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황형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조선 공조판서[br]장무공(莊武公)[br]{{{+1 황형}}}[br]黃衡'''}}}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파일:황형.jpg|width=100%]]}}}|| || '''본관''' || [[창원 황씨]](昌原 黃氏)[* 공희공파(恭僖公派) 5세손] || || '''출생''' || [[1459년]] [[3월 1일]] ([[세조(조선)|세조]] 5) |||| || '''사망''' || [[1520년]] [[12월 12일]]([[중종(조선)|중종]] 15) || || '''국적''' || [[조선]] || || '''시호''' || 장무(莊武) || || '''부모''' || 부친 황예헌(黃禮軒) [br]모친 의령남씨(宜寧 南氏) || [목차] [clearfix] == 개요 == [[삼포왜란]]의 명장으로 당시 방어사로 왜적을 대파한 무신이다. == 생애 == 1480년(성종11년) 무과에 급제, 1486년(성종17년) 무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고 1510년(중종5년) [[삼포왜란]]때 경상좌도 방어사가 되어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전임되었다. 이후 도총관·지훈련원사를 역임했다. 1512년(중종7년) 함경도지방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순변사]]로서 진압하고,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두 번 지내고 시호 장무(莊武)를 받고 1520년(중종15년)에 생을 마감했다. == 가족관계 == 고조부는 창원황씨 공희공파 파조인 고려시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낸 회산군(檜山君) 황석기(黃石奇)이고, 증조부는 황창(黃昌), 조부는 대흥현감을 지낸 황선경(黃善慶)이며, 아버지는 선공감정을 지낸 황예헌(黃禮軒)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남인보(南仁甫)의 딸이다. == 묘소 == * [[황형 묘]] == 여담 == 무인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었으며, 문(文)과 무(武)가 애당초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기록을 보면 아버지인 황예헌이 했던 말과 같다] 강화도에 시골집이 있었는데, 예순두 살 때 소나무 수 천 그루를 심었다. 이미 늙었는데 무엇 하러 그렇게 소나무를 많이 심으냐고 사람들이 묻자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게 될것이라고만 대답했고 얼마 뒤 죽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로부터 70년쯤 뒤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연전연패하며 무너진 끝에 보름도 되지 않아 한양이 왜군에 점령당하고 임금이 의주로 도망을 친 상황에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김천일 장군과 최원 장군이 강화도에 본영을 차렸는데, 황형이 70년쯤 전에 심어두었던 소나무가 배를 비롯해서 전쟁에 필요한 기구를 만드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왜구들의 노략질을 보고 언젠가 [[임진왜란|큰 난리]]가 날 것을 미리 내다본 듯 == 관련 문서 == * [[삼포왜란]] * [[연미정(문화재)|연미정]] * [[황형 택지]] [[분류:창원 황씨]][[분류:조선의 무관]][[분류:공조판서]][[분류:1459년 출생]][[분류:1520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