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조민수(고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1391년 사망]][[분류:문하시중]][[분류:창녕 조씨]][[분류:고려의 군인]] [include(틀:고려의 문하시중)] [include(틀:고려사)] [목차] [clearfix] == 개요 == [[曺]][[敏]][[修]] (? ~ 1391년 1월 27일[* 음력 1390년 12월 22일]) [[고려]] 말기의 무신. == 생애 == 본관은 [[창녕 조씨]]이다.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기골과 용모가 뛰어나 큰 인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삼과 동시에 살이 낀 관상으로 요절이 점쳐져서 아깝다는 예언을 들었다 한다. [[공민왕]] 때 [[순천시|순천]] 수령[* 순주 부사]으로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봉해졌고, 이후 전리판서[* 정3품], 동지밀직사사[* 종2품] 등을 역임하고 충근보리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어머니가 성주 이씨로 조민수는 당대의 권신 [[이인임]]과 6촌 관계가 되는데 당상관이 되어 [[개성시|개경]]에 자리를 잡게 되지만 당시 실세인 임견미 등에게 밀려 존재감이 없었다. 이인임의 인척 지간이기는 해도 촌수도 멀고 집안 자체가 큰 권세가까지는 아니었을 뿐더러 그렇다고 신흥 세력인 [[염흥방]], [[임견미]]처럼 악착스럽지도 않았다. 이인임의 인척 중에도 유학자 [[이숭인]]처럼 [[권문세족]]들을 [[태조(조선)|이성계]] 등이 혁파하려던 데는 하나같이 저항했지만 권세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은 분명 있었다. [[우왕]] 때 [[경상도]] 도순무사[* 정3품]를 지내 [[김해시|김해]], [[대구광역시|대구]] 등에서는 [[왜구]]에게 패했으며 [[밀양시|밀성]]과 [[산청군|청수역]]에서는 이겨 의복, 술, 말을 하사받았다. 이후 지문하부사[* 종2품]로 서북면 도체찰사로 나갔는데 당시 [[명나라]] 정요위 도사였던 고 모씨가 [[나하추]]와 [[북원]]이 고려에 접근하는지 부하들을 장사꾼으로 변장시켜 정탐하다가 조민수에게 들켰다. 명나라의 군사들을 꾸짖어 쫓은 그에게 당시 친원 노선을 모색하던 우왕이 기뻐하면서 수시중 자리[* 2인자 자리]를 권했지만 자신의 공에 비해 너무 높은 자리라고 사양했다. 우왕은 억지로라도 앉힐 것처럼 굴었지만 조민수가 중앙군 유지비 부족 및 거듭된 흉년으로 구휼미까지 바닥나는 사태에 사급전, 구분전, 사사전[* [[절(불교)|절]] 소유 토지]의 [[조세]]를 국가에서 거두라는 내용을 보고 떨떠름해한다. 상소는 임견미 등 권문세족과 [[불교]] 측의 불만을 샀는데 우왕은 개혁을 추진할 힘도 의지도 없었으며 조민수의 사양을 받아들이는 대신 창성부원군에 봉하고 판문하부사를 내렸다. 우왕의 [[요동]] 원정군에 좌군도통사[* 요동 정벌 때 이성계보다 위인 좌군통제사다 보니 의문이 생기는데 일반적으로는 이성계에 대한 견제책으로 본다. [[조선]] 왕조에서 조민수의 존재감을 깎아내렸다는 의심도 할 수는 있으나 실증할 방법은 없으며 군공을 세운 베테랑으로 당대에 위상이 있던 인물로 추측된다.]로 임명되지만 거꾸로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다. [[쿠데타]]에 성공하자 조정 수반인 좌시중에 임명되었으나 [[창왕]] 옹립 문제로 우시중 이성계와 갈등을 빚었다. 당시 세력 확대를 꾀한 것인지 인척 이인임을 불러들이자 건의했으나 이인임이 이미 죽어 실패했다. 그럼에도 결국 [[이색(고려)|이색]], [[이숭인]] 등과 연합해 창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고 이성계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조선)|조준]]의 [[탄핵]]으로 부정부패가 드러나 [[창녕군|창녕]]으로 유배됐다.[* 사실 이렇게 유배된 것 자체가 이성계 세력과의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창왕은 조민수의 유배 당시 즉위 초라 [[간신]]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며 자신의 본의가 아님을 밝혔다. 창왕은 생일 특사로 조민수를 석방하기도 했는데 풀려난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창왕이 [[신(성씨)|신씨]]라 하여 폐위되고 조민수는 창왕을 옹립한 죄로 또 유배를 갔다.] 얼마 후 창왕도 폐위되고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대에 이르러 결국 유배지 [[창녕군|창녕]]에서 사망한다. == 대중매체에서 == [[사극]]에서는 [[위화도 회군]]과 숙청당할 때만 잠깐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이전의 군 경력이 설명이 안되다 보니 [[요동정벌]]군 편성 때 [[태조(조선)|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로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뭔데 이성계와 맞먹는 이런 고위직에 오르는지 뜬금없는 인상을 줄 때가 많다. 덕분에 이성계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가장 존재감이 떨어지고 인물 성격도 설정이 안되기에 흔한 부패관원 정도로 묘사된다.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드라마)|개국]]>에서는 배우 [[신종섭]]이 연기했다.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배우 [[박영태]]가 연기했다. * 1994년 KBS 역사다큐 <역사의 라이벌> 위화도 회군 - 최영과 이성계 편에서는 배우 [[박용식]]이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박종관(배우)|박종관]][* 1999년 [[MBC]] 드라마 <[[허준(드라마)|허준]]>에서는 정작 역, 2006년 MBC 드라마 <[[주몽(드라마)|주몽]]>에서는 송양 역.]이 연기했다. [[우왕]] 폐위 이후 즉위시킬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정몽주]], [[이색(고려)|이색]]과 의견을 나누는 역할이 자주 나오는데 정치적으로 [[이성계(용의 눈물)|이성계]]를 견제하는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왕실에 충성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을 이야기하며 충성심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 2012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배우 [[이석준]]이 연기했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배우 [[김주영(1952)|김주영]]이 연기했다. 정도전이 조민수를 숙청하는데 공교롭게도 정도전 역의 배우 [[조재현]]은 조민수와 같은 [[창녕 조씨]]이다. [[조민수(정도전)|문서]] 참고.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최종환(배우)|최종환]][*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정몽주(태종 이방원)|정몽주]] 역.]이 연기했다. 이성계를 도화전 연회에 불러 죽이려다 가노 대근의 실수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는 설정인데 연회와 조민수에 대한 설정, 가노 대근 모두 픽션이다. [[조민수(육룡이 나르샤)|문서]] 참고.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박상조]][*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은부]] 역,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이종무]] 역.]가 연기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에서 등장한다. [[위화도 회군]] 당시 [[최영]]과 [[우왕]]이 회군을 해서는 안된다는 보고를 받고는 곧바로 [[이성계]]의 군진으로 들어가서 위화도 회군을 함께 하였다. 이후 최영이 죽은 뒤 우왕은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 우시중에 임명하고 내시 80명을 무장시켜 이성계와 조민수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하자 폐위되어 유배된다. 이후 이성계가 회군 때 [[창왕|금상의 자식]]이 아닌 [[공양왕|다른 종친]]을 후계로 세우자고 약속 했었는데 좌시중이 된 후 욕심이 생겼는지 약속과는 다르게 [[이색(고려)|이색]]과 함께 대비의 힘을 빌려 [[창왕]]을 옹립한다. 이후 [[조준(조선)|조준]]이 조민수가 땅 욕심을 부렸다고 탄핵하자 창왕은 조민수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를 보내버리면서 등장 종료.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