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허훈(독립운동가)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허훈}}}[br]許薰'''}}}}}} || || '''아명''' ||허도문(許道文)[* '도덕('''{{{+1 道}}}'''德)과 문장('''{{{+1 文}}}'''章)으로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양조부 허임이 지어 준 아명이라고 한다.] || || '''자 / 호''' ||순가(舜歌) / 방산(舫山) || || '''본관''' ||[[김해 허씨]][* 판서공파-회현파(會賢派)-임은(林隱) 문중 24세 艹 항렬.] || ||<|2> '''출생''' ||[[1836년]] [[4월 14일]] || ||[[경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임은리]][br](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 ||<|2> '''사망''' ||[[1907년]] [[8월 23일]] (향년 71세)|| ||[[경상북도]] [[청송군|진보군]] 하리면 읍내동[br](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 ||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괴정2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허위(독립운동가)|허위]]의 맏형이며,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허소(정치인)|허소]]의 고조부이다. == 생애 == 1836년 4월 14일 [[경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임은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진사]] 허조(許祚, 1817 ~ ?)[* 1864년(고종 1) 증광 [[진사|진사시]]에 2등 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64_033771|입격했다]]. 사후 넷째 아들 허위가 [[의정부]] [[참찬]](정2품)에 제수되자 1904년 8월 7일 의정부 참찬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8A_07A_00080_2006_200_XML|추증되었다]].]와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임은 문중의 종손인 5촌 당숙 허정(許𥘺, 1814 ~ 1890. 2. 4)에 입양되었다. 조부는 허운(許𠎉, 1789 ~ 1870. 10. 26)으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막내 동생 [[허위(독립운동가)|허위]]가 1904년 의정부 참찬에 제수되자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8A_07A_00080_2006_200_XML|추증되었고]], 양조부 허임(許恁, 1782 ~ 1855. 1. 4)은 1813년([[순조]] 13) 증광 [[진사|진사시]]에 3등 1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13_028905|입격했다]]. 증조부 허돈(許暾)은 선산군 임은동 입향조로서 1810년([[순조]] 10) 식년 [[생원|생원시]]에 3등 4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10_028630|입격했다]]. 마찬가지로 허위가 참찬에 제수된 뒤 장례원 좌장례(左掌禮)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8A_07A_00080_2006_200_XML|추증되었다]]. 그는 일찍이 양조부 허임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22세 되던 1857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 낙방했고, 그 길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그런데 [[https://sjw.history.go.kr/id/SJW-J12030260-02200|1861년 3월 26일 승정원일기 기사]]에 따르면, 1859년 증광 [[생원]]·[[진사]]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2&docId=562139&categoryId=46622|진시장]](陳試狀)을 제출해 1861년 식년 사마시 복시(覆試)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유예]]를 허가받은 기록이 있다. 상을 당해 기년복(朞年服:2촌 또는 3촌 친척의 장례 때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하고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같은 해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이 진시장을 제출해 유예를 허가받을 수 있다.] 장인 [[연안 이씨]] 이봉기(李鳳基)의 계속된 권유에도 번번이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29살 되던 1864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2&docId=527534&categoryId=46622|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성호 이익]], [[안정복]],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49&docId=570952&categoryId=46649|황덕길]](黃德吉), 허전 등으로 이어진 [[성호학파]]의 [[실학]]을 배워 그 학통을 이었다. 1867년에는 [[김천시|개령현]] 남면 지천(芝泉) 방암산(舫巖山) 아래로 이주해 호를 방산(舫山)이라 짓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도를 피해 [[청송군|진보현]] 북면 흥구리(현 [[영양군]] [[입암면(영양)|입암면]] 흥구리) 비봉산 아래로 이주해 은거했다. 그해 경상도 위무사(慰撫使)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36079&categoryId=46623|이중하]](李重夏)의 장계를 통해 행실이 훌륭하다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1_12A_27A_00070_2004_167_XML|천거되기도 했다]]. 그 뒤 1895년 막내 동생 허위가 경상북도 진보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우부면 내리(현 [[김해시]] [[내동(김해)|내동]])에 있던 경운재(慶雲齋)[* 현재 이 위치에는 1956년 건립된 [[https://naver.me/Fbup5OhC|수인사]](修仁寺)가 [[https://www.gimhae.go.kr/00954/01200/02433.web|있다]].] 소속 재산 및 선산군 소재 자신의 소유 전답 3,000여 마지기를 매각했고, 이 대금의 전액을 허위에게 군자금으로 제공했다. 그리고나서 "盡心竭力(진심갈력)하여 危難(위난)할 때 報國(보국)하라"는 편지로 허위의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 이듬해인 1896년 4월에는 [[안동시|안동부]]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진보향교에서 '진보의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시|안동군]]·[[영덕군|영해군]]·[[청송군]]·[[영양군]]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종의 해산 조칙으로 해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뒤 낙향해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에 남덕정(覽德亭)을 짓고 '간운헌(看雲軒)'이라는 현판을 걸고서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80829.010130729280001|은거했다]]. 1902년 7월 24일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7A_24A_00100_2006_193_XML|임용되었으나]], 8월 1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8A_11A_00050_2006_194_XML|사직했다]]. 1904년 4월 5일에는 [[경기전]] [[참봉]]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4A_05A_00090_2006_199_XML|임명되었으나]] 다음날인 6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4A_06A_00040_2006_199_XML|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07년 [[도산서원]] 및 [[병산서원]]의 원장을 두루 지내다가 그해 8월 23일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 남덕정에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허씨]][[분류:1836년 출생]][[분류:190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