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제17대 대통령 선거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시에 진행된 선거, rd1=2007년 재보궐선거 , paragraph1=3)] [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 ||<-4> {{{+1 {{{#ffffff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 ||<-4>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netfing.com/7f56925928bf67fee2b3c532aa65d88a.jpg|width=100%]][br]{{{-2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 ||<-4> {{{#!wiki style="margin: -7px -12px;" || {{{-2 [[2002년]] [[12월 19일]]}}}[br][[제16대 대통령 선거|16대 대선]] || → || {{{-2 [[2007년]] [[12월 19일]]}}}[br]'''17대 대선''' || → || {{{-2 [[2012년]] [[12월 19일]]}}}[br][[제18대 대통령 선거|18대 대선]] ||}}} || || {{{#005ba6,#59b3ff '''투표율'''}}} ||<-3>63.03% {{{-3 [[제16대 대통령 선거|{{{#blue,#3162C7 ▼ 7.80%p}}}]]}}} || ||<-4> {{{#ffffff '''선거 결과'''}}} || || {{{#005ba6,#59b3ff '''후보'''}}} || [[대통합민주신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5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7F00; font-size: .8em;" {{{#ffffff '''대통합민주신당'''}}}}}}]][br]'''[[정동영|{{{#FF7F00 정동영}}}]]''' || [[한나라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95DA; font-size: .8em;" {{{#ffffff '''한나라당'''}}}}}}]][br]'''[[이명박|{{{#0095DA 이명박}}}]]''' || [[무소속|{{{#!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08080; font-size: .8em;" {{{#ffffff '''무소속'''}}}}}}]][br]'''[[이회창|{{{#808080 이회창}}}]]''' || ||<|2> {{{#005ba6,#59b3ff '''득표율'''}}}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7F00 29.0%, #0095DA 29.0%, #0095DA 83.2%, #808080 83.2%, #808080);" }}} || || 26.14% || '''48.67%''' || 15.07% || || {{{#005ba6,#59b3ff '''득표수'''}}} || 6,174,681 || '''11,492,389''' || 3,559,963 || ||<-4> {{{#ffffff '''대통령 당선인'''}}} || ||<-4> {{{#!wiki style="margin: -6px -10px;" [[이명박|[[파일:new_mb.jpg|width=100%]]]]}}} || ||<-4> [[한나라당|{{{#ffffff '''한나라당'''}}}]][br][[이명박|{{{#ffffff {{{+2 '''이명박'''}}}}}}]]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Screenshot_20191128-153532_Samsung Internet.jpg|width=100%]]}}} || || '''기뻐하는 [[이명박|{{{#ffffff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내외'''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07이명박당선_동아일보.jpg|width=100%]]}}} || ||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pkhVQK_Cbic)]}}} || || '''대한민국 제17대 [[이명박|{{{#ffffff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 영상''' || > '''실천하는 [[경제]][[대통령]]''' >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 >---- >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슬로건]]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2007년]] [[12월 19일]]에 치러진 선거. 48.67%를 득표한 기호 2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26.14%를 득표한 기호 1번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22.53%p, 5,317,708표 차이로 [[6.29 선언|민주화]] 이래 최대 득표율 격차로 제치고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63.03%로 역대 대통령 선거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다. == 배경 == [[참여정부]]의 후반 ~ 말기[* [[2006년]] ~ [[2008년]].]는 부동산 정책 실책과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레임덕]]) 등으로 인해 여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한나라당에서는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임기 4년 차에는 대통령 지지율이 10%대까지 하락하기도 했었다.[* 다만 대통령 선거가 있던 임기 5년 차에는 지지율이 다시 반등하여 20% 중후반대를 기록하면서 임기를 마감했다. 집권 마지막(2008년)분기 지지율이 27%였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퇴임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김영삼(6%), 김대중(24%), 이명박(23%), 박근혜(5%) 그런데 나중에 새누리당은 27%를 2.7%라고 가운데에다가 점을 찍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었다가 [[조경태]] 등의 당내 친노 의원들에게 반발을 사고 해당 논평을 폐기한 뒤 해당 당직자는 제명되었다고 한다.]([[http://www.gallup.co.kr/social/social-public.asp|갤럽 조사 결과 링크]])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다 여권에 대한 실망감까지 더해져 [[열린우리당]]은 제17대 총선 이후 치러진 재보궐선거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포함한 모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과반 의석이 붕괴되었다. 망조를 느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개혁파인 [[임종인]], [[천정배]] 전 의원을 시작으로 탈당 릴레이를 벌였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 보수파의 영수 격 인물이었던 [[김한길]]과 그를 따르는 초재선 의원들을 주축으로 각자도생을 추구하며 줄줄이 탈당해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등을 창당하는 등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두차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정동영]] 전 장관과 의장을 지낸 [[문희상]], [[김근태]] 전 의장도 신당에 합류함으로서 기존 참여정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로 열린우리당이 된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은 결국 한자리수 지지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여권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고건]]마저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여권에서는 박근혜/이명박 대세론을 뒤집을 만한 여력을 가진 뚜렷한 유력 대권 주자 없이 정동영(전 통일부장관), 손학규(전 경기도지사), 이해찬(전 국무총리)[* 정렬 순서는 지지율 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중도 사퇴.] 등이 최종 경선에 참여했고 지지율과 조직력 측면에서 앞서있던 정동영이 승리함에 따라 여권의 대권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치열한 경선 끝에 '''이명박'''이 승리를 거머쥐어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 한편, 한나라당에 있던 [[이회창]]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2007년, 이를 번복하고 3번째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대통령 선거는 양자 및 삼자대결도 아닌 '''6자 대결'''이었다. 보수, 진보 모두 모두 단일화 합의에도 실패하였고 후보들 각각이 독자 노선을 고집하였다. 현실적으로 이명박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던지라 다음 해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하여 각자도생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이력도 다채로웠다. [[현대건설]] 회장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던 기호 2번 이명박과 [[MBC]] 기자,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던 기호 1번 정동영 그리고 언론노조 출신으로 두 차례 대통령 선거 출마 경험이 있던 민주노동당 후보인 기호 3번 권영길, 그 외 [[유한킴벌리]] CEO 출신인 기호 6번 문국현과 [[경기도지사]],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기호 4번 [[이인제]], 여기에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대통령 빼고 다해본, 지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기호 12번 이회창이 뒤늦게 합류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대 [[정동영]]의 대결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각자 충분한 의석과 지지율을 보유하여 유례없는 6자토론회가 된 셈. 아무리 요약해도 1강 2중의 3자대결이었다. 특히 기호 12번 [[이회창]]은 선거 2주 전까지 [[여론조사]]에서 2위였다. 실제로 선관위 주최 주요 후보 토론회에서도 6인 모두 참석하였다. == 경선 과정 == === [[한나라당]] === [include(틀: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 취임 이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역풍에도 121석을 거두며 선방했고, [[2005년 재보궐선거|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부터는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그 화룡점정으로 이를 시작으로 여권은 붕괴하기 시작했고, 야당은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명박]]은 4년의 [[서울특별시장]] 임기 동안 청계천 복원과 시내버스 체계 전면 개편 등 굵직한 사업을 성공시켜 대권후보로 거론되었고, [[손학규]]도 [[경기도지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를 빅3라고 불렀다. 단, 빅3 중 손학규의 [[인지도]]나 지지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아주 [[듣보잡]] 후보 수준은 아니었으나, 3년여간 당대표를 역임하며 탄핵 역풍으로 궤멸당한 당을 재건한 박근혜 전 대표나 시내버스 개편, 청계천 복원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등 행정적 업적을 세운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비해 손학규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손학규도 경기도지사 시절 [[판교테크노밸리]]를 비롯하여 여러 대기업들을 [[경기도]]의 [[산업단지]]들에 유치하는 등 성공적으로 도정을 수행했으나[* 손학규는 경기도지사였을 때 노무현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매도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는 '나는 대기업들을 경기도에 유치하여 경기도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였는데, 노무현은 경제 분야에서 한 게 없다'라는 인식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해석된다.], 박근혜나 이명박에 비하면 이른바 '''뉴스를 탈 성과'''는 딱히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도지사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도지사직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손학규는 경기도지사 퇴임 직후 민심 100일 대장정 등의 행보를 보이며 어떻게든 지지율 반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강력한 철옹성을 넘기 힘들었고, 결국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한다. 이로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양자 대결로 좁혀진다. 이 2명 외에, 당내 중진이었던 [[홍준표]] 당시 국회의원과 당내 소장파의 필두였던 [[원희룡]] 전 의원이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참고로 당시 홍준표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동북권에서 [[당선]]된 유일한 한나라당 정치인이라는 점, 당내 혁신위원장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본인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정치적 지분에 비해 대중들 사이의 인지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물론 둘은 실제 대권보다는 차기 당권이나 인지도 상승 등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밖에 역시 소장파인 [[고진화]] 전 의원도 경선에 참여했으나, 경선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 내 경쟁은 치열했다. 초반에는 [[박근혜 피습 사건]] 와중에도 '''대전은요?''' 한 마디로 [[대전광역시장]] 승리를 이끈 박근혜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게 있어 박근혜는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고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이이제이의 만화 한국현대사]]에서는 당시의 박근혜를 한나라당의 '[[예수 그리스도|예수 그네스도]]'로 묘사한다.] 그러나 [[북한의 1차 핵실험]]과 [[2007년 재보궐선거]]가 [[박근혜]]에게 악재가 되었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근혜였지만, 2006년 10월에 발생한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여성보다는 남성이 외교안보 업무를 총괄하는 대통령직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박근혜의 지지세가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이명박]]은 [[기관지 확장증]]으로 인해 병역을 면제받아서 군 경력은 없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돌발 상황에 있어서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 관념 또한 일정 부분 작용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북한의 KAL기 테러]]도 비슷한 효과를 냈다. 민간인인 [[김대중]]이나 [[김영삼]]보다는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가 국군 통수권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에 더 적합하다는 인식이 퍼져 노태우가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진한 성적을 내면서 박근혜는 또 한번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들은 공천 불복 탈당파에 의해, 대전광역시 서구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중심당+열린우리당의 비공식적 연대에 부딛혀 패한 것. 박근혜는 당헌당규상 대권-당권 분리 및 대선 후보 경선 참여 1년 전 대표직 사퇴 조항에 따라 2006년 6월에 당대표직을 사퇴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친박]]으로 분류되던 [[강재섭]]이었고, 박근혜가 전면에 나선 선거였기에 그 책임론까지 덤터기 써버린 것이다. 아울러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전략적으로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후보론, 경제 후보론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우선 수도권 후보론은 표가 많은 수도권을 정치적 근거지로 하는 인물을 내보내 수도권의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영남은 누가 봐도 몰표가 쏟아지는 표밭이었으니 [[TK#s-1|TK]] 기반의 박근혜보단 역시 TK 출신이지만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을 한데다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이명박을 내보내는 것이 총 득표에 유리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영남이야 어차피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받는 표가 거진 동일할 테니[* [[공화당(미국)|미국 공화당]]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도 전통적으로 이런 식이다. 어차피 보수층들은 공화당을 지지할 것이니, 보수층에게만 어필하는 강경 보수 성향의 후보보다는, 중도표도 끌고 올 수 있는 온건 보수 성향의 후보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미국)|미국 민주당]]도 상황은 마찬가지. 특히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표를 받아도 사표가 될 수 있어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경제 후보론은 당시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출발해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거쳐 서울시장으로서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이명박이 본선에 더 유리하다는 논리였다.[* 박근혜는 당시 당대표만을 역임해서 경제 운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이명박 측은 [[747 공약]][* '''7'''% 경제성장률, 10년 내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 강국]을 내걸어 경제 공약을 강조했고,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측은 줄푸세 공약[*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푸''')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이다. 당시 친박이었던 [[유승민]]이 기획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줄푸세를 입안한 사람은 [[김광두]]다.]을 내걸며 맞섰다. 당시 상황은 '''당내 지지도'''는 박근혜가 앞섰고,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성공적인 시정 덕분에 '''여론조사 지지율'''이 앞선 상태였다. 둘의 우세한 분야가 다르고 정도도 비등해서 경선 룰에 따라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파일:오로지진실만을말하시는분들.jpg]] ---- 이 때문에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가 엄청났는데,[* 이전이나 이후에도 우리나라 대선때 이정도의 네거티브는 흔치가 않은 사례로 그나마 [[한나라당]] 경선때의 네거티브 수위를 비교할려면 [[제20대 대통령 선거]] 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과 [[국민의힘]] [[윤석열]]의 대통령 선거 싸움때 벌어진 네거티브 정도가 그나마 비교가 된다. 하지만 이쪽은 애초에 다른 정당이니만큼 그렇다쳐도 [[이명박]]과 [[박근혜]]는 '''[[한나라당|아예 같은 정당]]'''이었음에도 서로 어떻게든 치고 올라갈려는 모습이 임펙트로만 따지면 이쪽이 더 화제였다.] 이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둘의 비리는 이때 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란 약점은 모조리 들춰내어 공격하였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발언들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이후 선거 직전까지 [[BBK 주가조작 사건|BBK 논란]]이 계속되고, 후술하겠지만, 느닷없는 [[이회창]]의 독자 출마로 보수 표 분열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측은 급히 [[박근혜]]에 SOS를 친다. 당시 이회창이 필사적으로 박근혜 영입에 나섰기 때문인데, 최종적으로 박근혜가 [[한나라당]] 잔류를 택하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은 단일대오를 구축하게 된다. 친박계 [[곽성문]] 전 의원이 개별적으로 탈당해 이회창을 지지하고, [[박사모]]도 공식적으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이탈일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이명박이 49.6%를 얻어 48.1%의 박근혜를 1.5% 차이로 따돌리며 접전 끝 승리를 거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시 서로를 향했던 네거티브 폭로전은 모두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이명박 측에서 주장한 [[최태민]] - [[최순실]] 의혹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가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발전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박근혜 재판]]에서 비로소 사실로 밝혀졌으며, 이명박의 재산 형성 의혹, [[BBK 주가조작 사건]], [[다스 실소유주 논란]] 등 역시 2020년 [[이명박 재판]]에서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 확정이 나면서 역시 사실로 확정되었다. [[http://news.jtbc.joins.com/html/549/NB11976549.html?log=jtbcnewsindex_newsN_B|13년 전 이명박-박근혜 '경선 폭로전'…모두 사실로]] 결국 두 사람 모두 [[문재인 정부]] 들어 상기 혐의들로 유죄가 확정되면서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을 [[박영수 특검]]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수사한 [[윤석열]]은 다음 대통령이 되었고, [[한동훈]]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이복현]]은 [[금융감독원장]]이 되었다. ==== 결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NP3.jpg|width=100%]]}}} || ---- ||<-4><:>[[대한민국 대통령|{{{#FFFFFF {{{+1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2><:>'''기호'''||<:>'''이름'''||<:>'''득표수'''||<:>'''순위'''|| ||<:>'''정당'''||<:>'''득표율'''||<:>'''비고'''|| ||<|2><:>{{{#FFFFFF {{{+5 '''1'''}}}}}}||<:>'''[[이명박|{{{#373a3c,#dddddd 이명박}}}]](李明博)'''||<:>'''81,084'''||<:> '''1위''' || ||<:>[include(틀:한나라당)]||<:>'''49.6%'''||<:> '''당선''' || ||<|2><:>{{{#FFFFFF {{{+5 '''2'''}}}}}}||<:>[[원희룡|{{{#373a3c,#dddddd 원희룡}}}]](元喜龍)||<:>2,398||<:>3위|| ||<:>[include(틀:한나라당)]||<:>1.5%||<:>낙선|| ||<|2><:>{{{#FFFFFF {{{+5 '''3'''}}}}}}||<:>[[박근혜|{{{#373a3c,#dddddd 박근혜}}}]](朴槿惠)||<:>78,632||<:>2위|| ||<:>[include(틀:한나라당)]||<:>48.1%||<:>낙선|| ||<|2><:>{{{#FFFFFF {{{+5 '''4'''}}}}}}||<:>[[홍준표|{{{#373a3c,#dddddd 홍준표}}}]](洪準杓)||<:>1,503||<:>4위|| ||<:>[include(틀:한나라당)]||<:>0.9%||<:>낙선|| ===== 지역별 결과 ===== ||<-6> {{{#ffffff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자 선출'''}}}[* 기호 5번 [[고진화]] 후보는 중도 사퇴했다.] || || {{{#ffffff 지역}}} || [[이명박|'''{{{#ffffff 1. 이명박}}}''']] || [[원희룡|{{{#ffffff 2. 원희룡}}}]] || [[박근혜|{{{#ffffff 3. 박근혜}}}]] || [[홍준표|{{{#ffffff 4. 홍준표}}}]] || {{{#ffffff 합계}}} || || 서울 || '''{{{#ffffff 16,190 (58.0%)}}}''' || 330 (1.2%) || 11,113 (39.8%) || 271 (1.0%) || {{{#ffffff 27,904 (100%)}}} || || 부산 || 5,273 (47.2%) || 60 (0.5%) || '''{{{#ffffff 5,789 (51.8%)}}}''' || 47 (1.0%) || {{{#ffffff 11,169 (100%)}}} || || 대구 || 2,305 (31.1%) || 19 (0.3%) || '''{{{#ffffff 5,072 (68.4%)}}}''' || 22 (0.3%) || {{{#ffffff 7,418 (100%)}}} || || 인천 || 3,089 (49.1%) || 36 (0.3%) || '''{{{#ffffff 3,135 (49.9%)}}}''' || 25 (0.4%) || {{{#ffffff 6,285 (100%)}}} || || 광주 || '''{{{#ffffff 1,338 (57.6%)}}}''' || 104 (0.3%) || 853(36.8%) || 25 (0.4%) || {{{#ffffff 2,321 (100%)}}} || || 대전 || 1,272 (34.1%) || 40 (1.1%) || '''{{{#ffffff 2,404 (64.4%)}}}''' || 18 (0.5%) || {{{#ffffff 3,734 (100%)}}} || || 울산 || 1,517 (47.7%) || 18 (0.6%) || '''{{{#ffffff 1,637 (51.4%)}}}''' || 11 (0.3%) || {{{#ffffff 3,183 (100%)}}} || || 경기 || '''{{{#ffffff 12,779 (50.0%)}}}''' || 161 (0.6%) || 12,543 (49.1%) || 88 (0.3%) || {{{#ffffff 25,571 (100%)}}} || || 강원 || 1,866 (43.0%) || 22 (0.5%) || '''{{{#ffffff 2,436 (56.2%)}}}''' || 14 (0.3%) || {{{#ffffff 4,338 (100%)}}} || || 충북 || 1,823 (43.3%) || 26 (0.6%) || '''{{{#ffffff 2,343 (55.7%)}}}''' || 16 (0.4%) || {{{#ffffff 4,208 (100%)}}} || || 충남 || 2,271 (41.3%) || 26 (0.5%) || '''{{{#ffffff 3,179 (57.8%)}}}''' || 24 (0.4%) || {{{#ffffff 5,500 (100%)}}} || || 전북 || '''{{{#ffffff 2,141 (55.3%)}}}''' || 111 (2.9%) || 1,581 (40.8%) || 39 (1.0%) || {{{#ffffff 3,872 (100%)}}} || || 전남 || '''{{{#ffffff 2,692 (57.0%)}}}''' || 133 (2.8%) || 1,852 (39.2%) || 48 (1.0%) || {{{#ffffff 4,725 (100%)}}} || || 경북 || 4,455 (46.3%) || 31 (0.3%) || '''{{{#ffffff 5,111 (53.1%)}}}''' || 24 (0.2%) || {{{#ffffff 9,621 (100%)}}} || || 경남 || 4,498 (48.1%) || 76 (0.8%) || '''{{{#ffffff 4,748 (50.8%)}}}''' || 30 (0.3%) || {{{#ffffff 9,352 (100%)}}} || || 제주 || 707 (41.8%) || 126 (7.4%) || '''{{{#ffffff 852 (50.4%)}}}''' || 7 (0.4%) || {{{#ffffff 1,692 (100%)}}} || || 여론조사 || '''{{{#ffffff 16,868 (51.5%)}}}''' || 1,079 (3.3%) || 13,984 (42.7%) || 793 (2.4%) || {{{#ffffff 32,724 (100%)}}} || || 총합 || '''{{{#ffffff 81,084 (49.6%)}}}''' || 2,398 (1.5%) || 78,632 (48.1%) || 1,503 (0.9%) || {{{#ffffff 163,617 (100%)}}} || ---- 경선 룰은 국민참여선거인단 80%[* 전당대회 대의원 45,717명 (25%, 전체 비율 대비 20%), 당원 선거인 69,496명 (37.5%, 전체 비율 대비 30%), 일반 국민 69,496명 (37.5%, 전체 비율 대비 30%)], 여론조사 20%로 결정되었으며,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박근혜]]가 16개 광역자치단체 중 11곳에서 앞섰고 특히 박근혜의 고향인 대구광역시에서 68.4%의 몰표를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나 정작 선거 인단이 가장 많이 배정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서[* 호남과 수도권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박근혜]]가 승리했음에도, 서울과 경기의 인구수가 많아 서울특별시에서만 무려 5천표차가 나버리며 타 지역에서의 격차를 모조리 상쇄해버린 것이 컸다.]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시절 평이 매우 좋아서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명박]]으로 몰표가 나왔다.]에게 패배하며 0.33%의 근소한 우위에 그쳤고, 여론조사에서 9% 가까이 앞선 이명박이 역전에 성공하며 살얼음판 승부 끝에 대권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2위를 한 박근혜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3위를 한 [[원희룡]]과 4위를 한 [[홍준표]][*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다.]는 [[국민의힘 2차 전당대회|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도 참여하였다. === [[대통합민주신당]] === [include(틀:대통합민주신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은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으며, 정권교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유행어]]로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가 있다. 게다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로 인해 거의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는 중에도 여권에서도 유력 후보는 존재했으니, 그는 바로 [[고건]] 전 총리였다. [[노무현 탄핵 사태]] 당시 잠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도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이며[* 그러나 [[노무현]]과의 관계는 끝이 개운치 못했는데,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라는 악평을 내리며 사실상 둘은 결별한 사이였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넓은 계층에게 인정받으며 초창기 모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고건]]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특정 정당 지지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직설적인 화법의 소유자도 아닌지라 논란이 될 발언을 한 적도 없었다. 정치인이 아닌 전형적인 관료형 인물이었기 때문에 보수, 진보 양쪽에서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고건]] 본인이 풀었던 후일담을 보자면 나름대로 자신의 당시 입지를 분석하는 등[* [[한나라당]]에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민심, 호남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 관료 출신으로서 [[대통합민주신당]] 내부에서도 어중간한 입지와 [[노무현]]과의 갈등으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계파적 스탠스 등.] 스스로도 출마 생각이 없진 않았던 걸로 보였고 한편으로는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약칭 '한미준')이라는 고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자칭) 지지세력이 등장하는 소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과가 신통치 못하고 스스로도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고는 한미준은 '자신과는 관련 없는 정당이다'라는 입장을 피력하며 지지 세력을 흡수하지는 않았고 이어 불출마를 선언하며 그의 대통령 추대는 일찍이 일단락되었다. 이로서 여당의 대권 후보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만다. 그나마 유력 후보라 할 만한 사람은 [[정동영]]과 [[김근태]] 정도인데 이 두 사람은 통일부 장관 자리를 두고 경쟁[*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력 주자들을 내각에 입각시키면서 통일부와 보건복지부를 제안했는데, 당시 대북정책이 온건 기조였던 데다가 [[북한]]도 [[제2연평해전]] 이후로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고(핵실험 이전이었다.) 해서 통일부장관의 정치적 위상이 훨씬 높았기에 두 유력 정치인이 충돌했던 ~~니가 가라 복지부~~ 결국 정동영이 이겨서 통일부장관을, 김근태가 보건복지부장관을 각각 맡았다.]을 벌인데다 두 후보 모두 여러 선거에서의 참패 책임이 있었다. 그나마 김근태는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은 것이 한 번 뿐이었지만[* 정확히는 정동영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금 의장으로 뽑혔는데, 해당 선거는 "한나라당의 싹쓸이를 막아주십시오"(...)로 요약될 만큼 여당에게 있어 역대급 대참사가 난 선거였고, 결국 정동영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사퇴하면서 차석 상임중앙위원(요즘으로 치면 수석최고위원)이던 김근태가 의장 직을 승계받은 것이었다.] 정동영의 경우에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당 의장으로서 대참패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유력 후보군들로는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이 있었다. 셋 다 내각 출신인데, 유력 대권 주자가 없자 대통령과 청와대가 당 내 중진 및 신임하는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시켜 무게감을 더해주려는 배려였다. 당 상황이 개판이 되고 당 내 후보군이 다 상처투성이인 상황에서 [[김한길계]]는 범여권 재편을 목적으로 탈당을 결행,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이를 신호탄으로 '''대선후보군을 포함한 현역 의원 상당수의 연쇄 탈당'''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측과 손학규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탈당파가 연대하고, 민주당 탈당파가 여기에 합류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이 해체하여 흡수되는 형식으로 모여서 [[대통합민주신당]]이 결성된다. 창당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바로 대선후보 경선에 착수했으나 후보들 상태가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그런 주제에-- 엄청난 수의 후보가 쏟아져나와 [[컷오프]]를 해야 했다. 통합신당파의 지지를 받은 정동영, 한나라당 탈당파로서 인지도나 긍정적 측면에서 우월했던 손학규[* 한나라당에선 분명 인지도, 지지율 등등 다 밀려서 탈당했지만, 한나라당의 제3후보가 바로 범여권 정당의 유력 후보가 될 지경이었다.(...)], 구 열린우리당과 친노계의 집중 지원을 받은 이해찬이 범여권 Big3으로 불렸으며, 친노계에선 추가로 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장관]]이, 구 민주당계 탈당파에선 [[추미애]] 전 의원이, 그리고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 의원과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까지 9명이 출마했다. 다른 유력 후보들이였던 김근태와 [[정세균]] 전 의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이 당시 김근태가 대선 재도전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는 후일 출간된 '근태 선생 관찰기'(최만영 저)에 담겨있는데, 2007년 어느 날 김근태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한 인사가 그의 연설비서관이자 핵심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저자를 조용히 보기를 청했고, 거기서 김근태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병]]을 앓고 있단 소식을 전했다고 적혀있다. 김근태의 모습을 본 한 [[서울대학교병원]] 의사가 그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좋겠다 말했고, 곧바로 파킨슨병 확진을 받은 것. 물론 당시 그는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단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그 대신 민주개혁 세력의 대통합을 위해 불출마한다는 이야기만 남겼다.][* 이후 김근태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에서 접전패하며 낙선했고, 몸이 성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집회 현장에 참석하거나 싱크탱크였던 한반도재단(현 김근태재단) 활동에 집중했다. 그러나 정치 복귀는 끝내 하지 못했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치 복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 그러다 2011년 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8월 27일 컷오프에서 [[추미애]], [[천정배]], [[신기남]], [[김두관]] 4인이 탈락한다. 이후 시작된 본선 경선에서는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차례대로 후보직을 사퇴하며 같은 [[친노]]계인 [[이해찬]]을 지지했다.[* 참고로 경선 과정 TV 토론에서 [[한명숙]]은 대리모를 '''아이 대신 키워주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유시민]]은 멧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전사를 투입하겠다고 말해 일반인들의 웃음과 범여권 지지자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특히나 유시민은 지고나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문국현]]을 지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대선을 40여일 앞두고는 다시 [[정동영]] 지지를 선언하며 대통령 선거 캠프에 합류했다. 하지만 유시민을 따라 문국현을 지지한 [[김영춘]]은 끝까지 [[창조한국당]]에 잔류하였다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탈당. 결국 2010년 [[손학규]] 전 대표가 지명직 최고위원을 주기 전까지 당을 떠나 돌아오지 않게 된다.] 결국 남은 빅3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니고 있던 정동영이 후보로 선출된다. [[손학규]]는 한나라당 탈당파라서 당 내 조직력이 너무 미약했고 애시당초 탈당을 함께 한 동반자들도 거의 없었으며,[* [[손학규]]는 어떻게든 소장파들을 동반 탈당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남경필]]과 [[원희룡]]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손학규가 나가고 양강 구도가 되면서 [[이명박]]을 지지하게 된다.][* 그 외에 [[손학규]]가 특히 동반 탈당을 위해 강력히 권유했던 워싱턴 동지인 [[홍준표]]는 어쨌든 당은 지켜야 한다, 탈당은 안 된다며 고사했다. 결국 손학규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한 무게감 있는 정치인은 전무했다. 후일 3선 중진의원이 되는 [[이찬열]]이 있긴 한데, 이때 당시엔 [[박종희|당협위원장]]과 싸우고 나와서 무게감 하나 없는 전직 도의원에 불과했다.] 이해찬은 유시민, 한명숙의 지원을 받았지만, 친노계 후보였기에 배척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스떼기]] 논란이 터져버리는 등 해당 경선도 진흙탕 싸움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후 정동영은 어떻게든 범여권 및 진보 진영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입싸움으로만 끝난 채 모두 실패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이때의 빅3는 11년 후 각각 다른 정당의 당대표 선거에서 당선된다.[*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아이러니하게도 또 4년 뒤엔 손학규 빼고 이 둘은 [[제20대 대통령 선거]]로 인해 '''[[더불어민주당|다시 뭉치게 되었다]].'''] ==== 결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동영후보선출.jpg|width=100%]]}}} || ---- ||<-4><:>[[대한민국 대통령|{{{#FFFFFF {{{+1 '''대통합민주신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2><:>'''기호'''||<:>'''이름'''||<:>'''득표수'''||<:>'''순위'''|| ||<:>'''정당'''||<:>'''득표율'''||<:>'''비고'''|| ||<|2><:>{{{#000000 {{{+5 '''--1--'''}}}}}}||<:>--[[유시민|{{{#373a3c,#dddddd 유시민}}}]](柳時敏)--||<-2><|2> 사퇴 || ||<:>--[include(틀:대통합민주신당)]-- || ||<|2><:>{{{#FFFFFF {{{+5 '''2'''}}}}}}||<:>[[손학규|{{{#373a3c,#dddddd 손학규}}}]](孫鶴圭)||<:>168,799||<:>2위|| ||<:>[include(틀:대통합민주신당)]||<:>34.0%||<:>낙선|| ||<|2><:>{{{#FFFFFF {{{+5 '''3'''}}}}}}||<:>'''[[정동영|{{{#373a3c,#dddddd 정동영}}}]](鄭東泳)'''||<:>'''216,984'''||<:> '''1위''' || ||<:>[include(틀:대통합민주신당)]||<:>'''43.8%'''||<:> '''당선''' || ||<|2><:>{{{#FFFFFF {{{+5 '''4'''}}}}}}||<:>[[이해찬|{{{#373a3c,#dddddd 이해찬}}}]](李海瓚)||<:>110,128||<:>3위|| ||<:>[include(틀:대통합민주신당)]||<:>22.2%||<:>낙선|| ===== 지역별 결과 ===== ||<-6> {{{#ffffff '''대통합민주신당의 제17대 대통령 후보자 선출'''}}}[* 한명숙 후보는 국민 경선 후보였으나 경선 시작 직전인 2007년 9월 14일에 이해찬 후보 지지를 하며 사퇴했다.] || || {{{#ffffff 지역}}} || [[유시민|{{{#ffffff 1. 유시민}}}]] || [[손학규|{{{#ffffff 2. 손학규}}}]] || '''[[정동영|{{{#ffffff 3. 정동영}}}]]''' || [[이해찬|{{{#ffffff 4. 이해찬}}}]] || {{{#ffffff 합계}}} || || 제주 || 1,528(16.7%) || 2,754(30.1%) || '''{{{#ffffff 3,003(32.8%)}}}''' || 1,866(20.4%) || {{{#ffffff 9,151(100%)}}} || || 울산 || 1,362(20.9%) || 1,335(20.5%) || '''{{{#ffffff 2,262(34.8%)}}}''' || 1,548(23.8%) || {{{#ffffff 6,507(100%)}}} || || 강원 || 사퇴[* 이해찬 후보를 지지하며 9월 15일에 사퇴] || 2,359(31.8%) || 2,311(31.1%) || '''{{{#ffffff,#191919 2,751(37.1%)}}}''' || {{{#ffffff 7,421(100%)}}} || || 충북 || || 2,920(24.3%) || '''{{{#ffffff 6,334(52.7%)}}}''' || 2,760(23.0%) || {{{#ffffff 12,014(100%)}}} || || 광주 || || 7,948(34.9%) || '''{{{#ffffff 10,841(47.6%)}}}''' || 4,007(17.6%) || {{{#ffffff 22,796(100%)}}} || || 전남 || || 11,958(36.2%) || '''{{{#ffffff 15,224(46.1%)}}}''' || 5,819(17.6%) || {{{#ffffff 33,001(100%)}}} || || 부산 || || 4,508(25.3%) || '''{{{#ffffff 6,689(37.6%)}}}''' || 6,614(37.1%) || {{{#ffffff 17,811(100%)}}} || || 경남 || || 4,069(31.8%) || '''{{{#ffffff 4,461(34.8%)}}}''' || 6,285(33.4%) || {{{#ffffff 12,806(100%)}}} || || 모바일1차 || || '''{{{#ffffff 7,649(36.5%)}}}''' || 7,004(33.5%) || 6,285(30.0%) || {{{#ffffff 20,938(100%)}}} || || 모바일2차 || || '''{{{#ffffff 21,359(41.7%)}}}''' || 19,288(37.7%) || 15,035(20.6%) || {{{#ffffff 55,682(100%)}}} || || 모바일3차 || || '''{{{#ffffff 41,023(38.9%)}}}''' || 35,846(34.0%) || 23,964(27.0%) || {{{#ffffff 100,833(100%)}}} || || 여론조사 || || 17,525(35.3%) || '''{{{#ffffff 21,850(44.0%)}}}''' || 10,216(20.6%) || {{{#ffffff 49,591(100%)}}} || || 대전 || || 1,464(28.1%) || 1,766(33.9%) || '''{{{#ffffff,#191919 1,974(37.9%)}}}''' || {{{#ffffff 5,204(100%)}}} || || 충남 || || 1,616(24.1%) || 2,182(32.6%) || '''{{{#ffffff,#191919 2,895(43.3%)}}}''' || {{{#ffffff 6,693(100%)}}} || || 전북 || || 6,387(13.6%) || '''{{{#ffffff 38,078(81.3%)}}}''' || 2,367(5.1%) || {{{#ffffff 46,832(100%)}}} || || 경기 || || '''{{{#ffffff 13,587(42.0%)}}}''' || 13,025(40.2%) || 5,767(17.8%) || {{{#ffffff 32,379(100%)}}} || || 인천 || || '''{{{#ffffff 3,160(41.5%)}}}''' || 3,117(41.0%) || 1,331(17.5%) || {{{#ffffff 7,608(100%)}}} || || 대구 || || 1,530(35.5%) || 1,108(25.7%) || '''{{{#ffffff,#191919 1,677(38.9%)}}}''' || {{{#ffffff 4,315(100%)}}} || || 경북 || || '''{{{#ffffff 2,017(42.1%)}}}''' || 1,598(33.4%) || 1,174(24.5%) || {{{#ffffff 4,789(100%)}}} || || 서울 || || 13,631(32.1%) || '''{{{#ffffff 20,997(49.5%)}}}''' || 7,802(18.4%) || {{{#ffffff 42,430(100%)}}} || || 총합 || 사퇴 || 168,799(34.0%) || '''{{{#ffffff 216,984(43.8%)}}}''' || 110,128(22.2%) || {{{#ffffff 495,911(100%)}}} || ==== [[2018년]], 의외의 재조명 ==== [[2018년]] 시점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전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전 대표가 모두 이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후보로 출마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명박]] 후보가 워낙 압도적으로 승리한 선거라 선거 당시에도 다른 대통령 선거들에 비해 관심을 덜 받았고 이후에도 크게 회자되는 편이 아니었으나[* 그것도 싱거웠던 본선보다는 치열했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이 관심을 더 받았고 아직도 회자된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나 [[검증의 쓰나미]] 같은 밈도 나왔다.]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세 원내정당의 대표가 모두 이 대통령 선거의 경선 주자 출신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이 대통령 선거에서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으로 국민들이 [[민주당계 정당]]을 심판했으나 10여년이 지나며 심판의 대상이 보수 정당으로 바뀌었고 이 때의 민주당계 정당([[대통합민주신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시 한국 정치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필연적 결과로 분석해볼 수 있겠다. === [[민주당(2005년)|민주당]] === 2003년 열린우리당의 분당 이래 참여정부 및 열린우리당, [[친노]]계와 철천지 원수가 된 구 [[동교동계]] 중심의 [[민주당(2005년)|민주당]]은 2007년 열린우리당의 붕괴 속에 이익을 보고 덩치를 키워 열린우리당을 대신하여 범여권의 대표로서 대선에 임하려 했다. [[김한길계]] 탈당파의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하여 [[중도통합민주당]]이 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김한길계는 소통합에서 대통합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다시 당을 깨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 이에 중도통합민주당은 당명을 다시 [[민주당(2007년)|민주당]]으로 돌려놓고 독자 노선을 추구한다. 그리고 희대의 탈당전문가--이자 소속당 박살내기 전문가--인 --'''피닉제'''-- '''[[이인제]]가 때를 같이하여 [[국민중심당]]을 탈당하고 [[민주당(2007년)|민주당]]에 입당'''한다. 그 직후 시작된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은 처참했다. 당초 조순형 전 대표가 압도적인 대세론을 형성할 것으로 관측되었으나, 정작 뚜껑을 까보자 인지도가 떨어지는 [[장상(1939)|장상]][* 국민의 정부가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후임 총리로 지명하였으나, 각종 논란들 끝에 정식 임명으로는 이어지지 못함.]이나 [[신국환(정치인)|신국환]][* 관료 출신의 초선 의원.]은 물론 나름 네임드 정치인인 '''[[조순형]], [[김민석(정치인)|김민석]]까지 이제 막 당에 들어온 이인제에게 완벽하게 쳐발리며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 후보 타이틀을 풍운아 이인제에게 넘겨주고 만다'''. 사실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에 전국적인 인지도나 조직 동원 능력에서 이인제를 따라잡을 상대는 없었고[* 훗날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게 되는 [[이낙연]]이나 [[국민의당(2016년)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게 되는 [[박주선]]은 당시에는 대권 주자급 중량감은 없었다.], 조순형 등은 당내에서나 거물이지 사실 객관적으로 대선 주자급에 끼지도 못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조순형은 탄핵의 선두에 섰다가 새천년민주당을 말아먹은 이미지가 컸고, 김민석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어설픈 행보로 인해 [[철새(정치)|철새]] 이미지가 상당히 컸다. 제16대 대통령 선거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김민석의 이미지는 여전히 친문 지지자들에게 부정적인 편.] 이후 [[정동영]]은 [[이인제]]와 단일화 협상을 진행했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이인제는 독자 노선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여 [[조순형]], [[김홍업]], [[이낙연]] 등 당내 지역구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들은 모두 탈당해버리고 대부분 [[대통합민주신당]]에 동참한다.[* [[조순형]]의 경우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이후 [[자유선진당]]에 합류한다.] 결국 당에는 [[김종인]] 등의 비례대표 의원 4명에다[* 비례대표는 탈당하면 의원직까지 반납해야 하기에 개인적 입장을 내비칠 수도 없었다. 이는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된 지방의회 비례 의원들도 마찬가지. 다만 탈당을 안 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정동영 지지에 가까운 행보를 펼쳤다.] 지역구 의원은 [[이인제]]와 [[최인기]] 원내대표 등 2명만 남게 되었다. 사실 최인기 원내대표도 탈당만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정동영 지지에 가까운 독자 행보를 펼쳤다. ==== 결과 ==== ||<-4><:>[[대한민국 대통령|{{{#FFFFFF {{{+1 '''민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2><:>'''기호'''||<:>'''이름'''||<:>'''득표수'''||<:>'''순위'''|| ||<:>'''정당'''||<:>'''득표율'''||<:>'''비고'''|| ||<|2><:>{{{#FFFFFF {{{+5 '''1'''}}}}}}||<:>[[장상(1939)|{{{#373a3c,#dddddd 장상}}}]](張裳)||<:>2,984||<:>4위|| ||<:>[include(틀:민주당(2005년))]||<:>4.9%||<:>낙선|| ||<|2><:>{{{#FFFFFF {{{+5 '''2'''}}}}}}||<:>'''[[이인제|{{{#373a3c,#dddddd 이인제}}}]](李仁濟)'''||<:>'''34,176'''||<:> '''1위''' || ||<:>[include(틀:민주당(2005년))]||<:>'''56.4%'''||<:> '''당선''' || ||<|2><:>{{{#FFFFFF {{{+5 '''--3--'''}}}}}}||<:>--[[조순형|{{{#373a3c,#dddddd 조순형}}}]](趙舜衡)--||<-2><|2> 사퇴 || ||<:>--[include(틀:민주당(2005년))]-- || ||<|2><:>{{{#FFFFFF {{{+5 '''4'''}}}}}}||<:>[[김민석(정치인)|{{{#373a3c,#dddddd 김민석}}}]](金民錫)||<:>14,641||<:>2위|| ||<:>[include(틀:민주당(2005년))]||<:>24.2%||<:>낙선|| ||<|2><:>{{{#FFFFFF {{{+5 '''5'''}}}}}}||<:>[[신국환|{{{#373a3c,#dddddd 신국환}}}]](辛國煥)||<:>5,600||<:>3위|| ||<:>[include(틀:민주당(2005년))]||<:>9.2%||<:>낙선|| === [[민주노동당]] === [include(틀:민주노동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 범여권으로 분류하긴 힘들지만 反한나라당 연대로 같이 거론되던 [[민주노동당]]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꽤 격렬한 논쟁을 겪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선 [[권영길]]로 무난하게 후보를 추대했지만,[* 여담으로 당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2007년 민주노동당이 처한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우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성공을 본 NL계가 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당내 세력비가 바뀌었고, 2006년 당내 인사들이 연루된 간첩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두고 NL과 PD가 크게 대립하였으며 그 이후의 제1차 핵실험을 두고 같은 갈등이 반복되었다. 결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 주자가 없던 NL은 권영길과 연대하여 권영길을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PD는 의정 활동으로 스타덤에 오른 [[노회찬]], [[심상정]]을 앞세워 반격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압도적인 인지도와 NL의 지원을 받은 권영길이 2%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이 과정으로 당원 사이의 갈등이 터져버리고 이는 훗날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정동영도 권영길에게 단일화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이도 거절당했다. 이는 참여정부가 가진 경제정책과 노동 정책에서의 보수성에 기인했다. 실제로 참여계가 진보 정당으로 가기 이전까지는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고. ==== 결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권영길후보선출.jpg|width=100%]]}}} || ---- ||<-6><:>[[대한민국 대통령|{{{#FFF {{{+1 '''민주노동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2> ||<-2> '''{{{#fff 1차 투표}}}''' ||<-2> '''{{{#fff 결선 투표}}}''' || ||<|2><:>'''기호'''||<:>'''이름'''||<:>'''득표수'''||<:>'''순위'''||<:>'''득표수'''||<:>'''순위'''|| ||<:>'''정당'''||<:>'''득표율'''||<:>'''비고'''||<:>'''득표율'''||<:>'''비고'''|| ||<|2><:>{{{#FFFFFF {{{+5 '''1'''}}}}}}||<:> [[심상정|{{{#373a3c,#dddddd 심상정}}}]](沈相奵) ||<:>'''10,064'''||<:>'''2위'''||<:>17,122||<:>2위|| ||<:>[include(틀:민주노동당)]||<:>'''26.08%'''||<:> {{{#222 '''결선'''}}}||<:>47.26%||<:>낙선|| ||<|2><:>{{{#FFFFFF {{{+5 '''2'''}}}}}}||<:> [[노회찬|{{{#373a3c,#dddddd 노회찬}}}]](魯會燦) ||<:>9,478||<:>3위||<-2><|2> 탈락 || ||<:>[include(틀:민주노동당)]||<:>24.56%||<:>낙선|| ||<|2><:>{{{#FFFFFF {{{+5 '''3'''}}}}}}||<:> '''[[권영길|{{{#373a3c,#dddddd 권영길}}}]](權永吉)''' ||<:>'''19,053'''||<:>'''1위'''||<:>'''19,109'''||<:>'''1위'''|| ||<:>[include(틀:민주노동당)]||<:>'''49.37%'''||<:> {{{#222 '''결선'''}}}||<:>'''52.74%'''||<:> '''당선''' || ===== 1차 투표 지역별 결과 ===== ||<-4> '''{{{#ffffff 민주노동당의 제17대 대통령 후보자 선출}}}''' || || {{{#ffffff 지역}}} || [[심상정|'''{{{#ffffff 심상정}}}''']] || [[노회찬|'''{{{#ffffff 노회찬}}}''']] || '''[[권영길|{{{#ffffff 권영길}}}]]''' || || 제주 || 196 || 197 || '''{{{#ffffff 234}}}''' || || 광주전남 || 508 || 655 || '''{{{#ffffff 1,749}}}''' || || 대구경북 || 990 || 957 || '''{{{#ffffff 1,035}}}''' || || 대전충남 || 752 || 736 || '''{{{#ffffff 925}}}''' || || 해외 || '''{{{#ffffff 9}}}''' || 3 || 8 || || 전북 || 422 || 660 || '''{{{#ffffff 1,429}}}''' || || 경남 || 911 || 677 || '''{{{#ffffff 2,686}}}''' || || 부산 || 532 || 592 || '''{{{#ffffff 1,076}}}''' || || 울산 || 599 || 347 || '''{{{#ffffff 1,407}}}''' || || 충북 || '''{{{#ffffff 497}}}''' || 323 || 332 || || 강원 || 391 || 414 || '''{{{#ffffff 498}}}''' || || 수도권 || 4,256 || 3,917 || '''{{{#ffffff 7674}}}''' || || 총합 || 10,064(2위) || 9,478(3위) || 19,053(1위) || || 결과 || '''{{{#ffffff 결선 투표 진출}}}''' || 낙선 || '''{{{#ffffff 결선 투표 진출}}}''' || === [[창조한국당]] === ||<-4><:>[[대한민국 대통령|{{{#FFFFFF {{{+1 '''창조한국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2><:>'''기호'''||<:>'''이름'''||<:>'''득표수'''||<:>'''순위'''|| ||<:>'''정당'''||<:>'''득표율'''||<:>'''비고'''|| ||<|2><:>{{{#000000 {{{+5 '''[[창조한국당|[[파일:창조한국당 흰색 아이콘.svg|height=30]]]]'''}}}}}}||<:> '''[[문국현|{{{#373a3c,#dddddd 문국현}}}]](文國現)''' ||<:> '''8,352''' ||<:> '''찬성 과반수''' || ||<:>[include(틀:창조한국당)]||<:> '''94.5%''' ||<:> {{{#222 '''후보 추대'''}}} || ---- 범여권의 양대 정당이 이처럼 개판으로 돌아가면서 야권 지지자들과 재야 및 시민단체들은 대안 모색을 위해 동분 서주했다. 일부 온건 보수 진영에서는 [[고건]]을 다시 한 번 설득해보려 했으나 고건은 불출마 의지가 확고했고, 대신 [[유한킴벌리]] CEO 출신의 [[문국현]]을 새로운 범여권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문국현 본인도 정치욕심이 있었는지 모든 회사에서의 직함을 내려놓고 [[창조한국당]]을 창당하면서 대선에 나선다. 특히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퍼부어 창당 및 선거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영춘]] 전 의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갑에서 당선된 그 사람 맞다. 단 이 시절 그의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갑이었다. 합류 당시 현역 의원이었기 때문에 창조한국당은 원내정당이 되었고, 문국현 후보는 기호 6번을 받게 되었다.]과 [[정범구]] 전 의원[* 김영춘, 정범구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창조한국당을 탈당하면서 문국현과 다시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된다. 이때 다시 원외정당이 되기도 했다.]이 문국현 지지를 선언하며 창조한국당에 입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젊은층에게 인기를 얻으며 초반 20%에 근접하던 지지율은 시일이 지나 유력 후보에게 관심이 집중되면서 10% 미만으로 폭락한다. === 기타 ===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김선미(정치인)|김선미]] 전 의원은 과학기술계 인사인 [[정근모]]씨가 창당한 --나중에 친박연대가 되는-- [[참주인연합]]에 입당, 이 듣보정당(...)을 단숨에 원내정당으로 만들어주었으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후 정근모는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으나, 후보 사퇴까지 진행하지는 않아서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수는 있었다. [[이수성(정치인)|이수성]]은 국회의원 및 문민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 그동안 보수권인 [[신한국당]]에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이후 친여권적 행보를 보였다. --그냥 여권만 있는건가.--] 약간의 인지도를 보여왔으며 무소속으로 출마를 결정하였다. 이때 열린우리당 잔류파인 [[김혁규(정치인)|김혁규]], [[김원웅]] 전 의원을 비롯해 [[강운태]] 전 장관과 [[이홍구(정치인)|이홍구]] 전 [[국무총리]]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레이스에서 중도하차했으며 정동영을 지지했다는 설이 돌았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 [[국민중심당]] & [[이회창]] ==== 자민련을 대신하여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부상한 국민중심당은 일찌감치 [[당대표]]로 심대평을 대선 후보로 선출해 놓은 상태였으나[* 상술했듯이 신국환과 이인제가 여기에 불복하고 탈당해서 민주당으로 들어간 것이다.] 심대평 본인도 대권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다만, 정계 개편의 목적 및 충청권 유력 정당이 대선 후보도 못낼 순 없다는 자존심으로 후보 등록이라도 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재야에서 암중모색하던 '''이회창이 11월에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5년만에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17대 대선은 느닷없이 안개 속에 빠져 버린다'''. [[이회창]]은 전략적으로 [[국민중심당]]과 연대, [[심대평]]은 바로 후보를 사퇴하고 이회창 지지 선언을 한다. 이에 반발하여 당시 국민중심당의 원내대표였던 [[정진석(정치인)|정진석]] 의원[* 2023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입당, [[이명박]] 지지 선언을 하는 등 진통이 있었으나, [[대구광역시]] 지역의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이 탈당하여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는 등 [[호재#s-1|호재]]도 생겼다. [[이회창]]은 [[이명박]]의 전략이 경제에 치우쳐져 있음을 노리고, 북핵 위기 등을 틈탄 안보분야에 강점을 두어 보수 후보로서의 차별화를 두었다. 또 이명박의 BBK 논란 및 과거 선거법 위반 논란 등을 공격하며 자신의 대법관, 대쪽 총리 이력을 연관시키는 등의 ~~대선 삼수생다운~~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충청권에 국한된 지지로 인해 표의 확장성에서 한계를 맞이했다. 그리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회창이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연대 대상은 바로 '''[[박근혜]]'''였다. [[박근혜]]와 연대만 된다면, [[이회창]]은 지역적으로 단번에 TK를 탈환하고 [[PK(동음이의어)#s-4|PK]]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뻗고 수도권 보수표까지 일부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경상도]]라는 강력한 지지기반을 상실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득표는 크게 깎여나갈 것이고, 그렇다면 수도권 리버럴과 [* 대체적으로 대선에서는 수도권이 민주 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많았지만, 당시엔 수도권마저 [[이명박]]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수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호남, 수도권 및 전국의 골수 민주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동영, 경상도 표 다수와 수도권 다수의 유권자지지에 기반한 이명박, 충청도 표와 경상도 표 상당수를 먹고 들어가는 이회창이라는 삼자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16대 대선 정국 당시 앙금이 있던 두 사람[*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는 행보를 보였고, 결국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에 복당한다.]이었지만, 일단 아쉬운 것은 이회창이었기에 여러 차례 읍소하며 헬프를 친다. 이에 호응하여 곽상문 등 강경 친박의원 일부와 박사모 등 일부 지지세력이 이회창에게 합세했으나 정작 박근혜 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회창은 세 차례에 걸쳐 박근혜의 집을 찾아가 [[삼고초려]]를 보여주려 했으나 박근혜는 한 번도 만나주지 않고 이후 이명박의 지지유세에 합류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명박의 당선이 기정사실화 되는 안정적인 상황에서 박근혜가 정말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여 3자구도가 성사되고, 이회창과 박근혜로 하여금 깎여버린 이명박의 표로 [[15대 대선]]처럼 범여권의 정동영 후보가 당선되는 어부지리 사태까지 이어진다면 박근혜와 [[친박]] 자체가 보수 패배의 원흉으로 몰려 박근혜의 입지가 궤멸당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굳이 안정적인 상황에서 모험을 걸만한 제안이 아니었던 것.] '''이것으로 17대 대선의 승리자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 본선 == [include(틀: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야권도 여권도 치열한 경선과정을 거치며 힘겹게 후보를 선출했지만, [[참여정부]] 말기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에 힘입어 [[정권교체]]는 기정사실화 되어갔고 참여정부의 국정실패와 [[대통합민주신당]]내 빈약한 인재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결과 정권교체의 주인공은 [[이명박]]이었다. 당시 화두였던 경제회복을 전면에 내세우며 승세를 이어갔고, 삼자구도에도 불구하고 50%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반면 민주당 대선 후보로는 처음으로 기호 1번으로 출마한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지지율을 보이며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오히려 출마도 하지 않았던 [[이회창]]의 지지율에도 밀리면서 애매한 구도만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출마하지 않은 후보를 대결구도에 낄 경우 지지율에 거품이 많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하고, 실제로도 이회창의 출마 직후 대부분 빠져버려 이회창은 3위로 밀려나게 된다.] 출마 직후의 이회창은 [[이인제]]와 같은 충청도 출신임에도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더 컸는지 충청도 기반의 이인제의 지지율을 죄다(...) 흡수했고 이명박을 위협할 정도로 강세를 보였으나 얼마안가 거품이 빠져버려 정동영 후보의 절반까지 폭락하고 만다. 이로서 대선 후반에는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절반, 이회창은 정동영 후보의 절반이라는 지지율이 고착화되어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말 개최된 [[2007 남북정상회담]]으로 여권측에서는 반등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노무현]] 본인의 지지율에만 기여할 뿐 대선 구도에서는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본선에서도 어김없이 다른 후보들은 [[이명박]]의 BBK의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여담으로 [[나경원]] 의원의 [[이명박]]을 실드치려던 목적으로 [[주어는 없다]]라는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홍준표]]의 '''식사하셨어요?'''도 이 시기의 일.] 이명박은 경제를 강조하는 마이페이스 노선을 걸어갔고 지지율 순위가 뒤집어지는 일은 없이 결국 아래의 개표 결과까지 이어지게 된다. === 극단적인 선거운동의 차이: 포지티브 vs 네거티브 === 워낙 당 및 후보 지지율이 낮게 나와서 그런지 몰라도 대통합민주신당과 정동영 후보측은 안 그래도 불리한 선거를 '''더 불리하게 만드는 무조건적인 네거티브 전략'''으로 나섰다.[* 민주당은 이후에도 계속 이런 네거티브가 우선시된 전략을 고수했다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빼면 거의 번번히 패했다. 전문가인 [[손혜원]]을 영입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홍보 전략이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네거티브가 오히려 역풍을 부른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2021년 재보궐선거]]였다.] 물론 선거운동이 이상적으로 무조건 포지티브하게 갈 수만은 없고 어느 정도 네거티브가 필요하긴 하지만, 정동영 캠프의 문제는 '''아예 포지티브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동영 캠프의 대선 CF는 '''정동영이 어떤 사람이고 뭘 하겠다'''가 아니라, '''이명박은 이러이러해서 안 되는 나쁜 사람이니 지지율 2위인 정동영을 찍어달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심지어 TV로 나가는 지지자 찬조연설도 보수계 인사인 이장춘을 영입하여 '''이명박이 나에게 BBK 명함을 직접 줬다'''며 BBK 공격으로만 활용하여 국민들에게 어필을 했지만 지지율은 요지부동이었다. 반대로 이명박과 한나라당 캠프는 아주 정석대로 포지티브하게 선거전략을 짰다. 2위 후보와 워낙 격차가 커서 네거티브는 쓸 필요도 없었고...(...) [[이명박은 배고픕니다|이명박의 대선 홍보 영상]]은 시장 국밥집에서 이명박이 국밥을 먹으며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과 함께 일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듣는 영상이었다. ~~전설적인 가카 먹방의 원조 국밥 먹방.~~ 이는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서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광고였다. [[https://youtu.be/m80AudtmR2Q|#]] TV 방송된 지지자 찬조연설은 '''[[부산광역시|부산]]의 20대 대졸 취준생'''이 '''가는 데마다 원서써도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취업할 길이 없다'''!!며 경제를 살려 나같은 사람들 취직 좀 잘 되게 해달라 애원하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후일 [[한겨레]]가 추적 취재해보니, 이 찬조연설을 한 청년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여러 일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비교적 괜찮다고 할만한 일자리는 없었고, 이후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며 집을 떠났다고 한다. 찬조연설을 해줬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꼭 번듯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기에''' 문제될 일은 아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7952.html|해당 기사]] 참조.] 물론 정동영도 마냥 [[디스(비판)|디스]]만 하는 광고만 만든 건 아니었고, 이런 네거티브성 CF는 주로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하위 광고였다. 이런 걸 제치더라도 정동영의 TV광고는 주로 본인의 과거사를 통해 감성을 전달하는데 그쳤을 뿐, 비전이나 공약을 전혀 전달하지 못했기에 광고 대결은 이명박의 압승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광고와 더불어 대선 운동의 모범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상 네거티브의 전략은 '이명박 vs 안티 이명박'의 구도로 굳혀졌는데, 어찌되었든 주인공은 이명박이라 관심은 이명박에게 쏠리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덕분에 안티 하나라도 더 만드려다 중도층의 표는 이명박에게 기울어져 결과적으론 [[대통합민주신당]]의 [[자멸]]로 끝나버린 전략이 되고 말았다. 양측의 선거전략 차이 외에도 이명박에게 호재, 정동영에게 악재로 적용한 것이 초유의 다자구도였다. 이는 대선 TV토론과 연계되는데, TV 토론에만 무려 6명이 참가하다보니 후보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적었다. TV 토론 참가 기준은 '''원내 의원 5인 이상인 정당의 후보''' 혹은 '''최근 여론조사상 지지율 3% 이상 후보'''로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 이인제(이상 원내 정당 후보)[* 권영길은 당시 의석 9석의 민주노동당 후보였고, 이인제는 의석 5석의 민주당 후보였다. 참고로 민주당은 상술하다시피 의원이 대거 탈당하는 촌극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5석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만일 더 적은 의석이었더라면 ~~이회창의 지지율 드레인으로~~ 소수점까지 곤두박질 친 지지율로 인해 군소후보로 전락할 일이었다.(...)]와 이회창, 문국현(지지율 3% 이상 후보) 총 6인이 참가하여 후보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충분치 못하고 이는 각 후보들이 자기 자신을 어필하고 토론을 통해 상대를 공격할 기회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적은 시간들조차도 대부분의 야권 후보들은 BBK 공격하느냐 바빴다. 그나마 이회창 정도가 간혹 날카로운 공격을 펼쳤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 [[BBK 주가조작 사건]] === 17대 대선은 한나라당 경선이 끝난 그 시점부터 이명박 후보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한나라당 경선이 사실상의 본선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버스 버전으로 회자되는 [[19대 대선]]은 잠시나마 안철수 후보가 오차범위내로 바짝 추격하기라도 했지만 이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박이 [[http://www.eai.or.kr/data/webedit/opi201209_2.gif|압도적 선두]]에 있었다. [[http://www.eai.or.kr/type/panelView.asp?code=kor_report&catcode=1116000000&idx=11450&bytag=|출처]] 자연스레 후보 검증도 이명박에게만 집중되었고, 그의 최대 약점인 [[BBK 사건]]은 대선 이슈로 부상하게 된다. == 투표율 == 연령대별 투표율은 선관위 공식 통계에 근거한다. (단위는 %) *19세 54.2 *남성 55.2 *여성 53.1 *'''20대 전반 51.1''' *남성 55.6 *여성 46.2 *'''20대 후반 42.9''' *남성 39.9 *여성 46.6 *30대 전반 51.3 *남성 47.9 *여성 54.7 *30대 후반 58.5 *남성 56.2 *여성 60.8 *40대 66.3 *남성 66.0 *여성 66.7 *50대 76.6 *남성 77.3 *여성 75.8 *60세 이상 76.3 *남성 83.3 *여성 71.2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정치적 이벤트인 대통령선거의 특정 연령대 투표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한 선거는 2007년 17대 대선이 유일하다. 20대~30대 초반이 대거 기권한 것이다. 특히 20대 후반 남성은 39.9%(...)로 40%도 넘지 못했다. 그나마 19세~20대 초반 남성은 군인투표 때문에 50%를 넘었을 뿐이다. == [[출구조사]] == ||[youtube(CumyGLcfWY0,start=39)] || ---- ||<-4> '''{{{#fff MBC-KBS 성별&연령별 출구조사 결과 (단위: %)}}}''' || || 성&연령별 || '''[[대통합민주신당|{{{#fff 대통합민주신당}}}]][br][[정동영|{{{#fff 정동영}}}]]''' || '''[[한나라당|{{{#fff 한나라당}}}]][br][[이명박|{{{#fff 이명박}}}]]''' || '''[[무소속|{{{#fff 무소속}}}]][br][[이회창|{{{#fff 이회창}}}]]''' || || 19세&20대 || 21.8% || '''41.6%''' || 15.9% || || 30대 || 26.9% || '''45.4%''' || 15.4% || || 40대 || 27.6% || '''50.1%''' || 13.3% || || 50대 || 23.9% || '''58.0%''' || 13.0% || || 60대 이상 || 25.2% || '''59.1%''' || 12.1% || || 남성 || 26.7% || '''50.6%''' || 12.8% || || 여성 || 25.3% || '''51.0%''' || 13.7% || || 전체 || 26.0% || '''50.3%''' || 13.5% || ---- ||<-6> '''{{{#fff MBC-KBS 출구조사 시간대별 득표율 추이 (단위: %)}}}''' || || 시간대별 || 6~9시 || 9~12시 || 12~14시 || 14시~16시 || 16시~17시 || || '''[[대통합민주신당|{{{#fff 대통합민주신당}}}]][br][[정동영|{{{#fff 정동영}}}]]''' || 25.8% || 26.0% || 25.8% || 25.8% || 26.0% || || '''[[한나라당|{{{#ffffff 한나라당}}}]][br][[이명박|{{{#fff 이명박}}}]]''' || '''53.6%''' || '''53.1%''' || '''51.8%''' || '''50.8%''' || '''50.3%''' || || '''[[무소속|{{{#fff 무소속}}}]][br][[이회창|{{{#fff 이회창}}}]]''' || 13.2% || 12.6% || 13.1% || 13.4% || 13.5% || ---- ||<-4> '''{{{#fff MBC-엠비존 패널조사}}}''' || ||<-4> '''{{{#fff 2002년 대선 노무현 지지자의 선택 (단위: %)}}}''' || || '''[[정동영|{{{#fff 정동영}}}]]''' || [[이명박|{{{#fff 이명박}}}]] || [[문국현|{{{#fff 문국현}}}]] || {{{#fff 기타}}} || || '''31.8%''' || 22.0% || 18.4% || 27.8% || ||<-4> '''{{{#fff 2002년 대선 이회창 지지자의 선택 (단위: %)}}}''' || || [[이회창|{{{#fff 이회창}}}]] || '''[[이명박|{{{#fff 이명박}}}]]''' || [[문국현|{{{#fff 문국현}}}]] || {{{#fff 기타}}} || || 2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