습니다. 청하건대, 중건하는 것을 윤허하시고, 정구를 합향하는 한 가지 일은 당초에 상소에서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광인 등이 비로소 한 사당에 합향하겠다는 뜻을 아뢰었습니다. 한 고을 선비들의 의논이 전후로 다름이 있으니,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서원등록 숙종 4년 4월 20일
4. 이후[편집]
삼양서원까지 사라졌지만 전팽령의 가문인 옥천 전씨는 대곡영당(代谷影堂)을 세워 전팽령을 배향하고 곽시의 가문 선산 곽씨는 삼청사(三淸祠)를 세워 곽시를 배향한다. 그러나 대곡영당은 계사년에 훼철되어[37] 지역 유림(儒林)과 옥천 전씨 후손들이 목담영당을 지어 다시 전팽령의 영정을 모시고 1776년에 서원의 면모를 갖추고 목담서원으로 개편하여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1819년에는 사서(沙西) 전식(全湜)의[38] 영정을 상주에서 옮겨와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 삼청사도 역시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에 훼철되었다.
5. 의의[편집]
자산서원 철폐 갈등과 함께 향전(鄕戰)의 형태 중 당색을 이유로 전개되는 향전의 첫 사례로 꼽힌다. 특히 삼계서원 갈등의 경우 시작은 혈연적 기반 차이로 시작된 대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색의 차이로 인한 대립으로 변화했다는 점과 동인이 주도하는 지역에서 서인이 새롭게 영향력을 넓혀가며 동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원을 그 도구로 이용하였고 최종적으로 서인이 주도하는 지역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사례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6. 여담[편집]
옛날 폐조(廢朝)[39]
때에 한찬남(韓纘南)의 당(黨)인 정립(鄭雴)이 그 세력을 믿고 함부로 제 외조(外祖)인 전팽령(全彭齡)을 서원(書院)에 향사(享祀)하였다. 유희분(柳希奮)의 당(黨)인 이시립(李時立)은 제 아비의 친구인 곽시(郭詩)를 거기에 아울러 향사하고, 우리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을[40] 그 밑에 배향(配享)하였다. 대저 팽령(彭齡)이란 자는 되놈(오랑캐)만도 못한 자이다. 이웃에 사는 김축(金軸)이란 자가 손으로 제 처제(妻弟)를 때려 죽이고 그의 재물(財物)을 독차지하였으므로 향인(鄕人)들이 그를 흉적(凶賊)으로 대하여, 길에서 그를 만나면 피하고 그가 오는 것을 보면 그곳을 떠나 버렸으니, 그는 실로 도척(盜跖)의 후신(後身)이었다. 그런데 팽령은 그의 재물을 탐하여 김축의 딸을 후처(後妻)로 삼았으니, 이는 곧 되놈도 오히려 그를 추(醜)하게 여길 지경이다. 곽시는 논(論)을 저술하여 정 부자(程夫子)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사문(斯文)의 큰 좀벌레이다. 그리고 또 술을 매우 즐겨 마시어 창자가 문드러져서 관문(官門)에서 횡사(橫死)하였다.
송자대전 김오자옹전 中
전팽령(全彭齡)은 비록 기묘년[41]
때 천거받은 명부(命簿)에[42] 참여되었으나, 뒤에 같은 고향 사람인 김축(金軸)의 딸에게 장가들었네. 그런데 김축은 바로 처가의 재산을 탐내어 자기 처남을 물에 빠뜨려 죽인 사람으로 그 일은 차마 말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팽령은 또 그의 재산을 탐내어 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그 자의 사람됨을 알 수 있네. 그러므로 동춘(同春)이 어전(御前)에서 그의 사당을 제거하도록 주청한 것이었네. 모르겠네만 장재(張宰 당시 옥천 군수(沃川郡守)인 듯함)가 개청의 일을 회계(回啓)할 때에 이 일을 상세하게 거론하였는가? 한단(邯鄲 조위명(趙威明)을 말함)이 정용(鄭墉)의 술책에 빠져서 전팽령과 곽시를 감히 선현(先賢)이라 불렀으니 선현이란 명칭이 욕된다 하겠네.
송자대전 中 이택지(李擇之)에게 보낸 書
- 이와 같이 신사족 즉 서인 세력에서는 전팽령과 곽시의 위패를 철거하기 위해 그들의 행실과 인품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하는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실제보다 과하거나 아예 지어낸 부분이 많았다. 전팽령은 위의 자료에 나오듯이 송자대전에 따르면 재산을 탐내 혼인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전팽령은 명종 때 선정된 염근리 33인 중 한 사람이다. 이외에도 청렴하고 근신함을 이유로 승급되고 관찰사의 추천을 받은 일이 있다. 게다가 청백리 10명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임금이 주선한 궁궐 연회에 초대되었는데 병이 생겨 참석하지 못하자 임금이 특별히 상을 하사했다는[43] 기록까지 있다.[44] 또한 이암(頤菴) 송인(宋寅)이 쓴 묘지(墓誌)에 '벼슬길에 나선 지 37년 동안에 네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서 다스렸는데도 집안에 한 섬 정도의 쌓아 둔 양식 저축이 없었으나 공은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었다.'라는 언급이 있는데다가 예조에서 편찬한 서원등록에는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결백하였습니다.라는 언급도 있다. 즉 서인의 주장과 달리 재물을 탐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청백리에 선정될 정도의 인물이었다.[45]
- 이뿐 아니라 송자대전에 따르면 이들은 전팽령과 곽시의 위패를 향사한 정립(鄭雴)과 이시립(李時立)이 한찬남(韓纘男)과 유희분(柳希奮)의 당인 북인이라고 말하며 당시 중앙에서 권력을 잡은 북인의 힘을 바탕으로 향사될 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향사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립의 문집인 고암유고에 따르면 정립은 북인의 영수인 정인홍을 비판하는 통문과 상소를 올렸고 정인홍이 성혼을 탄핵하자 성혼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 또한 남인의 영수인 이황과 친분이 있기도 했다. 즉 북인이라는 송자대전의 주장과 달리 정립은 당색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이시립 또한 송이창(宋爾昌)이 적은 만사를 보면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과 친했다는 것과 '벼슬은 하되 이름이 헛되게 이르지 않았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이시립이 북인이었다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조헌의 배향을 처음 주장한 인물이 바로 이시립이므로 송자대전에 등장하는 주장과 달리 그는 오히려 서인에 가깝다.[48]
-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은 사마안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51] 옥천의 사마안은 옥천의 옛 지명인 관성(管城)을 붙여 관성사마안(管城司馬案)이라고 칭하는데 관성사마안의 서문은 정립이 1627년에 작성한 것과 송시열이 1682년에 작성한 것 총 두 가지가 있다. 서문이 작성된 시기를 보면 정립이 서문을 작성한 때는 삼계서원의 건립을 주도한 수호세력의 영향력이 강해 '명망있는 사람조차' 위패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라는 말까지 나오던 그 시기였다. 반면 송시열이 서문을 작성할 때는 신사족 즉 서인이 강세를 보여 삼계서원을 잇는 지역의 유일한 동인계 서원인 삼양서원을 훼철한 시기였으며 이와 동시에 옥천 서인계 서원의 대표격 서원인 창주서원이 사액을 받은 시기에 작성하였다.[52][53]
7. 참고 자료[편집]
- 17-18세기 沃川地方 在地士族의 動向 : 三溪書院의 置廢를 중심으로
- 17세기 沃川 三溪書院과 斯文是非
- 沃川의 三溪·三陽書院 硏究
- 朝鮮後期 沃川地方 士族의 存在形態 : 司馬案을 中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