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기원전 236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br]{{{-1 [[라틴어]]: Quintus Lutatius Cerco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36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키툴루스(조부)[br]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br][[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242년 집정관)|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형제)[br]그나이우스 루타티우스 케르코(손자?)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41년 || ||<#800080> {{{#ffffff '''전임''' }}}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242년 집정관)|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br][[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42년 집정관)|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 ||<#800080> {{{#ffffff '''후임''' }}}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br][[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라티움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부유한 평민 집안인 루타티우스 씨족 출신이지만, 그가 집정관에 오르기 전에는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242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242년 집정관)|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있었다. 기원전 241년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엔 2차례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첫번째로, [[테베레강]]이 폭우로 인해 범람하면서 도시의 저지대 전역이 물에 잠겼다. 그 후 도시 전역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는데, [[베스타]] 신전 역시 화마에 휩쓸렸고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고있던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기원전 251년 집정관)|루키우스 메텔루스]]가 신전 내부로 들어가 그곳에 안장되어 있던 유물을 모두 챙겨 바깥으로 빼냈다. 그는 이 일련의 사건에 심란해져 행운의 여신을 모신 신전에 신탁을 요청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해 초, 에트루리아 남동부의 팔리스키인들이 반란을 일으켯다. 그는 동료 집정관 아티쿠스와 함께 진압에 착수해 6일만에 진압하고 15,000명을 사살했다. 이후 팔리스키인들이 가지고 있던 영토의 절반을 로마로 귀속시켰으며, 로마로 귀환한 뒤 동료 집정관과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얼마 후 형제 카툴루스가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 카르타고 당국과 평화 협상을 논의한 끝에 '루타티우스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민회에서는 장장 23년간 치른 전쟁이었는데 얻은 게 얼마 안 된다며 거부했다. 이에 원로원은 10인 위원회를 시칠리아에 파견해 재협상하게 했는데, 케르코도 이중 한 명이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재협상 요구에 즉각 응했고, 양자는 곧 합의를 이루었다. 기원전 236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으나 그 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후손은 알려진 바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73년에 마케도니아와 이집트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그나이우스 루타티우스 케르코가 그의 손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