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황사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1 황사영}}}[br]黃嗣永''' || || '''생몰 년도''' ||[[1775년]]([[영조]] 51) ~ [[1801년]]([[순조]] 1) || || '''국적''' ||[[조선]] || || '''직업''' ||[[진사]] || || '''본관''' ||[[창원 황씨]] || || '''호''' ||비원(昌原) || || '''자''' ||덕소(德紹) || || '''종교''' ||[[기독교]] ([[가톨릭|천주교]] | [[세례명]]: [[알렉시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양반 출신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며,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동자이다. 본관은 [[황(성씨)|창원]](昌原)[* 공희공계 17세 영(永) 항렬.], 자는 덕소(德紹). 종교적으로는 [[순교자]]로 추앙받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현 시점에서는 천주교 신자를 제외하면 반역자, 매국노로 비판하는 시각이 더 많은 편이다. 당시 황사영이 저지른 죄는 외환죄, 즉 처형에 해당하는 최악의 죄였다. 심지어 천주교에서조차 대외적으로는 그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다른 [[순교자]]들은 대부분이 이미 시복/시성되었는데, 황사영의 경우 순교자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꽤 오랫동안 시성 과정에서 후순위로 밀렸다가 2013년에서야 '가경자'([[하느님의 종]]. 복자 전 단계)로 선포되었고 다시 2021년에 시복 청원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1032601031612050002|#]] ] [[신유박해]]를 즈음한 조선의 자세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황사영 백서'를 남겼다. 다산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丁蘭珠)[* 본명은 정명련(丁命連)이다.]와 혼인하여 다산과는 조카딸 사위이자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의 제자이다. [[자산어보]]의 저자로 알려진 다산의 작은 형 [[정약전]]과도 조카딸 사위이다. 이로 인해서 다산과 작은 형 약전이 유학파 신하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이 사건과 동시에 황사영의 조카 사위이기 때문에 이에 연루되어서 각각 [[전라남도]] [[강진군]]과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 생애(백서 사건 이전) == 황사영은 1775년 [[한성부]] 서부 반송방(성외) 아현계 아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경기도]] [[강화군|강화유수부]] 장령면 고월동(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65-1번지)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이 곳은 현재도 [[황(성씨)|창원 황씨]] 집성촌이다.[[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Num=2272|#]]]에서 정8품 휘릉별검(徽陵別檢)을 지낸 황석범(黃錫範)의 유복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790년([[정조(조선)|정조]] 14)에 증광시 진사시에 3등 8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90_026530|입격했다]]. 천주교 교육 만화에 따르면 이 때 정조가 친히 두 손으로 황사영의 오른손을 꼬옥 쥐고 격려를 했는데, 본인은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겨 오른손에 비단을 감고 평생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후술하는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다만 이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애초에 진사시는 [[과거]] 중에서도 지역에서 보는 최초의 시험인 소과로, 임금 앞에서 보는 대과 전시도 아닐 뿐더러 당시 황사영의 합격 등수는 3등의 83위로 고작 '''126명 중 113등'''에 불과했다. 좋게 보면 [[위인전]]에서 흔한 과장인데, 이 내용을 [[김훈(소설가)|김훈]]의 소설인 <흑산>에서도 사실인 것처럼 반영했다. 다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합격했다는 점과 정조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예뻐했던 [[정약용]]의 조카사위라는 점에서 정조가 기대를 걸고 따로 불러 격려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진사가 된 것 자체로도 어쨌든 지방에서는 큰소리 칠 만큼 대단해진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록을 보면 [[정조(조선)|정조]]는 열렬한 [[성리학]] 중심주의자였고, [[천주교]]에 대해 금지의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움으로써 사학(천주교)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 임금 및 실권자들과 방식이 다를 뿐, 천주교에 대해 선은 확실히 그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 마리아[*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72663.html|정난주]]라고도 한다. 남편이 처형되자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인 황경한(당시 2살)은 [[추자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자라났다. 제주시 외도동에 정난주 마리아의 이름을 딴 '정난주성당'이 있다.]와 혼인했으며, 셋째 처숙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을 참조.]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 [[황사영 백서 사건]] ==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시|제천현]] 배론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기면서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을 담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는데, 그중에 외국의 군대를 이용해 정부를 뒤집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편지를 보내려다가 도중에 검문으로 발각되면서 결국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 자세한 것은 [[황사영 백서 사건|해당 사건 문서]] 참고. == 시복 추진 == 황사영은 순교자이기는 하나 백서 사건이 국가적 시각으로는 반역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성|시복시성]]이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다가, 2013년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s://cbck.or.kr/koreanmartyrs|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선정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가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교황청]] 시성성은 2013년 황사영을 포함한 133위 순교자에 대한 예비심사 관할권을 [[마산교구]]에 부여함으로써, 황사영 알렉시오에게도 시복 후보자에게 부여되는 “하느님의 종(Servus Dei)”[* “하느님의 종” 단계에 있는 순교자에 대하여는 성당 안팎에서 행하는 공식 장엄행사나 찬양기도가 금지되고, 성화를 그릴 때 성인임을 나타내는 후광을 그려넣는 것도 금지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지순례,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종'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은 권장된다.]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마산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예비심사권한을 위임하였고,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유흥식]] 라자로 주교가 2017년 1월 21일 시복 안건을 재판할 법정 구성을 명함으로써 현재 시복을 위한 소송 절차가 진행 중이다. 2021년 6월 10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시복 133위의 예비심사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하였다.[[https://cbck.or.kr/koreanmartyrs/Board/1?no=20210623|#]] 다만 교황청 내에서 결론이 나오기까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 유적과 유물 == [[충청북도]] [[제천시]]에 소재한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는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황사영 역시 이곳에 몸을 숨기고 백서를 작성했다. 현지에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한 토굴이 복원되어 있고, 황사영의 동상 및 순교현양탑이 있다. 한편,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바티칸]]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전부 복제품이다. == 후손 == 황사영의 직계후손은 의외로 [[추자도]]에 산다. 황사영이 정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황경헌(黃敬憲)[* 황경한이라고도 한다.]은 추자도로 유배를 갔다. 황경헌은 역적의 아들임에도 아직 2살이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지 않는 대신 평생 노비로 살도록 하였는데, 하나 남은 혈육을 평생 노비로 살게 할 수 없어서 호송관원을 매수하여 황경한은 유배 도중 죽어서 수장한 것으로 처리하고, 대신 포구의 바위에 두고 갔다. 마침 포구 근처의 오씨 성을 쓰는 [[어부]]가 황경헌을 거두어 길렀으며, 황경헌은 평범한 어부로 살다가 생을 마쳤고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이 추자도에 살고 있다. 어부 오씨와 황경헌이 사실상 친부자 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추자도에서는 그 집안끼리도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사영의 현손 중 하나가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의 아들인 황사영의 5대손은 [[도쿄]]에서 외국어학원 원장으로 지내다가 사망해, 일본에도 황사영의 후손이 살고 있다. 황사영의 후손 중에서도 천주교 신자는 있고[[http://www.msgr-byon.org/client/photo/photo_view.asp?Idx=314&cate=D|#]]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https://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1112010007604|#]]. == 창작물 == * [[김훈(소설가)|김훈]]의 소설인 <흑산>에서는 [[정약전]]과 함께 스토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사실상 주인공급의 비중을 지니고 있는데, 외모와 마음, 성격 등이 모두 맑고 순수하며 깨끗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러나 조정의 극렬한 [[조선의 천주교 박해|천주교 박해]]와 부패한 사회상, 신분 차별 등에 염증을 느껴 토굴 안에서 글을 쓰다가 정탐꾼에게 발각당해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 [[흥선대원군]]을 주제로 나온 <석파란>에 잠깐 나온다. * [[자산어보(영화)|자산어보]]에서 [[정약종]]과 함께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각주] [[분류:조선의 인물]][[분류:1775년 출생]][[분류:1801년 사망]][[분류:창원 황씨]][[분류:마포구 출신 인물]][[분류:가톨릭 순교자]][[분류:거열형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