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지그문트 폰 프랑크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1821년 출생]][[분류:1888년 사망]][[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의 남작]] [include(틀:1870~1880년대의 독일제국군/북독일 연방의 장성급 장교)] |||| '''{{{#fff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br]{{{+1 지그문트 폰 프랑크}}}[br]Siegmund von Pranckh }}}'''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440px-Kriegsminister_von_Pranckh.jpg|width=100%]]}}} || ||<#666> {{{#FFF 이름}}} ||'''Siegmund Freiherr von Pranckh'''[br]지그문트 폰 프랑크 남작[*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프랑크'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 ||<#666> {{{#FFF 출생}}} ||[[1821년]] [[7월 16일]] [[바이에른 왕국]] || ||<#666> {{{#FFF 사망}}} ||[[1888년]] [[5월 8일]](향년 66세) [[독일 제국]]|| ||<#666> {{{#FFF 복무}}} ||[[바이에른 왕국군]](1840년~1871년)[br][[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width=25]] [[독일 제국군]](1871년 ~ 1876년) || ||<#666> {{{#FFF 최종계급}}} ||[[파일:General_(Wurttenburg).gif|width=35px]]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666> {{{#FFF 주요참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br][[프로이센-프랑스 전쟁]]|| ||<#666> {{{#FFF 서훈}}} ||1871년 제정 2등급 철십자 훈장|| [목차] [clearfix] == 개요 == 지그문트 폰 프랑크는 [[바이에른 왕국군]]의 군인이자, 독일 제국군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보병대장이다. == 생애 == 1821년, 지그문트 폰 프랑크는 [[바이에른 왕국]]의 남작가에서 태어났다. 1840년 생도로서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소위로 임관을 받고, 1849년 대위 계급장을 달고, 병참장교가 되었다. 이후 국방부에서 복무하다, 1865년 연대장이 되었다. 프랑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상대로 싸웠지만, 바이에른 왕국군의 한계를 느꼈다. 이는 당시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도 느꼈다.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는 전투 경험으로 다져진 장군을 전쟁장관으로 앉히고 싶었고, 프랑크는 그의 기준에 맞았다. 프랑크는 1868년, 바이에른 왕국군에 아주 큰 변화를 가지고 왔다. 징병 관련하여 세가지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첫번째, 징병을 피하려는 행위를 막았으며, 두번째,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바꿨으며[* 3년 복무제], 세번째 1년 복무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예비군이라는 개념을 없앴으며, 뮌헨에 제1바이에른 왕립 군단[* 루트비히 폰 운트 추 데어 탄라트잔하우젠이 지휘], 뷔르츠부르크에 제2바이에른 왕립 군단을[* 야코프 폰 하르트만이 지휘] 만들어 배치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생도 군단을 고등학교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 왕국군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크는 심각하게 피해를 받은 병력의 보충과 식량배급에 초점을 맞추었다. 프랑크는 프랑크푸르트 조약 체결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에는 바이에른 왕국이 북독일 연방에 소속되는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00,000 탈러를 받았다. 1872년 프랑크는 또 한번 바이에른 왕국군에 개혁을 가져왔고, 1875년 전쟁장관 자리를 요제프 막시밀리안 폰 메일링거에게 넘겨주고 1876년 전역하였고, 1888년 사망하였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