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프란시스코 바라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파일:444891.jpg|width=100%]]|| ||<:><-2>2004년, 말년의 모습|| ||<:>'''{{{#white 이름}}}'''||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판쵸" 바라요[br]Francisco Antonio "Pancho" Varallo || ||<:>'''{{{#white 국적}}}'''||[[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25]] [[아르헨티나]] || ||<:>'''{{{#white 출생}}}'''||[[1910년]] [[2월 5일]] || ||<:>'''{{{#white 사망}}}'''||[[2010년]] [[8월 30일]] '''(향년 100세)''' || ||<:>'''{{{#white 신체}}}'''||170cm, 70kg || ||<:>'''{{{#white 포지션}}}'''||인사이드 라이트[* 현재의 포지션으로는 섀도우 스트라이커 또는 공격형 미드필더] || ||<:>'''{{{#white 등번호}}}'''||없음[*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white 소속팀}}}'''||힘나시아 라플라타 (1929~1930)[br]→ {{{-1 [[벨레스 사르스필드]] (1930~1931 / 임대)}}}[br][[CA 보카 주니어스]] (1931~1940) || ||<:>'''{{{#white 국가대표}}}'''||16경기 7골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1930~1937)^^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www.insidefutbol.com/FranciscoVaralloWiki.jpg|width=100%]]|| ||<:>젊은 시절의 프란시스코 바라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초대 월드컵인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와 [[1937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아르헨티나|193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에 참가했고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이다. 초대 월드컵 참가자 중 최후의 생존자로도 유명하다. == 생애 == === 어린 시절 & 데뷔 무렵 === 프란시스코 바라요는 1910년 2월 5일, 라플라타의 로스 오르노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드로와 어머니 테레사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런 그를 판초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그는 이 별명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1928년, 당시 18살의 바라요는 3개의 클럽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 중 고향팀인 [[클루브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힘나시아 라플라타]]를 선택했고 3부 리그 팀과의 데뷔전에서 상대를 말 그대로 초전박살을 냈다. 팀이 무려 8골을 넣은 것. 바라요는 이 활약으로 1주일 만에 1군 무대에 서게 되었다. 1929년 시즌에 데뷔한 바라요는 신예답지 않은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초대 월드컵]] === 초대 월드컵 개최 당시 프란시스코 바라요는 힘나시아 라플라타가 1929년 시즌에 아르헨티나 리그를 제패할 때 가능성을 보였던 어린 선수였고,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당시에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다. 그는 팀의 첫 경기였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전에 선발 출전하였고 다음 경기인 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전에서 한 골을 넣었다. 다음 두 경기에는 부상으로 선발 명단에 들지는 못했지만 결승전에서도 선발 출전했다. 즉, 경험을 쌓기 위해 명단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한마디로 [[김희진(배구선수)|나이는 어렸지만 유망주가 아니었고]] 정식 선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 이후 선수생활 === 1930년 말과 1931년 초에는 잠시 [[벨레스 사르스필드]]의 투어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는 벨레스 팀과 함께 25경기를 뛰었으며 20승을 거두었고 14골을 집어넣는 활약을 보였다. 이런 젊은 공격수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뜨거웠다. 아르헨티나의 다른 클럽들은 물론이고 물건너 [[제노아 CFC|제노아]]와 [[SSC 나폴리|나폴리]] 등 [[세리에 A|이탈리아]]의 팀들도 영입 전쟁에 나섰다. 돈은 이탈리아 클럽들이 더 불렀지만 [[부모님]]의 설득이 주효했다. 결국 1931년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한 바라요는 이적료로 대략 8000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에 [[베르나베 페레이라]]가 23,000파운드의 이적료로 [[CA 리버 플레이트]]에 이적했다. 이 때 기록된 23,000파운드는 1952년까지 20년 동안 최고 이적료였다]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그는 한 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데뷔 시즌에 득점 3위를 차지하여 성공적으로 보카에 적응하였다. 1934년에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1934년 호키 컵에서는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라싱 클루브]]를 상대로 6골을 넣기도 했다] 팀도 리그에서 [[승승장구]]했다. 210경기에서 181골을 넣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181골은 아직도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득점 기록이다.[* 초대 월드컵에서 불안발작증세 때문에 경기를 많이 못 뛰었던 [[로베르토 체로]]가 그의 동료였다. 체로는 보카 주니어스의 통산 득점 기록에서 바라요의 바로 위에 있고, 1위는 [[마르틴 팔레르모]]이다. 그리고 [[펠레]]나 [[게르트 뮐러]], [[리오넬 메시]] 같은 놈이 미친 거지 이 기록도 충분히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지역 라이벌인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던 [[앙헬 라브루나]]의 통산 득점 기록이 293골이라 묻히는 감도 있다] 1937년에는 그의 커리어에서 최초로 [[1937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아르헨티나|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국제 대회의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듬해에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게 되었고 그 이후의 커리어는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국 1939년에 라이벌 [[CA 리버 플레이트]]를 상대로 마지막 득점을 기록했고 결국, 30살의 젊은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바라요가 활약하던 기간 동안 로베르토 체로와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 바라요 3명이 기록한 통산 득점은 499골에 달한다. === 최후의 생존자 === 보카 주니어스에서 2군 감독과 친정팀 힘나시아의 수석 코치 생활 이후 한동안 잊혔던 바라요는 1994년에 다시 재조명되었는데 [[FIFA]]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인 Order of Merit를 받았기 때문이다. 2008년, [[마르틴 팔레르모]]가 그의 기록을 넘고 [[로베르토 체로]]의 기록까지 넘어 [[CA 보카 주니어스]]의 역대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가 되었을 때에는 팔레르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등 정정한 활동을 했고, 2010년 2월 5일. 그의 100번째 생일에는 조국 [[아르헨티나]]는 물론 결승전의 상대였던 [[우루과이]]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었다. 그 때 FIFA의 주관으로 진행되었던 인터뷰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으로는 당연하게도 초대 월드컵 결승전의 패배를 꼽았다. ||[[파일:attachment/francisco-varallo-e-homenageado-na-argentina-1266464550372_300x300.jpg]]|| || 프란시스코 바라요의 100번째 생일 || 그리고 같은 해인 8월 30일 그의 고향 라플라타에서 천수를 다했고, [[FIFA]] 회장 [[제프 블라터]]와 남미 축구협회장 니콜라스 레오스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향년 100살 반, 개월 수로 무려 생후 1206개월이 된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단단한 체구와 좋은 컨트롤, 그러면서 민첩한 몸놀림으로 수비진의 빈틈을 파고드는 플레이를 펼쳤다. 또한 강력한 슈팅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별명이 Cañoncito. 작은 대포였다. [[페널티 킥]]에도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통산 22회의 페널티 킥 시도 중 18회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유리몸인게 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상술한대로 그는 30살에 은퇴해야 했다. == 뒷이야기 == * 바라요는 초대 월드컵 결승전의 선수 선발과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의 게임 방식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 월드컵의 마지막 시합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내 포지션인 인사이드 라이트만 다섯 명이 나왔고… 감독은 추첨을 통해 나를 남겨놨죠.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친 경기였어요. 그들은 오만에 가득차서 저희를 가격했죠. 최악은 그 상황에서 몇몇 동료들이 나태해지고 환경에 겁을 먹었다는 겁니다. 전반에는 쉽게 풀어갔지만 어떻게든 이길 수는 없는 싸움이었어요. 마치 10명이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를 줄 수 없었어요. >---- >프란시스코 바라요[* 출처: El récord es de Varallo] * 1931년 9월의 수페르클라시코 역시 인구에 회자되는 시합 중 하나이다. 주심의 [[페널티 킥]] 선언에 불만을 품었던 [[CA 리버 플레이트]]의 선수들이 단체로 반발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 그 와중에 당시 리버의 골키퍼 이리바렌은 그에게 도전하던 3명의 선수와 싸우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 수상 == === 클럽 ===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4회: 1929(힘나시아), 1931, 1934, 1935(이상 [[CA 보카 주니어스]])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3 LAF([[CA 보카 주니어스]]) === 국가대표 === * [[FIFA 월드컵]] 준우승: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1930]] * [[CONMEBOL 코파 아메리카|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1937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아르헨티나|1937]] === 개인 ===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회: 1934 * FIFA Order of Merit: 1994 * 남미 Order of Merit: 2006 [각주] [[분류:1910년 출생]][[분류:1929년 데뷔]][[분류:1940년 은퇴]][[분류:라플라타 출신 인물]][[분류:2010년 사망]][[분류: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분류:힘나시아 LP/은퇴, 이적]][[분류:CA 벨레스 사르스필드/은퇴, 이적]][[분류:CA 보카 주니어스/은퇴, 이적]][[분류:아르헨티나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참가 선수]][[분류:아르헨티나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분류:1937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