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셀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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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NBA의 동부 컨퍼런스 애틀랜틱 디비전 소속 프로 농구팀. 연고지는 보스턴. 홈구장은 TD 가든. 약자는 같은 연고지를 둔 보스턴 레드삭스와 같은 BOS다.
셀틱스라는 이름의 유래는 켈트족을 뜻하는 것으로, 보스턴에 아일랜드 계통 이민자가 많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1914년부터 1939년까지 뉴욕을 연고로 활동했던 농구팀 '오리지널 셀틱스'가 근원이기도 하다.
2. 특징[편집]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함께 NBA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대 산맥. 역대 NBA 파이널 17회 우승으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함께 공동 최다 우승팀이다. 정규시즌 성적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비해 부족하지만 결승에서 매우 높은 승률을 보이며, 플레이오프에서 강해지는 팀이다.
보스턴 셀틱스하면 비록 화려하지 않고 느리지만 강력한 수비와 선수들간 롤차이가 크지 않으며, 특유의 '셀틱 프라이드'라는 슬로건 아래 끈끈한 조직력과 팀워크를 기반으로 하나로 똘똘 뭉치는 시스템 농구를 펼친다. 이것도 그 시대 최고의 스타들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빠른 공격 농구를 펼치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대비되는 점이다.[5][6]
지금까지의 전성기는 크게 네 번으로 볼 수 있는데, 첫 전성기는 NBA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파이널 8연패의 금자탑을 쌓은 1960년대 레드 아워백 - 빌 러셀의 셀틱 왕조 시대, 두 번째로 러셀의 은퇴 이후 존 하블리첵을 중심으로 데이비드 코웬스와 조조 화이트를 앞세워 리그 우승 두 번을 차지한 1970년대, 세 번째로는 래리 버드 시대인 1970년대 후반~1980년대, 마지막으로 닥 리버스 감독 체제에서 폴 피어스, 레이 앨런, 케빈 가넷의 빅3와 라존 론도가 활약한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이후 5년간의 리빌딩을 마치고 2016-17 시즌에는 동부 컨퍼런스 승률 1위에 플레이오프에선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면서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 대형 FA인 고든 헤이워드를 잡고 트레이드로 카이리 어빙을 영입하면서 리그에서 세 번째로 젊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가 되었으며, 팬들은 팀의 다섯 번째 전성기가 펼쳐질지 기대하는 중이였으나, 그러나 어빙이 팀을 떠나고 헤이워드가 큰 부상으로 허송세월을 하며 셀틱스의 다섯 번째 전성기는 19-20시즌 엄청난 스탭업을 보여주며 올스타급 선수로 성장한 제이슨 테이텀과 제일런 브라운의 손에 달려있다 봐도 무방하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기록한 8년 연속 우승 기록은 프로 스포츠 리그만 따질 경우 분데스리가 FC 바이에른 뮌헨의 10년 연속 우승, 세리에 A 유벤투스,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레인저스 F.C.와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에 이은 3위 기록일 정도로 압도적이다.
무려 21개의 영구 결번이 있고, 우승 배너가 17개나 걸려 있기 때문에 일단 물량 면에서 품격이 다른 게 보스턴의 홈 코트 분위기다. 전통적으로 화려한 플레이보다는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선호하며, 이런 점들은 선수들의 프로 의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7]
전통적으로 플레이오프 승부처에서 매우 강했던 팀이다. 보스턴은 역대 7차전 전적이 21승 8패인데 특히 60년대 왕조 시절의 기록은 눈부실 정도. 팀의 첫 우승이자 빌 러셀의 첫 우승을 7차전만에 차지한 걸 시작으로 러셀 시대에만 열 번의 7차전을 치러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1승 3패로 뒤지던 팀이 시리즈를 뒤집은 것도 68 셀틱스가 최초였으며 파이널 7차전에서 원정팀이 승리를 차지한 것도 69 셀틱스가 최초였다.[8] 래리 버드 시절엔 5승 2패이긴 하지만 92년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붙었을때는 에이스 버드가 서있기도 힘든 부상으로 시즌 내내 고생하다 (절반 가까이 결장했다) 이 시리즈에서도 7경기 중 네 경기밖에 못 뛰는 등 몸상태가 최악이었다. 제대로 붙어서 진 팀이 당대 최강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인 점, 필라델피아를 포함해 당대 가장 강팀들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애틀랜타 호크스, 밀워키 벅스를 모두 7차전에서 꺾은 걸 생각하면 "승부처에 강한 셀틱스"의 위용은 여전했다.
또한 홈에서도 특히 강했는데, NBA 역사상 가장 높은 정규시즌 홈승률(40승 1패, 2015-16 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타이)이 바로 86 셀틱스가 기록한 것이다. 이때 셀틱스는 플레이오프에서 홈 전승을 기록해 시즌 통합 승률에서 단연 1위이다.[9] 86년 이후 21년만의 첫 우승이었던 08년 우승 당시에도 기묘한 형태의 홈불패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1,2라운드에서 홈전승, 원정전패란 기록으로 이겼다. 동부 결승 2차전에서 홈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패배하며 위기가 오나 했지만 원정에서 2승을 따내며 결승에 착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상대로 홈에서 3승, 원정에서 1승 2패를 기록하며 우승한다. 현재는 과거에 비해 이런 모습이 많이 희석된 편.
사실 NBA는 유럽축구에 비해 명문, 비명문팀의 성적 차이가 크지 않다. 셀틱스도 래리 버드 은퇴 이후 폴 피어스, 앤트완 워커가 합류하기 까지 암울한 침체기가 있었으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명문팀 프라이드는 존재하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의 경기 외적인 유혹으로 넘어가는 선수들도 많지만 극히 일부분이며 대다수 선수들은 돈 혹은 우승을 위해 합류하기 때문에 주요 선수들의 전성기가 끝나거나 이적 이후에는 급격한 팀 성적 하락으로 이어지고 리빌딩을 반강제적으로 걸친다. 여기서 단장 및 보드진의 능력이 나오는데 셀틱스는 비즈니스 마인드로 똘똘 뭉친 대니 에인지가 있기에 빅3 해체 이후 빠르게 팀을 정상권으로 재편성 했다.
하지만 성적은 정상권이었음에도 2010년 이후 한번도 파이널에 못갔다. 결국 대니 에인지는 사임을 표했고 감독이였던 브래드 스티븐스를 단장에 앉히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드디어 2022년에 파이널에 올랐지만 아쉽게 골든스테이트에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3.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보스턴 셀틱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라이벌[편집]
셀틱스 - 레이커스 라이벌리 참고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결승에서만 12회 만났다. 전적은 9승 3패. 이중 일곱 번이 빌 러셀이 있을때 거둔 승리이며 그 이후에는 2승 3패.[10] 그런 만큼 2008년에 셀틱스-레이커스로 결승전이 결정됐을때 팬들과 NBA 사무국의 반응은 대환호. 보스턴의 동부 우승으로 셀틱스-레이커스가 결정났을 때에는 보스턴 관중 모두가 'Beat LA(LA를 이겨라)'를 외쳤을 정도.
1년에 두 번, 그리고 파이널에서만 붙을 수 있는 LA 레이커스와 달리 같은 동부에서 가장 처절하게 치고받았던 라이벌리는 바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이라는 동부지역 최고의 전통을 가진 대도시[11] 간 자부심 경쟁도 있었는가 하면, 빌 러셀 vs 윌트 체임벌린, 데이브 코웬스 vs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 vs 바비 존스 등 선수들 입장에서도 매년 처절하게 파이널 진출을 위해 치고받았던 그런 사이다.
그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의 보스턴은 매년 플레이오프 자체가 도시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었다. 그러다보니 1982년 동부 파이널에서 이 두팀이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치뤘으나 결국 보스턴의 패색이 짙어지자 홈에서 팀의 탈락을 지켜볼수 밖에 없었던 보스턴 홈구장의 팬들이 지금은 우리가 졌지만 레이커스에게는 절대 지지 말아달라라는 뜻으로 'Beat LA'라는 구호를 합창했을 정도.
이 당시에는 팀 간의 라이벌 의식을 넘어 동서부 컨퍼런스 간에도 라이벌 의식이 샘솟았다. 유사한 이유로 올스타전도 단순 쇼를 넘어서 피 튀는 혈전이 벌어졌었고 보스턴 팬들은 '어차피 우리가 못 가질 거 동부의 자존심이라도 세워라!'라는 뜻에서 Beat LA를 외쳐댄 것. 그런데 필라델피아는 결국 LA 레이커스에게 4:2로 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 필라델피아는 다시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를 만나 4:0으로 완승하며 보스턴 팬들의 소망(?)을 대신 이뤄준다.
5. 영구결번[편집]
- 00. 로버트 패리시: 1980년대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과 같은 빅 3의 일원이자 NBA 역대 최고령 2위 선수(43세)
- 1. 월터 브라운: 보스턴 셀틱스의 초대 구단주이자 창설자로, 셀틱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다. 구단이 창단된 1946년부터 1964년까지 셀틱스의 구단주를 역임했고, 보스턴은 일곱 번 우승을 했다. 1905년 2월 10일에 태어나, 1964년 9월 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보스턴 가든, 아레나의 소유주 였으며, 보스턴 브루인스 하키팀의 사장이기도 했다.[12] 1951년 보스턴 가든에서 열린 첫 NBA 올스타 게임 창안에 공헌을 했다.
- 2. 아놀드 '레드' 아워백: 월터 브라운에 버금가는 보스턴 셀틱스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13] 셀틱스의 전설 그 자체. 1950-51 시즌부터 1965-66 시즌까지 감독직을 맡았으며 감독으로 아홉 번의 우승을 거두었으며, 1958-59 시즌부터 1965-66 시즌까지 8시즌 연속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단장(1951~1984), 사장(1970~1997/2001~2006) 재임 중 일곱 번의 우승을 거두고, 보드진 부회장(1997~2001)으로 종횡무진 활동하면서 총 16개의 우승 반지를 가지게 되었다. 1965년 NBA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고, 1968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970년 25주년 올스타 게임 감독이었으며, 1980년 NBA 올해의 경영인 상을 받았고, 같은 해 미국 프로농구 기자협회 선정 'NBA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뽑혔다. 1996년에는 NBA 역사상 위대한 감독 1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6년 10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 3. 데니스 존슨: 별명은 'DJ' 로 1983년부터 1990년까지 총 7시즌 동안 셀틱스에서 뛰었고, 1984, 86년 파이널 우승에 일조했다. 또한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1979년 우승 멤버였고, 당해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하며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1980년 All-NBA 세컨드 팀에, 1981년에는 All-NBA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린바 있다. 그리고 5시즌 연속(1978-79 시즌부터 1982-83 시즌까지)으로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들었고 1987년에 다시 이름을 올린다. 또한 3년 연속(1984, 85, 86년)으로 올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포함됐다. NBA 올스타에는 5번 선정됐다.(1979~82년, 1985년) 1992-93 시즌 부터 1996-97 시즌까지 셀틱스 코치로 있었으며 2007년 2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 6. 빌 러셀: NBA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유일한 전 구단 영구 결번자이다. 8연속 우승의 기록이 깃들어 있는 아홉 번의 NBA 우승(1957, 1959~1966), 그리고 또 한번의 연속 NBA 우승(1968~1969)으로 통산 11회 우승을 일궈낸 반지의 제왕으로 다섯 번의 NBA MVP(1958, 1961, 1962, 1963, 1965), 13년의 그의 커리어 중 루키 시즌을 제외하고 열두 번의 NBA 올스타(1956-57), 1963 NBA 올스타 경기 MVP 이며, 21,620번(경기당 22.5번)의 리바운드의 기록으로 셀틱스 역사상 최다 리바운드의 기록, NBA 4시즌 최다 리바운더, 세 번의 NBA 퍼스트 팀(1959, 1963, 1965), NBA 올-디펜시브 팀(1969), 1970년의 NBA 25주년 올타임 팀, 1980년의 NBA 30주년 올타임 팀, 1996년의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에 이름을 올렸고, 1975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뽑혔으며, 1980년 미국 프로 농구 기자 협회 선정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뽑혔으며, 셀틱스에서 3시즌 동안(1966-77~1968-99) 감독에 역임하며 162-83(.661)의 기록과 두 번의 우승(1968, 1969)을 일궈냈다. 2022년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났고, 8월 12일 NBA로부터 등번호 6번이 모든 구단에서 영구결번되었다.
- 14. 밥 쿠지
- 15. 톰 하인슨: 보스턴 셀틱스의 선수(1956~1965)와 감독(1969~1978)으로써 총 10개의 우승 반지를 가진 '셀틱스 맨'. 은퇴 후에는 30년 이상을 셀틱스의 방송 해설자로 팬들과 함께 했다. 2020년 11월 10일 향년 86세로 타계하였다.
- 16. 새치 샌더스:
- 18. 데이브 코웬스: 1973년 NBA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NBA 올스타 게임 MVP마저 차지하며 2관왕을차지한다.NBA 올스타 게임에 여덟 번 출장하였다(1972~78, 1980)
- LOSCY 짐 로스컷오프: 짐 로스컷오프는 특별 영구결번식으로 대접받고 있다.[14]
- 19. 돈 넬슨: 1965년부터 11년간 팀의 조연으로 활동하며 총 4개의 우승 반지를 땄고, 은퇴 후 2010년까지 밀워키 벅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뉴욕 닉스, 댈러스 매버릭스 등지에서 감독 및 단장직을 거치며 공격농구의 단장이자 유능한 행정가로 칭송받았다. 아들 도니 넬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댈러스 매버릭스의 단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 21. 빌 셔먼
- 22번(에드 매카울리)
- 23번(프랭크 램지)
- 24번(샘 존스): 뱅크샷의 달인으로 유명했던 슈터. 커리어 우승 횟수 10회로 역대 선수 중 빌 러셀의 11회 다음 2위이다. 2021년 12월 30일에 별세했다.
- 25번(K.C. 존스): 빌 러셀의 샌프란시스코대 2년 선배로, 원래 NFL 미식축구 선수를 꿈꿨으나 뜻대로 안 되자 1958년부터 9년 동안 후배 러셀과 함께 왕조 형성에 공헌한 바 있다. 은퇴 후 1967년 브랜디즈 대학교 농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샌디에이고 콘키스타도르스(ABA), 워싱턴 불리츠 등을 거쳐 1978년 친정팀 셀틱스의 코치로 돌아온 후, 1983년부터 5년간 감독을 맡아 이 팀에서 우승반지 3개를 더 땄다. 암흑기 시절이던 1996-97 시즌에는 코치를 또 맡기도 했다. 말년에 알츠하이머 증세를 앓다가 2020년 12월 25일 코네티컷 주의 한 요양원에서 타계했다.
- 31번(세드릭 맥스웰): 비록 스타급 플레이어는 아니었고 셀틱스에서의 근속기간 역시 8년으로 아주 길지는 않지만, 81시즌과 84시즌 우승에 공헌했으며 특히 1980-81시즌에는 버드를 제치고 Finals MVP를 수상하였다.
- 34번(폴 피어스): 우승과 파이널 MVP를 포함해 선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커리어를 보냈으며, 말년에 타의로 브루클린 네츠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보스턴에서만 뛴 기간만 15년에 달한다. 17-18 시즌 시작전 10일 계약을 체결해 본인이 원하던 셀틱스 유니폼을 입고 은퇴했다.
- 35번(레지 루이스): 1965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출생. 먹시 보그스의 고교 동창으로, 노스이스턴 대학교를 거쳐 1987년 드래프트 22번으로 뽑혔다. 당시 래리 버드를 비롯한 주축선수들의 부상과 노쇠화로 몰락해가던 보스턴의 희망이었던 선수였다. 왜냐면 그가 한창 전성기를 달려가던 시절에 셀틱스는 비록 파이널은 못가도 플레이오프 단골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1991-92 시즌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셀틱스의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였으나, 루이스는 93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샬럿 호네츠와 경기 도중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회복되는 듯 보였지만 같은해 7월 27일 2차 발작을 일으켜 다시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보스턴은 2001년까지 플레이오프에 딱 한번 진출했고, 아예 2000-01 시즌까지 5할 이상의 승률도 챙기기 못했다. 그의 사망은 레드 아워벡의 시대(감독으로서가 아닌 유능한 구단 행정가로서)도 끝났음을 뜻했다.
여기에 영구결번은 아니나 1953년부터 1990년까지 보스턴 셀틱스의 경기를 중계한 캐스터인 조니 모스트[16] 가 특별 영구결번식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는 레이커스의 칙 헌과 더불어 당대 NBA 레전드 아나운서 중 하나로, 1953년부터 1990년까지 긴 세월동안 셀틱스 경기를 해설했기 때문에 셀틱스 올드게임 중 홈게임에선 반드시 이 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특유의 가래낀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특징으로, 셀틱스 선수가 멋진 플레이를 하면 더욱 거칠어진 격앙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른다.(비교적 젊었던 Havelicek stole the ball에서는 그나마 양호하지만 80년대 목소리는 거의 마귀할멈같다. 래리 버드가 아이제아 토마스의 패스를 스틸할 때 목소리가 압권) 셀틱스의 상징 중 하나인데, 팀에 대한 애정이 넘쳐서 엄청난 편파해설로도 유명했던 인물이다. 80년대 파이널 도중 매직을 "징징이(crybaby)"라고 부르거나, "징징이가 리바운드를 잡았습니다(Crybaby with a rebound)"란, 요즘 시대같으면 큰일날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도 비판 여론이 있긴 하고, 라이벌인 레이커스, 디트로이트나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특히 더 깠기 때문에 안티들도 꽤 많다.
그리고 국내에는 잘 안 알려져있는 사실인데, 8번이 셀틱스 구단 대내외적으로 앤트완 워커의 번호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이적 또는 신인선수에게 8번을 배정할 때 구단에서 먼저 앤트완 워커에게 직접 연락을 하고 진행한다고 하며, 워커는 넉살좋게 항상 ok한다고. 새로 배번 8번을 받는 선수가 나오면 항상 기사가 나오는 이유다. 23-24시즌 기준 8번은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더불어 NBA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팀이기에 영구결번이 많은것은 당연하나, 단지 오래 활동했을뿐 큰 활약이 없었던 선수나 시즌 중 갑자기 사망한 선수들까지 애도 차원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영구결번을 지나치게 많이 지정했다는 점도 부정하기 힘들다. 라이벌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만 해도 영구결번 선정에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11명인데 보스턴 셀틱스는 20명이다. 같은 지역 야구팀인 보스턴 레드삭스과는 정반대.[17]
명감독 레드 아워백의 9회 우승 횟수는 한동안 안 깨지다가 2010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파이널 우승으로 필 잭슨이 깼다. 빌 러셀은 11회 우승의 명 센터로 레드 아워백의 은퇴 후 선수 겸 감독으로 최초의 흑인 감독이기도 했다. 레드 아워백 밑에서 9회 우승, 선수 겸 감독으로 2회 우승으로 선수로서는 최다 우승 횟수를 자랑한다.[18]
6. 기타[편집]
- NBA 역사상 최초로 주식회사 형태로 확립된 구단이다.
- 팬들의 응원이 가장 열정적인 팀 중 하나다. 스포츠의 도시인 보스턴답게 팬들의 충성심이 강하다. 팬들의 충성심이 강한만큼 선수들도 하나같이 보스턴이 좋은 도시이자 좋은 팀이라는 말을 빼먹지 않고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폴 피어스 같은 경우는 어린 시절 캘리포니아에서 레이커스 팬으로 자라면서 셀틱스에 드래프트 되기 전까지 셀틱스를 진짜 싫어했다고 테이텀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이 도시와 팬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그 누구보다도 셀틱스를 사랑하는 셀틱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됐다.
6.1. 보스턴 가든[편집]
올드팬들이라면 1995년까지 셀틱스의 홈구장이었던 "보스턴 가든(Boston Garden)"을 기억할 것이다. 1928년에 "보스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란 이름으로 개장한 이 다목적 구장은 노스 스테이션 위에 지어졌으며, 콘서트나 복싱, 레슬링과 더불어 셀틱스와 보스턴 브루인즈의 홈구장으로 기능했으며, BAA소속으로 1946년에 창시된 셀틱스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됐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III'[19] 를 지은 사업가 텍스 리커드는 전국에 같은 이름의 구장들을 7개 짓고자 했고 이 계획의 일부로서 '보스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컴퍼니는 1938년에 이 구장에 대한 권리를 보스턴 아레나 코포레이션에 팔았고 이때부터 오리지널 MSG와 다른 길을 겪게 된다.
가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마룻바닥인데, '쪽매 세공법(parquetry)'[20] 디자인으로 셀틱스가 원년부터 1955년까지 가든과 함께 사용했던 보스턴 아레나(Boston Arena)로부터 1952년에 가져온 것이다. 보스터 가든이 쪽매 세공법으로 디자인된 유일한 구장은 아니었지만(붉은 참나무를 이용한 유일한 구장이긴 하며, 이 목재는 현재 TD 가든에도 쓰인다), 마룻바닥 전체를 기하학적인 무늬로 채운 특유의 아름다운 디자인은 한눈에 봐도 가든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독특한 마룻바닥은 가든이 철거될 때 일부가 TD 가든(당시 플릿 센터)로 옮겨져 새로운 마룻바닥 조각과 혼용되어 쓰이다가 1999년에 좌석, 벽돌 등 건물의 다른 부분과 함께 기념품으로 팔렸다. 많은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수십년간의 마일리지로 더 쓸 수 없을 정도로 닳아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보스턴 스포츠의 상징이었던 이 마룻바닥이 생겨난 배경은 아이러니하게 목재 부족 때문이었다. 셀틱스가 BAA에 데뷔하던 1946년 당시는 종전 직후였기에 귀환하는 군인들의 새 집을 마련하기 위한 목재가 대량으로 필요했고, 마룻바닥을 만들 목재를 구하기 힘든 상태였다. 당시 구단주였던 월터 브라운은 팬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좋은 품질의 마룻바닥을 만들고 싶어했고, 보스턴의 목공소를 뒤져 모은 붉은 참나무 나무조각들로 만든 것이 아름다운 쪽매세공법처럼 보이는 디자인이 된 것이다.
또한 너무나 오래 쓰인 마룻바닥이었기에 어느 구역은 조금 느슨하거나 어느 쪽은 나사가 헐렁하기도 했고, 이 때문에 상대팀들은 보스턴이 일부러 실책을 유도하기 위해 볼핸들러를 그쪽으로 몰고 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당시는 NBA가 현재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기에 이런 구장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 가능했지, 현재처럼 대형화되고 규격화된 NBA에선 이런 마룻바닥이 허용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워낙 오래 전에 지어진 구장이기에 냉방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여름에 열리는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고생했는데, 보스턴이 2대1로 뒤지다가 7차전만에 승리한 1984년 당시는 셀틱스 측에서 (속공팀인) 레이커스의 체력을 빼놓기 위해 일부러 온도를 올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곳에서 셀틱스는 그야말로 무적의 역사를 자랑했다. 90년대까지 셀틱스는 16회 우승으로, 2위인 11회 우승을 차지한 레이커스보다도 압도적인 우세였으며, 1984년까지 셀틱스는 레이커스에게 단 한번도 파이널 시리즈를 내준 적이 없었다. 특히나 홈에서 최강으로, 1986년 셀틱스는 정규시즌에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40승1패, 플레이오프에선 홈에서 전승을 기록했다. 보스턴 가든의 독특한 특색 외에도 천장에 걸려있는 수많은 챔피언과 영구결번 배너들이 상대팀에게 위압감을 줬으며, 이처럼 건물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는 보스턴 가든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에 지어진 경기장이기에 결점도 많았다. 위에 언급된 냉방 문제와 마룻바닥 외에 아이스 하키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NHL에서 링크 크기를 규격화시키기 전에 만들어진 구장이기에 링크가 너무 작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벤치 위치나 페널티 박스 위치를 바꾸는 등 다양한 수단을 써야했다. 심지어 1988년과 1990년에 열린 스탠리 컵 결승 당시에는 정전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88년 4차전은 이틀 후 재경기를 치러야했는데, 90년 정전 당시엔 다행히 복구되어 경기가 재개되었다.[21]
이렇게 노후된 구장이기에 결국 1995년 신식 플릿 센터(현 TD가든)로 이사를 가게되고, 1998년에 70년간의 길고도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하고 철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