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영균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교수]][[분류:의학·약학 교수]][[분류:1921년 출생]][[분류:1994년 사망]][[분류:영월군 출신 인물]][[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의과대학]][[분류:춘천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병원장]][[평창 이씨]] || '''이름''' || 이영균(李寧均) || || '''출생''' || 1921년 5월 20일 || || '''사망''' || 1994년 8월 25일 || || '''학력''' || [[춘천고등학교|춘천공립중학교]] {{{-2 (졸업)}}} [br]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 {{{-2 (이과을류 / 수료)}}} [br]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2 (의학사)}}} || || '''주요 직위''' || 제4,5대 [[서울대학교병원]]장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교수]]로서, 한국 [[흉부외과|흉부외과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본관]]은 [[평창]]. == 활동 == 1921년에 [[강원도]] [[영월군]]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춘천공립중학교]]([[구제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제15회, 이과을류)로 입학, 예과 수료 후 의학부로 진학하여 태평양전쟁 기간 수학연한 단축으로 1년 빠른 1944년 3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사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 동 대학원 외과학교실 조교로 있는 와중에 1945년 광복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조교]], 1952년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로, 휴전 직후인 1954년 외과학교실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1957년 정부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후에 한국을 의료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의 의사를 미국으로 연수를 보낸 프로그램이었다.]에 따라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2년간 와튼 릴리아이 교수에게 심장수술에 대한 연수를 받았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던 개심술(開心術)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 1959년 국내 최초로 개심술을 통한 심방중격결손증 수술을 시도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심혈관질환에 대한 개심술 성공을 위해 동물실험 등 지속적으로 헌신의 정열을 쏟았다. 1960년 부교수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한의학협회]]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 1963년 '''국내 최초로 28세 심방중격결손 환자에게 개심술을 통한 심방중격결손증 교정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다. 부적절한 사회적 여건, 불충분하고 미비한 의료장비, 그리고 태부족인 의료재료 등 여러가지 악조건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심장혈관외과학 분야를 위한 노력으로 이룬 쾌거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서울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로 승진 후, [[북유럽]] 학문의 중심인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외과학교실에 1년간 연수차 출국하였다. 1968년 본인의 책임하에 흉부외과학교실이 외과학교실에서 분리 독립되었고, 같은 해 대한흉부외과학회의 첫 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제7대 이사장 및 2, 10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첫 흉부외과 과장이 되었고 이듬해 대한외과학회 회장이 되었다. 1977년에는 연간 개심술 100차례를 돌파하였으며 이는 [[국민건강보험|국민의료보험제도]]의 정립과 [[심장]]수술의 양적 확대의 상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9년에는 삼일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해에 36세 여자 환자에서 승모판막치환술 장기 생존예를 기록하게 되었다. 해외학회 발표도 활발하게 하여 1980년 재미 한국인의사회([[뉴욕]]) 합동학술대회, [[일본]] 흉부외과학회 등에서 발표하였다. 1981년 제5차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82년 서울대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해 개심술 600례를 돌파하였다. 1983년 [[서울특별시]]에서 개최한 제6차 아시아 흉부외과학회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 순환기학회 회장이 되었다. 1984년 `흉부외과 영역의 중환자 관리지침서'를 출간하였다.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의 비중도 높아져 1985년 [[태국]]에서 개최된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 회장으로 회의를 주재하였다. 1986년 40여년간의 [[서울대학교]] 교수를 정년퇴임 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대한민국 훈장|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다. 퇴임후에도 부천세종병원 심장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1994년 [[식도암]]으로 타계하였다. == 평가 == [[한국전쟁]] 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험한 흉부외과 의사의 길을 걸으며 좌절감과 고비가 있었으나 노력과 열정으로 이를 이겨내었다. 수술이 있는 날은 밤 열두시까지 회복실과 연구실에 머물다 귀가 후 꼭 전화를 하여 환자의 상태를 물었고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면 야간에도 수시로 병원으로 오거나 전화를 자주했기 때문에 전공의들은 항상 환자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엄격한 생활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1976년 [[위궤양]]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동물실험]]도 사람수술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였으며 건강상태가 안 좋으면 [[기생충]] 약을 사다 줄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다. 항상 새로운 학문 습득에 열심이었고, 과묵 온후한 신사로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그 청춘과 반생을 지낸 학자였다. 생전에 후학들에게 흉부외과의사로서의 길은 어렵지만 어려우니까 해보겠다라는 도전정신을 가지라고 격려하였다. 후학들에게 수술 및 인공판막에 관한 설명을 해주고 문헌을 챙겨주며 격려해주었다. '''한국 심장외과의 틀을 만든 개척자'''로, 지금도 한국 심장외과의 태두로 남아 있다. == 가족 == 1947년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장남 이기진(서울대 1971년 졸업)은 미국에서 흉부외과의사로, 차남 이상진은 [[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가톨릭의대]] 졸업 후 [[피부과]] 의사로 활동 중이다. == 저술 == * 『죽음의 정의』(1992) == 수상 == * '[[대한의학협회]] 학술상'(1961) * '3‧1문화상'(1979) * '국민훈장 목란장'(1986)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