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로마 제국의 근위대장]] || '''이름''' ||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br](Publius Acilius Attianus) || ||<|2> '''출생''' || 미상 || || [[이베리아반도|히스파니아]] 이탈리카 || || '''사망''' || 미상 || || '''직위''' || 근위대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장]]. [[트라야누스]] 황제의 경호를 맡았으며, 트라야누스가 사망할 때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와 함께 [[하드리아누스]]의 황위 계승에 일조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잠재적인 황위 경쟁자들을 제거했다가 세간의 비난을 피하려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오명을 뒤집어쓰고 근위대장에서 물러났다. == 행적 == 히스파니아 [[속주]]의 이탈리카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로마인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에퀴테스]]로 활동했다. 그는 엘바 섬에 저택과 별장을 소유했으며, 라티움의 부유층 로마인들에게 인기있는 휴양지인 프라에네스터 인근에 거주했다. 이 사실은 에트루리아 해안가에서 그가 헤라클레스에게 헌정한 비문이 발견되면서 확인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이며 같은 고향 사람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와 친분이 있었다. 86년 아페르가 사망했을 때, 어린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으로 사촌 [[트라야누스]]와 그를 지명했다.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여 하드리아누스를 돌봐줬다. 하드리아누스가 장성하여 107년 하 판노니아 총독을 맡았을 때 부관으로서 보좌했다. 이후 112년에서 114년 사이에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시밀리스와 공동으로, 또는 시밀리스가 근위대장 직을 사임한 직후 근위대장에 부임할 때까지의 경력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트라야누스의 추종자로서 귀중한 조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근위대장에 발탁된 뒤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고, 트라야누스가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의 여파로 파르티아 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실의에 빠진 채 귀국길에 오를 때 동행했다. 117년 8월 트라야누스가 킬리키아의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했을 때,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가 하드리아누스의 황위 계승을 추진하는 걸 도왔다. 그 후 118년 로마로 돌아가서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99년과 109년 [[집정관]]], 루키우스 푸블릴리우스 켈수스[* 102년과 113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 110년 집정관, 현직 [[다키아]] 총독], 그리고 [[루시우스 퀴에투스]][*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과 [[제2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맹활약한 [[명장]]]를 [[네 명의 집정관 사건|새 황제 암살 음모 또는 국가 전복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처형했다.]] 이러한 처형은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이뤄졌는데, 정황상 아티아누스가 의원들에게 "황제의 뜻이니 집행하라"고 종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대중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자, 하드리아누스는 민심을 수습할 필요성을 느꼈다. 더욱이 아티아누스의 권세가 위험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119년 아티아누스가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네 명을 죽여버렸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근위대장 직을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그 대신 원로원 의원직을 유지하게 해주고 오르나멘타 콘술라리아(ornamenta consularia)[* 집정관현장]의 영예를 수여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