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찐주이다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목차] == 개요 == '''찐주이다이'''(Trịnh Duy Đại / 鄭惟岱 / 정유대, ? ~ [[1517년]])는 [[대월]] [[후 레 왕조]]의 대신이다. == 생애 == 청화부(淸化府) 수춘현(壽春縣) 사람으로, 후 레 왕조의 개국공신인 찐칵푹(鄭克復)의 후예이다. [[레 위목제]] 때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다. [[1509년]], [[레 양익제]]가 위목제를 폐하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찐주이다이는 양익제를 지지하여 그 공으로 문군공(文郡公)에 봉해졌다. [[1516년]], 찐주이다이의 동생 [[찐주이산]]이 양익제를 죽이고 [[레꽝찌]]를 옹립하였다. 안화후(安和侯) [[응우옌호앙주]]가 보제진(菩提津)에서 거병하여 [[하노이|탕롱]]을 위협하며 찐주이산이 양익제를 시해한 죄를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3일 후, 찐주이다이는 레꽝찌를 협박하여 서도(西都)로 데리고 왔고, 찐주이산은 탕롱에서 따로 [[레 소종]]을 옹립하였다. 오래지 않아 찐주이다이는 서도에서 레꽝찌와 그의 두 동생을 죽였다. 쩐까오의 난이 평정된 뒤 응우옌호앙주와 영흥후(永興侯) [[찐뚜이]]는 함께 탕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자 찐주이다이와 평군공(平郡公) 응우옌반르(阮文慮)는 함께 궁중에 들어가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할 것을 소종에게 주청하였다. 그러나 응우옌반르가 돌연 소매 속에서 밀조를 꺼내어 찐주이다이와 찐뚜이가 모반하였다고 아뢰었다. 찐주이다이는 현장에서 체포된 뒤 우도독(右都督) 레익쑤엇(黎益齣)과 함께 참수당했고, 그 머리가 철산백(鐵山伯) [[쩐쩐]]의 군영 바깥에 내걸렸다. 이후 응우옌호앙주가 병사를 내어 찐뚜이를 탕롱에서 쫓아냈다. [[분류:베트남의 정치인]][[분류:1517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