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유회숙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fff 동진의 인물[br]{{{+1 劉懷肅 | 유회숙}}}}}}''' || || '''{{{#fff 작호}}}''' ||동흥현후(東興縣侯) || || '''{{{#fff 성}}}''' ||유(劉) || || '''{{{#fff 이름}}}''' ||회숙(懷肅) || || '''{{{#fff 출생}}}''' ||363년 이전 ~ 407년[* [[송서]]에서는 367년 출생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무제(유송)|무제]]가 363년 출생이므로 367년 출생은 오류이다.] || || '''{{{#fff 본관}}}''' ||서주 팽성군(彭城郡) 팽성현(彭城縣) || || '''{{{#fff 국적}}}''' ||[[동진]]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의 인물. == 생애 == 서주 팽성군 팽성현 출신으로 모친인 조씨(趙氏)는 [[송(남조)|유송]]의 초대 황제인 [[무제(유송)|무제]]의 모후인 효목황후 [[조안종]]의 일족이다. 즉 무제의 이종형이 된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학문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영삭장군 [[유경선]]의 사마를 지냈고 [[손은(동진)|손은]]의 난을 평정할 때 전공을 세웠으며, 용양사마, 비현령(費縣令)이 되었다. 이후 유유가 [[환현]]을 토벌할 때 거병하자, 유회숙은 현령에서 물러나 유유의 거병에 참여하였다. 동진의 수도인 건강성이 평정되고 환현을 추격할 때 유회숙은 진무장군 유도규의 사마가 되어 종군했다. 환현이 하담지(何澹之)와 곽전(郭銓) 등을 상락주(桑落洲)에 남기자, 유회숙은 상락주로 진군하여 이들을 물리쳤고 영천군(潁川郡) 태수 유통(劉統)이 평정된 뒤에 고평군(高平郡) 태수로 제수되었다. 환현이 죽고 환현의 조카인 [[환진]]이 강릉을 함락시키고 양림(楊林)으로 진군하자, 유회숙은 심양(尋陽)으로 후퇴했고 장창지(張暢之)와 함께 서새(西塞)에서 하담지를 물리쳤다. 이때 환현의 수하인 풍해(馮該)가 하구(夏口) 동쪽에 진수하고 맹산도(孟山圖)가 노산성(魯山城)을 점거하고 환선객(桓仙客)이 언월루(偃月壘)를 수비하며 방어선을 펼치자 유회숙은 유도규와 함께 이들을 모두 격파하여 환선객을 사로잡았다. 405년 환진이 패주한 뒤 유회숙은 유도규의 명을 받아 석성을 평정하고 풍해와 풍해의 아들인 풍산정(馮山靖)을 참수하였다. 환진이 다시 강릉을 습격하고 형주 자사 사마휴지가 달아나자, 유회숙은 운두에서 출병하여 7일 뒤에 강릉으로 돌격한다. 유회숙은 전투 중에 화살에 이마가 맞았음에도 분전하여 환진을 참수했으며, 부사(符嗣), 마손(馬孫), 김부청(金符靑), 악지(樂志) 등이 강하(江夏)에서 농성하자 이들도 격파하여 전공을 세웠다. 또한 통직랑으로 제수되고 보국장군, 회남역양2군 태수가 되었다. 406년, 무군장군 유의의 사마를 겸했고 동흥현후(東興縣侯)로 책봉되어 식읍 1000호를 받았다. 이후 환석수(桓石綏), 사마국번(司馬國璠), 진습(陳襲)이 호도산(胡桃山)에서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유회숙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해 물리쳤다. 이후 강회(江淮)의 이민족과 환현의 잔당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유회숙은 이들에 대한 토벌을 주청했는데 출병할 때 유유와 뜻이 맞지 않았고 유의는 유회숙의 면직을 주청하였다. 유회숙은 407년에 사망하여 좌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유회신]]이 아들인 유울조(劉蔚祖)를 유회숙의 후사로 삼았다. == 참고자료 == * 『[[송서]]』 * 『[[남사]]』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407년 사망]][[분류:팽성 유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