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종초객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1 宗楚客[br]종초객}}}''' || || '''작호''' ||영국공(郢國公) || || '''성''' ||종(宗) || || '''이름''' ||초객(楚客) || || '''자''' ||숙오(叔敖) || || '''생몰''' ||? ~ 710년 || || '''본적''' ||포주(蒲州) 하동현(河東縣) || || '''부친''' ||종급(宗岌) || || '''형제''' ||종진객(宗秦客), 종진경(宗晉卿)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권신. 자는 숙오(叔敖)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705년에 발생한 궁중 쿠데타인 [[신룡정변]] 이전까지 종초객의 행보는 관직의 부침이 있었다. 종초객의 조상은 본디 남양(南陽) 출신으로, 종초객의 증조부인 종비(宗丕)가 [[후량(남북조시대)|후량]]에서 남홍농 태수를 맡았다가 후량이 멸망하고 [[수나라]]로 들어가면서 분음(汾陰)에 살면서 포주(蒲州) 출신이 되었다. 종초객은 종급(宗岌)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종초객의 어머니는 [[측천무후]]의 사촌언니였다. 종초객은 진사로 급제하여, 관직이 호부시랑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형인 종진객(宗秦客), 아우인 종진경(宗晉卿)과 함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유배되었고, 종진객이 죽은 뒤에 유배지에서 돌아왔다. 종초객이 병부원외랑으로 있을 때 돌궐의 답실력토돈(沓實力吐敦)이 항복했는데, 그의 부락은 평하(平夏)에 있었다. 그런데 답실력토돈이 배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종초객은 답실력토돈이 충성스럽고 올곧으며 온화하고 돈후한 인물이므로 배반할 리가 없다고 말한 반면, 답실력토돈의 조카인 답실력묵자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답실력토돈과 사이가 좋지 않음은 물론 무능하다고 언급했다. 과연 답실력묵자는 답실력토돈에게 사로잡혔다. 종초객은 이후 하관시랑, 동봉각난대평장사로 임명되었지만 [[무의종]]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관사를 지을 때 지나치게 사치를 부려서 무의종에게 탄핵을 받아, 문창좌승에서 파주(播州) 사마로 좌천되었다. 종초객은 이후 예주(豫州) 장사, 소부소감(少府少監), 기주(岐州)와 합주(陜州)의 자사 등을 역임하다가 704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하관시랑, 동봉각난대평장사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소왕(邵王)의 기녀에게 장가를 든 것에 연루되어 원주(原州) 도독으로 좌천되었다. === 권신으로서의 행보 === 신룡정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종초객의 권신 행보가 시작된다. 종초객은 신룡정변 이후 영국공(郢國公)으로 책봉되고 태복경으로 임명되었다. 신룡정변 이후 무삼사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종초객을 병부상서로 천거하면서, 종초객은 [[무삼사]]의 측근이 되었다. 707년, 무삼사의 행보를 보다못한 [[중종(당)|중종]]의 태자 [[절민태자|이중준]]은 쿠데타를 일으켜 무삼사, [[무숭훈]] 일파를 살해하였으나,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살해에는 실패하여 호현으로 달아났다가 부하에 의해 살해당했다. 종초객은 위황후와 안락공주에게 이중준의 목을 가지고 무삼사와 무숭훈의 관에 제사를 올리도록 부추겼고, 이로 인해 종초객은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신임을 받았다. 종초객은 또한 기처눌(紀處訥)과 함께 붕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종초객과 기처눌에 대해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종기(宗紀)라 부르기도 했다. 708년 [[당중종|중종]]이 돌기시의 사갈(娑葛)을 금하군왕(金河郡王)으로 책봉하려 하자, 아사나충절(阿史那忠節)이 사갈에 대해 불만을 품고 종초객과 기처눌에게 [[뇌물]]을 주어 사갈의 금하군왕 책봉을 저지했다. 사갈은 여기에 대해 분노하여 [[당나라]]를 계속 공격하였는데, 감찰어사인 최완은 "당나라의 서쪽 변경이 위험해진 것은 종초객과 기처눌 때문"이라며 그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대신들을 중재해야 하는 중종은 최완의 탄핵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기보다는, 최완과 종초객을 불러 두 사람에게 술을 주고 형제의 맹약을 맺게 해서 화해시켰다. 그 때문인지 중종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화사천자(和事天子)로 불렸다. 종초객은 이후 중서령까지 올라갔다. === 최후 === 종초객은 비록 겉으로는 [[위황후]]에게 의지했지만, 속으로는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를 배신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종초객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지 못했다. 710년에 [[위황후]]와 [[안락공주]]가 중종을 독살하고 [[이중무]]를 제위에 앉힌 뒤에 중종의 동생인 상왕 이단(5대 황제인 [[예종(당)|예종]])을 제거하려고 하자, 예종의 아들인 임치왕 [[이융기]]가 위황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당륭정변|궁중 쿠데타]]를 일으켰다. 종초객은 이때 위황후, 안락공주, 종진경과 함께 살해되어 결국 최후를 맞이한다. == 가족관계 == * 증조부: 종비(宗丕) * 조부: 종명(宗明) * 부친: 종급(宗岌) * 장남 종진객(宗秦客) * 차남 '''종초객''' * 삼남 종진경(宗晉卿) * 사남 종정경(宗鄭卿)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10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