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헨리 르 스크루프(제3대 스크루프 남작)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성명''' ||<(> 헨리 르 스크루프[br] Henry Ie Scrope || ||<-2> '''생몰년도''' ||<(> [[1373년]]/[[1376년]]/[[1386년]] ~ [[1415년]] [[8월 5일]] || ||<-2>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메섬 || ||<-2>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사우샘프턴 || ||<-2> '''아버지''' ||<(> [[스티븐 르 스크루프]] || ||<-2> '''어머니''' ||<(> 마조리 웰스 || ||<-2> '''형제''' ||<(> 존, 스티븐, 모드 || ||<-2> '''아내''' ||<(> 필리파 드 브라이언, 조앤 홀랜드 || ||<-2> '''직위''' ||<(> 메섬의 제3대 스크루프 남작 || [목차] [clearfix] == 개요 ==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헨리 5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 생애 == 메섬의 제2대 스크루프 남작 [[스티븐 르 스크루프]]와 제4대 웰스 남작 존 웰스의 딸인 마조리 웰스의 장남이다. 그의 출생년도는 여러 출처에서 1373년, 1376년 또는 1386년으로 기재되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390년 [[존 보퍼트(초대 서머셋 백작)|존 보퍼트]]의 튀니지 [[십자군]]에 가담했다고 한다. 1403년 [[헨리 4세]]와 [[헨리 퍼시(핫스퍼)|헨리 '핫스퍼' 퍼시]]가 맞붙은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4세의 장남인 몬머스의 헨리 왕자의 부대에 참여해 용맹을 떨쳤으며, 이후 몬머스의 헨리가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전쟁을 벌일 때도 동행했다. 삼촌이자 요크 대주교인 [[리처드 르 스크루프]]가 1405년 [[퍼시 가문]]과 손잡고 헨리 4세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반란 토벌에 참여했다. 헨리 4세는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반란에 가담했던 제4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제4대 노퍽 백작)|토머스 모브레이]]의 2개 영지를 그에게 넘겼다. 140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메섬의 스크루프 남작이 되었고, 헨리 4세의 딸 필리파가 덴마크 국왕 [[에리크 7세]]와 결혼하기 위해 덴마크로 떠났을 때 수행원으로서 함께 따라갔다. 1409년에는 헨리 4세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에서 외교 활동을 벌였다. 1409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1410년 잉글랜드 재무장관 직에 올랐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뒤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헨리 5세]]로 등극했다. 헨리 5세는 오랫동안 자신을 충직하게 따랐던 그를 매우 신뢰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의 동맹 협상을 벌이게 하기도 했고, 1414년 프랑스와의 외교 협상에도 참여시켰다. 1415년 프랑스 원정을 준비할 때 30명의 기병과 90명의 궁수로 구성된 분견대를 맡기기도 했다. 그런데 헨리는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와 함께 헨리 5세를 잉글랜드군이 집결한 사우샘프턴에서 암살하고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제5대 마치 백작)|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대 잉글랜드인들은 헨리 5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그가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에 경악했다. 헨리 5세의 원정을 막고 싶었던 프랑스 측에게 매수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고, 그의 두번째 아내 조앤 홀랜드가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계모인 점이 그가 음모에 가담한 배경이 되었을 거라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가 음모에 가담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1415년 7월 31일, 이들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에드먼드 모티머가 포트체스터 성으로 달려가서 헨리 5세에게 이실직고하면서 음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왕은 즉시 세 사람을 모조리 체포한 뒤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귀족들을 배심원으로 삼은 임시 재판에 회부했다. 세 사람 모두 음모를 꾸몄다는 걸 솔직히 인정했다. 다만 헨리 르 스크루프는 자신이 음모에 일부러 가담해서 추가 정보를 확보한 뒤 헨리 5세에게 고발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법원은 세 사람 모두에게 교수형 후 시체를 4등분해 전국에 보내는 형벌을 내렸다. 헨리 5세는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토머스 그레이에게는 참수형만 집행하게 했지만, 자신을 배신한 헨리 르 스크루프의 형은 그대로 집행하게 했다. 1415년 8월 5일, 헨리 르 스크루프는 사우샘프턴 북문에 세워진 교수대에 끌려가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머리는 요크에 있는 마이클게이트 성문에 전시되었고, 나머지 신체 조각은 잉글랜드의 여러 지역으로 보내져 전시되었다. 사후 스크루프 남작위와 영지는 동생인 존 르 스크루프가 계승했다. == 가족 == * 필리파 드 브라이언(? ~ 1406): 초대 브라이언 남작 기 드 브라이언의 딸. 헨리 르 스크루프와 결혼하기 전에 제2대 데버루 남작 존 데버루와 결혼했다. * 조앤 홀랜드(1380 ~ 1434):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제2대 켄트 백작)|토머스 홀랜드]]의 딸. 헨리 르 스크루프와 결혼하기 전에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처음 결혼했고, 제5대 윌로비 남작 윌리엄 윌로비와 재혼했다. 헨리 르 스크루프가 처형된 뒤 초대 베시 남작 헨리 브롬플리드와 네번째로 결혼헀다. [[분류:영국의 귀족]][[분류:영국의 군인]][[분류:가터 훈장]][[분류:1415년 사망]][[분류:노스요크셔주 출신 인물]][[분류:백년전쟁/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