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최원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조소양공(趙昭襄公)[br]{{{+1 崔圓 | 최원}}}''' || || '''작호''' ||<(> 조국공(趙國公) || || '''시호''' ||<(> 소양(昭襄) || || '''성''' ||<(> 최(崔) || || '''이름''' ||<(> 원(圓) || || '''자''' ||<(> 유유(有裕) || || '''부친''' ||<(> 최경질(崔景晊) || || '''생몰''' ||<(> 705년 ~ 768년 || || '''본관''' ||<(> 패주(貝州) 무성현(武城縣) || || '''국적''' ||<(> 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유유(有裕). == 생애 == 705년에 최경질(崔景晊)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종(당)|현종]] 개원 연간[* 713년~741년]에 현종이 인재를 널리 구할 때 최원은 계략과 사책(射策)으로 갑과로 급제하여 집극(執戟)이 되었다. 최원은 글재주를 자부하였지만 무관으로 제수되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이후 소경(蕭炅)이 경조윤을 맡을 때, 최원은 소경의 천거를 받아 회창현승(會昌縣丞)이 되었고 사훈원외랑(司勛員外郞)까지 승진하였다. 뒤에 [[양국충]]이 중앙에서 검남 절도사의 사무를 보면서 최원은 다시 양국충의 천거를 받아 상서랑으로 제수되고 촉군 대도독부 좌사마로 전출되어 검남 절도유후를 맡았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촉왕 이교(李璬)에게 검남 절도사를 요령하게 하면서 최원은 절도부사가 되어 이교를 보좌하였다. 이듬해인 756년 안록산이 수도로 쳐들어오면서 현종이 촉군으로 달아날 때 최원을 촉군 대도독부 장사, 검남 절도부대사로 삼았다. 최원은 검남의 백성들을 안심시켜서 현종으로부터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되고 검남 절도사를 겸하였다. [[숙종(당)|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하자, 현종은 최원과 방관(房琯), 위견소(韋見素)에게 숙종을 보좌하도록 명하였다. 최원은 757년 숙종을 알현한 뒤에 당나라가 수도를 수복하면서 중서령으로 진위되고 조국공(趙國公)으로 책봉되었으며, 실봉 500호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재상에서 물러나 태자소사로 전임되었고 동도 유수를 맡았다. 이후 [[사사명의 난]]에서 당나라군이 상주(相州)에서 패전하면서 패전한 군사들이 낙양을 지날 때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최원은 이때 성을 버리고 양양으로 달아나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제왕(濟王)의 속관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최원은 이후 [[이광필]]에 의해 회주(懷州) 자사로 기용되고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전임되었으며 다시 분주(汾州) 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761년에 양주(揚州) 대도독부 장사, 회남(淮南) 절도관찰사로 임명되었고, 5년 동안 양주에 있다가 766년에 검교우복야(檢校右僕射) 겸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더해졌고 검교좌복야가 되어 상서성의 사무를 맡았다. 최원은 768년 병으로 사망하여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증되고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05년 출생]][[분류:768년 사망]][[분류:청하 최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