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채륜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후한서)] ||<:>[[파일:채륜.jpg]]|| 蔡倫 (50? ~ 121년) [목차] == 일생 == [[후한]]의 환관으로, 형주 계양군(현 [[후난성]] [[헝양시]])사람이며 자는 경중(敬仲)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명제(후한)|명제]] 후기에 입궁하여 [[장제(후한)|장제]] 때 소황문이 되었고, 즉위 후 중상시가 되어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상방령을 겸하였다. 원초 원년(114년)에 용정후로 봉해졌고, 이후 장락태복이 되었다. 중상시로서 [[환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명제, 장제, 화제, 안제 등 4명의 황제를 보필하였으며, [[장덕황후]] 두씨와 [[화희황후]] 등씨 등 2명의 섭정 황태후를 보좌하며 40여년간 궁성에서 봉직하였다. 이보다 몇십년 후에 나오는 [[십상시]]들의 더러운 오명과는 달리 청류파였고, 그나마 정화와 더불어 후대에도 평가가 그나마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정의 궁중암투에 깊이 개입했으며 [[화제(후한)|화제]] 시절 두황후를 지지하고 송귀인을 자살로 이끌었는데, 이후 두씨 일족이 몰락하고 송귀인의 손자인 안제가 제위에 올라 이 일을 추궁하자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사대부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는 관습이 있어 형장으로 출두하라는 사자가 가지고 온 사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 제지법 표준화 == [[상제(후한)|상제]] 원흥 원년(105년)에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 [[그물]] 등을 사용하여 최초의 [[종이]]인 채후지(蔡侯紙)[* 혹은 채륜지라고도 한다.]를 [[발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채후지는 당대 중국에 존재하던 제지 기술을 개량하고 체계화하여 실용적인 목적으로 생산한 종이로써, 당대에 높이 평가 받았다. 채륜이 정립한 제지법은 후대에 [[종이]]를 만드는 표준 방법이 되었고, 한나라에서 세계 각지로 전해졌다.[*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History of Technology, 1996.] == 여담 ==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전한]] 시대의 [[사마천]], 명나라의 [[정화(명나라)|정화]]와 함께 유능한 환관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삼국지연의]] 초반에 [[원소(삼국지)|원소]]가 명환관의 예로 태사공(사마천)과 용정후를 언급하는데, 여기서 용정후가 바로 이 사람. 이 외에 채륜과 같은 청류파 환관은 후한 말에 [[여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분류:중국의 발명가]][[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환관]][[분류:헝양시 출신 인물]][[분류:50년 출생]][[분류:121년 사망]][[분류: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독살형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