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정강왕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include(틀:신라의 왕자/태종 무열왕 ~ 경순왕)]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50대 국왕[br]{{{+1 정강왕 | 定康王}}}'''}}}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강왕릉.jpg|width=100%]]}}} || ||<-2> {{{-2 {{{#fbe673 정강왕릉 전경.}}} }}} || ||<|2> '''출생[br]{{{-3 (음력)}}}''' ||[[863년]] ~ [[867년]] 추정[* 형인 헌강왕이 861~864년생으로 추정되고, 여동생인 진성여왕이 865~868년생으로 추정되므로 정강왕은 863~867년생 정도로 추측이 가능하다.] || ||[[통일신라|신라]] [[서라벌|금성]] || ||<|2> '''사망[br]{{{-3 (음력)}}}''' ||[[887년]] [[7월 5일]] (향년 20~24세)|| ||[[통일신라|신라]] [[서라벌|금성]] || || '''능묘''' ||[[정강왕릉]](定康王陵)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50대 국왕}}}'''|| ||[[886년]] [[7월]] ~ [[887년]] [[7월 5일]] {{{-2 (1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김씨]] || || '''휘''' ||황(晃) || || '''부모''' ||부왕 [[경문왕]][br]모후 [[문의왕후]] || || '''형제자매''' ||형 [[헌강왕|김정]][br]여동생 [[진성여왕|김만]] || || '''조카''' ||효공왕 [[효공왕|김요]] || || '''종교''' ||[[불교]] || || '''시호''' ||'''정강대왕(定康大王)'''[*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050_0060|경주 숭복사비]] 기록] || || '''골품''' ||[[진골]](真骨) ||}}}}}}}}}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50대 [[국왕]]. 제48대 [[경문왕]]의 차남, 제49대 [[헌강왕]]의 남동생, 제51대 [[진성여왕]]의 둘째 오빠, 제52대 [[효공왕]]의 숙부. == 생애 == 형인 헌강왕이 [[서자]]인 김요(효공왕)만 남기고 승하하자 서자를 [[왕위]]에 올릴 수는 없어 동생인 김황이 왕위에 올랐다. 887년 1월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마련해 정강왕 스스로도 행차하고 [[강의]]를 들었다. 887년 1월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金蕘)[* 나중에 효공왕이 되는 김요와는 다른 사람으로 [[한자]]가 다르다. 당시 효공왕은 2세 남짓한 [[나이]]로 반란은 커녕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가 [[반란]]을 일으켜 정강왕은 [[군대]]를 [[파병]]해 김요를 죽였다. 한주는 지금의 [[경기도]] 지방으로 수도 [[경주시|서라벌]]에서는 먼 북방이었지만 진성여왕 시대에 일제히 반란이 일어나고 중앙 정부가 통제를 못해 [[후삼국시대]]가 사실상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정강왕 시기만 해도, 수도 서라벌에서 지방의 반란을 통제할 여력이 있는 상태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즉위한 지 1년도 안 된 887년 5월, 병이 들자 [[시중]] 준흥에게 여동생 김만(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병이 위급하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나 나의 누이 김만(曼)은 재능이 명석하고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으니 경들은 옛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예를 따라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887년 7월 5일 승하했다. 재위 기간이 딱 1년 365일이며, 2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정강왕릉]]은 《[[삼국사기]]》에서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경주)|남산동]] 산53에 있는 능을 정강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경주시 [[시내버스]]가 많이 다니고 [[남산(경주)]]을 [[등산]]할 때도 기점으로 많이 가는 통일전 바로 옆 100m 거리에 있어서 찾아가려고 하면 가기는 쉬운데 가는 길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거쳐야 한다. 300m 거리에 형이자 선왕인 [[헌강왕릉]]도 있는데 양식이나 크기는 거의 똑같지만 정강왕릉이 비교적 초라한 편이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22&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정강왕 본기>]]''' 一年秋七月 정강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준흥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 나라 서쪽이 가물어 흉년이 들다 二年春一月 [[황룡사]]에 백좌고를 설치하다 二年 이찬 김요가 반역을 꾀하다 목베이다 三年夏五月 정강왕이 [[진성여왕|만]]으로 왕위를 잇도록 [[유언]]을 하다 三年秋七月五日 정강왕이 죽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신라 왕실)] [[분류:신라 국왕]][[분류:887년 사망]][[분류:경주 김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