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조천만세운동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 [youtube(ebx5tJapgj4)] || [목차] == 소개 ==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전라남도]] [[제주도(일제강점기)|제주도]]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시작하여 4차에 걸쳐 일어난 독립운동. [[법정사항일운동]], [[제주해녀항일운동]]과 함께 제주의 3대 독립운동 으로 불린다. == 조천 만세운동 == [[1919년]] [[3월 16일]] 당시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기미독립선언서|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에게 [[3·1운동]]의 상황을 이야기 하였으며 이를 들은 김시범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제주의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운동을 방의·동지를 규합하였으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 1차 만세운동 === 3월 21일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에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형범·김연배·황진식·김용찬·백응선·김장환·[[박두규]]·이문천·김희수·김경희·김필원 등의 14인 동지와 김순탁·김시희·김백능·부병각·김종호·한석영·한석화·심동인·한백흥 등 모두 23인의 거사동지, 그리고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서당 생도 등 약 150여명이 모였다. 김필원의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천지서 서쪽에서 미밋동산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본 주민 500여명이 동참하였다. 오후 3시경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 성내까지 행진키로 하였으나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 충돌로 3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김시범과 김시은 등 13인이 체포되었다. === 2차 만세운동 === 3월 22일에는 조천리 장터에서 백은선·[[박두규]] 등의 지도로 약 200여명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신촌리를 향하여 행진하였으나,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박두규와 김필원 등이 연행되면서 해산하게 되었다. === 3차 만세운동 === 3월 23일에는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3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위에서 이문천은 약100여명을 이끌고 함덕리로 행진을 하였으며 시위대가 함덕리에 이르자 약 800여명으로 늘어나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 3차 만세동산으로 이문천과 백응선 등 8명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 4차 만세운동 === 4차 만세운동은 3월 24일 조천의 오일장 날을 기하여 일어났다. 이날은 김연배를 중심으로 약 1천5백여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에는 장을 보러 나온 부녀자들도 상당수가 합세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김연배 등 시위를 주도하던 4인이 체포되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 의의 == 조천만세운동은 함덕·신촌·신흥 등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귀포 등지로도 확산되었고 이후 제주지역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이 모태가 되어 항일운동의 일선에 나선 제주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문서 출처: 제주항일기념관 [[분류:1919년 시위]][[분류:3.1 운동]][[분류:제주특별자치도의 역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