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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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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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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위스조지 메이슨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미국정치인이자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다. 미국 건국의 4대 문서(동맹규약, 독립선언서, 연합규약, 미국헌법)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이다. 변호사였던 그는 일찍부터 미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대영강경론자들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헌법작성에도 참여하였다. 그 후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등을 지냈다.

2. 생애[편집]


로저 셔먼은 1721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뉴턴이라는 곳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기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고등교육을 받은 목사에게 맡겼고 그의 밑에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745년에 그는 뉴헤이븐에서 측량기사로 활동하였으며 1749년에 결혼하였다.[1]

이후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뉴밀포드 지역구에서 식민지 의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755년부터 1758년, 그리고 1760년에서 1761년까지 의회의 일원으로 일하였다. 그 후 판사도 역임하게 된 그는 1766년부터 코네티컷 주 대법원 판사를 도맡게 되었다.[2] 이 시절 완고한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독립주의자였던 그는 일찍부터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영국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1774년에 열린 대륙회의에 참여하여 대륙회의 연합규약에 코네티컷 주 대표로 서명하기도 하였으며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서명하였다. 1777년 연합규약에도 서명하였고 1784년에는 뉴헤이븐의 시장으로 선출되어 죽기 전까지 재임하였다. [3]

독립이 이루어진 후 1787년에 열린 헌법 제정회의에 참여하였고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회의에서는 인구수에 따라서 의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과 인구와 관계없이 각 주에서 똑같은 수의 의원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셔먼은 이원적 대의제도인 양원제를 제시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양원제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가 내놓은 타협안은 회의의 결렬을 막았으며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연방정부 체계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는 새롭게 구성된 의회에 참여하여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코네티젓 주 하원의원을 지냈고 1791년부터 1793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의원으로 있을 당시 연방주의자였던 그는 주 채무의 연방 인수, 중앙은행 설립 등을 주장하던 알렉산더 해밀턴을 지지하였다.[4]

1793년 7월 23일 2주간 장티푸스에 시달리던 끝에 뉴헤이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후손 중 한 사람이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이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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