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왕량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운대 28장)] [include(틀:후한서)] 王梁 (? ~ 38) [목차] == 개요 ==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군엄(君嚴). 유주 어양군(漁陽郡) 안양현(安陽縣) 사람이다. [[운대 28장]] 중 한명으로 서열 18위에 속한다. == 생애 == 원래 어양군 소속 말단 관리였으나 어양태수 [[팽총]]에게 중용받아 호노(狐奴)의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상곡태수 경황(耿況)이 [[구순]]을 사신으로 보내 같이 유수 휘하에 들어갈 것을 제의하자, 팽총은 이를 수락하고 자신의 부하인 오한(吳漢), 갑연(蓋延), 왕량에게 군사를 주어 광아(廣阿)에 주둔한 유수를 돕게 하였다. 이들은 광아로 향하던 중 경황의 지원군과 합류해 왕랑의 장수들을 쳐부수고 유수에게 갔다. 유수는 지원 온 장수들을 포함해 왕량을 편장군으로 삼았다. 이후 유수를 따라다니며 왕랑 토벌에 공을 세웠고, 유수가 한단을 차지했을 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경시 2년(24년), 유수가 조(趙), 연(燕) 땅을 정벌하러 떠나면서 [[구순]]을 하내태수로 삼아 남쪽 낙양에 주둔해있는 [[현한]]의 좌대사마 주유(朱鮪)를 경계케 하고, 왕량을 야왕현령으로 삼아 천정관(天井關)에 주둔시켜 하내군 북쪽 수비를 맡겼다. 현한의 세력은 감히 천정관을 통해 쳐들어오지 않았고, 유수는 왕량에게 공이 있다 여겼다. 건무 원년(25년), 유수가 황제에 올랐다. 광무제는 당시 유행하던 예언서 《적복부(赤伏符)》를 맹신했는데, 예언서에 "왕량은 주인을 수호하는 [[현무]]의 분신이다."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왕량을 대사공에 임명하고 강후(强侯)에 봉하였다.[* 현무는 물을 다스리는 신이고, 사공은 물과 토지를 관장하는 관리이기에 이 둘을 연관지은 것이다.] 건무 2년(26년) 정월, 도적떼 단향(檀鄕)과 오교(五校)의 무리들이 기주 위군(魏郡)과 청하군(清河郡)을 크게 약탈하자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을 총대장으로 삼고 왕량, 표기대장군 두무(杜茂), 집금오 가복, 양화장군 견택 등 9장수를 보내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전군은 오로지 오한의 명령에만 귀속받도록 했는데, 왕량은 야왕에서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부렸다.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왕량으로 하여금 멈추도록 명했으나, 왕량은 명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군세로 단향을 공격하려 하였다. 광무제는 몹시 분노하여 상서 종광(宗廣)을 보내 왕량을 군령위반죄로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종광은 차마 왕량을 주살할 수 없어 그를 수도로 압송하였다. 왕량의 얼굴을 본 광무제는 옛 정을 생각해 그를 용서하는 대신 대사공직을 몰수하고 송홍(宋弘)을 대사공에 삼았다. 면직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광무제는 왕량을 다시 불러 중랑장에 임명하고 금오사(金吾事)를 겸하도록 했다. 그가 북쪽에서 기관(箕關)을 수비할 때 오교와 적미의 별동대가 공격해왔는데, 이들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건무 3년(27년), 광무제가 왕량, 두무에게 단향과 오교의 잔당들을 토벌하라 명했다. 왕량은 추격해 신도(信都), 조국(趙國)에서 도적 잔당을 격파하고 위군, 청하군, 동군(東郡)의 여러 도적단 영채들을 파괴했다. 패배한 도적들이 전부 투항하니, 왕량은 대장급 인사 30여 명만 참하고 나머지는 본래 생업으로 돌아가도록 하면서 기주를 크게 안정시켰다. 그 해 겨울, 광무제는 사자를 보내 왕량에게 지절을 내리고 전장군에 임명하였다. 건무 4년(28년) 봄, 왕량은 두무와 함께 유영의 장수 백강(佼彊)을 쳐 무찌르고, 비성(肥城)과 문양(文陽)을 함락시키며 양왕(梁王) 유영(劉永)의 잔당을 토벌하였다. 또, 포로장군 마성(馬成), 편장군 왕패(王覇)와 군사를 나눠 대량(大梁)과 설상(齧桑)을 지속적으로 침공하던 소무(蘇茂)의 세력을 쳤고, 1년여 간의 전투 끝에 소무를 쫓아내면서 초(楚)와 패(沛) 땅을 안정시켰다. 건무 5년(29년) 6월, 광무제가 방맹(龐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도성(桃城)으로 친정할 때 함께 따라가 광무제의 지휘 아래에서 싸워 방맹 등을 격파했다. 광무제는 방맹을 산향태수로 임명하고, 그곳을 지키면서 귀순해오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산향태수로 부임한지 수 개월이 지난 뒤,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들어갔고 구양흡(歐陽歙)을 대신해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왕량은 도랑을 터 곡수(谷水)와 공천(鞏川)의 물이 낙양성 아래로 흘러가게 하는 치수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건무 7년(31년), 어떤 이가 치수 공사를 실패해 예산만 낭비했다는 이유로 왕량을 탄핵하였다. 왕량은 너무나도 부끄러워 스스로 사직을 청하니, 유수가 조서를 내려 조정에 알렸다. > 량(梁)이 과거 장병들을 이끌고 정벌에 나설 때, 사람들이 모두 그를 현자(賢者)라 칭송하였기에 짐이 경사(京師)로 승진시켰다. 그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도랑을 개설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담자(談者)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비록 왕량 본인은 겸허히 물러나려 하나, "군자는 남의 장점을 성취하게 도와준다(君子成人之美)"는 말이 있듯이, 짐은 관용을 베풀어 그를 특별히 제남태수로 임명하겠다. 건무 13년(37년), 천하가 통일된 기념으로 다른 공신들과 마찬가지로 식읍이 늘어났고, 부성후(阜成侯)로 전봉되었다. 건무 14년(38년), 제남태수로 부임한지 7년차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아들 왕우(王禹)가 그 작위를 이었고, 왕우 사후에는 손자 왕견석(堅石)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 왕평(王平)이 초왕 유영(劉英)과 모반을 꾀하다 걸리는 바람에 겨우 3대만에 멸족당했다. 후한 조정에서 왕견석과 그 가족들의 시체는 효시하고 그의 봉국을 폐지하였다.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38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