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응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c6063 0%, #fefdf3 0%, #4c6063 99%, #fefdf3)" {{{#white '''{{{+2 이응노}}}'''[br]李應魯 | Lee Ung-no}}}}}}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jn24.com/18098_16107_431.jpg|width=80%]]}}} || ||<|2> '''{{{#black 출생}}}''' ||[[1904년]] [[2월 27일]] ({{{-2 음력 1904.1.12}}})|| ||[[충청남도]] [[홍주군]][* 대한제국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중계리?) 386번지][* 고인의 첫 부인이었던 박귀희 씨가 예산에서 수덕여관을 운영한 것도 있고, 예산이 대표적인 [[전의 이씨]] 집성촌이어서 예산 출신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홍성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인의 생가를 관광상품으로 삼으려는 [[예산군]]과 [[홍성군]] 간의 갈등은 근 20년에 달하고 있다.]|| ||<|2> '''{{{#black 사망}}}''' ||[[1989년]] [[1월 10일]] ({{{-2 향년 84세}}})||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 || || '''{{{#black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2 1904~1983}}}) [br]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2 1983~1989}}})|| || '''{{{#black 호}}}''' ||고암(顧庵, 顧菴), 죽사(竹士, 竹史)|| || '''{{{#black 본관}}}''' ||[[전의 이씨]] 전서공파 28대손 || || '''{{{#black 직업}}}''' ||[[화가]], 대학 교수[*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서라벌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 '''{{{#black 학력}}}'''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 || '''{{{#black 배우자}}}''' ||박인경(재혼, 1958년 ~ ) 박귀희(이혼, 1936년 ~ 195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응노군상.jpg|width=100%]]}}} || [* 이응노 화백의 대표작인 군상의 연작 중 하나이다. | ''인간'' - ''(140×69㎝, 1986, 종이에 먹)''] [[대한민국]] 출신의 화가.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한국 현대미술|한국 현대미술사]]의 거장.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 생애 == 1924년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수묵화]]로 입상하는 등 초창기는 동양화가로 활동했지만, 1938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의 초청을 받아 도일한 후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화풍을 조화시킨 작품으로 외신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외신 기자들을 통해 프랑스 미술협회의 초청을 받아 1958년 [[파리(프랑스)|파리]]로 건너갔고, [[프랑스]]에서도 [[콜라주]] 위에 수묵화를 그린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1965년, [[북한]] 공작원이 6.25 전쟁 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 [[베를린|동베를린]]에 간 것이 화근이 되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다. 이 때 작품활동을 할 수 없자, '''휴지 위에 간장으로 그림을 그리고 밥풀을 모아 조각을 했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9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다시 [[파리(프랑스)|파리]]로 떠난다. 이후 [[백건우]] - [[윤정희(1944)|윤정희]] 부부 납치사건의 배후로 둘째부인 박인경이 지목되어 고국에서 변절자로 낙인찍히자, 그는 이를 견디다 못해 1983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85세 생일을 이틀 앞둔 1989년 1월 10일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릴 '고암 초대전'에 전시할 작품을 그리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 작품 == === 문자 추상 === === 군상 === == 여담 == * 그의 손녀도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에서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있다. * 2007년 대전시립미술관 바로 옆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했으며, 이응노 화백의 작품 외에도 종종 상설전시로 국내 및 해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전을 열기도 한다. 입장료가 성인 500원, 청소년 및 대학생 300원이라 학생들이 방학과제 목적으로 오는 일이 많다. * 2019년, '2019 대전 방문의 해' 문화 예술 축제 기간에 기획되는 이번 전시는 고암의 대표적인 작품과 [[현대]]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접목을 시도하였다. 관람객은 전시를 통해 미디어아트 장르를 직접 체험하면서 고암의 작품 [[철학]]을 보다 역동적으로 재해석하고, [[디지털]] 미디어 매체로 [[오감]]을 일깨워 고암과 '[[교감]]'하게 는 등 이응노 미술관의 참신하고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고은(시인)|고은]]의 <[[만인보]]> 10권에 그를 다룬 시가 실려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홍성군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프랑스인]][[분류:1904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전의 이씨]][[분류:대한민국의 예체능 교수]][[분류:홍익대학교 재직]][[분류:프랑스로 귀화한 인물]][[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