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헤르만 뮐러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rmannmueller.jpg|width=300]]|| ||<:> '''풀네임''' ||'''Hermann Müller'''[br]헤르만 뮐러 || ||<:> '''출신 정당''' ||[include(틀:독일 사회민주당)] || ||<:> '''생몰년''' ||[[1876년]] [[5월 18일]] ~ [[1931년]] [[3월 20일]] || ||<:> '''재임기간''' ||[[1920년]] [[3월 27일]] ~ [[1920년]] [[6월 20일]] [br] [[1928년]] [[6월 28일]] ~ [[1930년]] [[3월 27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동한 [[독일]]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두 차례 [[독일 총리|총리]]직을 역임했으며, 외교관으로는 독일 측 대표 중 하나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기도 했다. == 생애 == [[만하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 궁핍과 견습생 시절을 체험하면서 [[좌파]]적 정치 성향을 지니기 시작해서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 사민당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구하는 [[극좌]]계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중도좌파]]적으로 성향이 변했다.[* 이러한 성향으로 당내에서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동지였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특히나 유창한 [[외국어]] 구사 능력이 주특기여서 제2 [[인터내셔널]]의 독일측 대표자로 참가하기도 했고, [[1차대전]]이 임박한 [[1914년]] 7월에는 [[프랑스]] 측 [[사회주의자]] 대표와 양국 노동자들의 공동행보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독일 사민당]]은 계급 대신 조국을 선택했고, 이미 뮐러가 협상을 하던 와중에 독일 사민당은 [[독일 제국]]의 전비 조달을 위한 [[국채]] 발행에 찬성하고 있었다(...)]. [[1차대전]] 종결 이후로는 사민당의 대표를 맡던 와중에 외무장관으로 입각하여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 전임 외무장관이자 총리인 [[필립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자기는 서명할 수 없다며 사임하면서 거의 독박을 뒤집어쓰는 심정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요청을 받고 총리로 취임해 독일 각지에서 벌어지는 [[극좌파]]의 무장폭동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각종 [[준군사조직]]의 무장을 해제[* 가령 [[철모단]]이라든가 [[스파르타쿠스단]]이라든가...또한 동부 [[슐레지엔]] 지역에서 [[폴란드인]]의 봉기를 진압하고자 [[독일인]]들이 구성한 [[자경단]]들도 이러한 준군사조직에 포함된다.]하는 일에 전념한다.[* 단순히 치안유지 목적이 아니라 [[협상국]]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러한 단체들을 모두 해산시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의무교육]]의 실시, [[실업자]] 구제 정책과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다지는 데도 성공하였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적인 조건을 무력하게 승인한 사민당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치솟으면서 [[1920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참패하고 결국 뮐러는 3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후 뮐러는 [[가톨릭 중앙당]]의 [[요제프 비르트]]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세금]] 인상 문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이끄는 보수계열의 [[독일 인민당]]은 [[소비세]] 인상을, 뮐러와 사민당은 [[부자증세]]를 주장했다.] 및 근로시간 8시간 정책 실시 시기 등을 놓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1922년]] 연정이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1923년]] 이후 [[인플레이션]]이 통제불가능의 상황에 치닫고 [[프랑스]]가 전쟁배상비를 조속히 납부할 것을 요구하며 [[루르 점령]]을 벌이는등 독일이 국가적 위기에 빠지자 [[1923년]], [[1924년]], [[1926년]] 등 여러 차례 거국적 대연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원체 경제 문제를 둘러싼 입장이 서로 달랐으며 보수계열의 지역자치단체 정부가 사민당을 탄압하는 경우가 많아 연정이 자주 깨진다.] 이후 [[1928년]] 총선에서 다시 사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뮐러는 다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복귀하게 된다. 그렇지만 뮐러 본인의 건강 자체가 워낙 안 좋았던 데다가, 연정파트너였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독일 인민당]]과 여전히 사사건건 국정 운영을 놓고 충돌이 벌어졌으며, 대외적으로도 [[폴란드]], [[소련]]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향하는 와중[*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와는 [[독일-폴란드 무역전쟁]] 및 [[폴란드]] 내에 거주하는 [[독일계 폴란드인|독일계 소수민족]] 문제로, [[소련]]과는 [[공산주의자]] 탄압 문제가 외교적인 논란으로 비화된 것.]에 [[1929년]] [[대공황]]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터져버린다. 대공황으로 독일 내 [[실업|실업자]]의 수는 급증했고 이들에게 줄 무상급여를 위해서는 공적기금의 투입이 필요했지만, 보수계열 정당들이 이를 거부해 버린 것. 이에 뮐러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비상대권 시행을 부탁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고 이로써 뮐러 내각은 사망선고를 받는다. 그의 후임으로는 [[하인리히 브뤼닝]]이 취임한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좋지 않은 건강[* [[쓸개]]쪽이 안좋았다고 한다.]에도 뮐러는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히틀러]]와 [[나치당]]의 집권을 막고자 노력하던 와중[* 사민당 의원들에게 설사 브뤼닝 내각에 한 명의 사민당 의원이 입각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브뤼닝 내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당부했다.]에 [[1931년]] 결국 세상을 떠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Friedrichsfelde_Zentralfriedhof_03-2015_img11_Hermann_Mueller-Franken.jpg|wid=400&height=450]] [[분류:독일 제국의 정치인]][[분류: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분류:독일의 외교관]][[분류:1876년 출생]][[분류:1931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