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성씨)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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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국, 중화권, 월남의 성씨. 한국의 성씨로는 賓, 彬 두 종류가 있다.
2. 賓(손 빈)[편집]
수성(대구광역시 수성구), 담양, 영광 세 본관이 있다. 고려 원종대 태자(후의 충렬왕)의 왕후가 될 제국대장공주를 호위하여 원나라에서 들어온 빈은후(賓殷厚)를 기원으로 한다. 그의 손자 빈서기(賓瑞奇)가 카다안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수성군(壽城君)에 봉해졌다. 중시조는 수성현(壽城縣) 출신의 빈우광(賓宇光)인데 정동행성에서 치러진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로 가 한림학사를 역임하다가 수많은 서적을 갖고 고려로 돌아왔고 충숙왕은 이 공으로 그를 수성군에 봉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5,593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빈씨의 97%를 차지.
2.1. 인물[편집]
3. 彬(빛날 빈)[편집]
대구, 달성 두 본관이 있는데, 모두 대구와 동조동원으로 보인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대구 9가구, 본관 불명 1가구 등 전국에 10가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은 모두 경성부와 경기도 광주, 용인시, 이천시 등지에 살고 있었다. 이들 중 당시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운학리(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에 살던 빈영선(彬永先)씨는 자신의 선조는 몽골인으로, 청나라 광서제 때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빈문(彬文)인데 빈문이 당시로부터 20대 이전 대구광역시로 이주해 오면서 살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용인군 포곡면 삼계동(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삼계리)에 살던 빈봉구(彬鳳求)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 대구에서 지금의 위치로 이주해 왔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증언을 토대로 보면, 청 광서제 때 원외랑을 지낸 빈문이 우리나라 빈씨의 시조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가 대구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대구로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시기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 살았던 빈문현(彬文顯)은 1925년 6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1940년 6월 7일 동아일보 기사 등에서 궁술선수로 전조선 궁술대회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2015년 조사에서 169명으로 위의 빈씨보다 월등히 적다.
3.1. 인물[편집]
4. 대중매체[편집]
현실에서는 매우 적은 희귀 성씨이지만 의외로 세련되고 고귀하면서 화려한 어감 때문에 반씨, 은씨처럼 로맨스 소설, 무협 로맨스, 양로소, 일진물, 할리퀸 인터넷 소설 등 매체에서 오히려 훨씬 더 출연하는 성씨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