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정릉(서울 성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조선왕릉)]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신덕왕후의 왕릉[br]{{{+1 정릉}}}'''[br]貞陵}}}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서울_정릉_정자각_미술_2006년(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jpg|width=100%]]}}} || || '''매장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 || || '''조성형태''' ||단릉(單陵) || || '''매장자''' ||[[신덕왕후|신덕고황후]] {{{-2 ([[1396년]] [[9월 15일]] 사망)}}} || || '''조성시기''' ||[[1396년]] [[10월 30일]] || [목차] [clearfix] [[파일:서울_정릉_정자각_미술_2006년(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jpg]] [목차] == 개요 == 貞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상세 == 본래는 [[서울 한양도성|도성]] 안쪽 지역인 [[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있었던 무덤이었다. 살아생전 신덕왕후를 총애했던 [[이성계]]가 자신이 기거하던 [[경복궁]] 인근에 신덕왕후의 무덤을 두고자 했기 때문에 4대문 안쪽 지역인 정동에 무덤을 뒀다. 그러나 1409년 [[태종(조선)|태종]]의 명령에 따라 지금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옮겼다. 한양의 중심가였던 4대문 안쪽에서 당시로서는 한양의 외곽이었던 정릉동으로 무덤이 옮겨진 것은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증오심과 경계심 때문인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후술한다. 원래는 [[안암동]]으로 능지를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시켰다. [[세종대왕]]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이 [[현종(조선)|현종]]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 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를 꼬드겨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계모 신덕왕후를 싫어하였으며, 신덕왕후 역시 방원을 경계하였다. 신덕왕후가 사망한 후, 결국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잡아두고 이복동생 [[이방번]]과 [[이방석]]을 붙잡아 죽였다. 이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를 비롯한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 돌들을 보면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힌 채 끼워진 돌들도 볼 수 있다. 조선이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신덕왕후]]와 [[이방원|태종]]의 악연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 여담으로 이 광통교 정릉 석물들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복원되기 전에는 청계[[고가차도]] 밑에 묻혀있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방원이 정릉 석물들을 [[광통교]] 밑에 처박아 놨기 때문에 청계천에 잠겨 사람 손이 타지 않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사실 계모를 향한 태종의 효심이었다.~~ 조각들을 보면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등이 보이는데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어서 아직 유교 문화가 강고히 정착하기 이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금강저]]에는 중앙에 조선왕조의 어기에도 그려저 있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중구(서울)|서울 중구]]의 정동은 정릉을 처음 조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그대로 정릉의 '정'에서 가져왔으며, 이후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그곳의 마을 이름 역시 능 이름을 다시 가져와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또 하나의 정릉(靖陵)이 있는데 이 곳은 별개로 조선 11대 왕 [[중종(조선)|중종]]이 홀로 묻힌 능이다. 상세내용은 [[정릉(서울 강남)]]으로. == 창작물에서 ==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정릉이 누구의 무덤이냐"는 교수의 질문에 "[[정조(조선)|정조]]?"라고 대답하는 여주인공 양서연([[수지(1994)|수지]])의 대사가 있었다. 정조가 정답이 아닌 거 같자 정종? 정약용? 이라고 연속으로 틀린 답을 내놓는다. 틀린 답을 내놓을 때마다 강의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커진다.[* 사실 학생들이 웃긴 하지만 정릉의 능주(陵主)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엄연히 [[왕릉]]인데 분명히 왕이 아닌 [[정약용]]이 나온 것은 개그.] == 같이보기 == * [[흥천사]] * [[경국사]] * [[봉국사]] * [[광통교]] * [[정릉동]] [[분류:조선왕릉]][[분류:성북구]][[분류:서울특별시의 무덤]][[분류:대한민국의 사적]]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