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어니스트 베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건국훈장 대통령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br]裵說|Ernest Thomas Bethel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어니스트베델.png|width=100%]]}}} || || '''한국명''' ||배설(裵說) || ||<|2> '''출생''' ||[[1872년]] [[11월 3일]] || ||[[영국]] [[잉글랜드]] [[브리스톨]] || ||<|2> '''사망''' ||[[1909년]] [[5월 1일]] (향년 37세)||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width=28]]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 '''종교''' ||[[개신교]] {{{-2 ([[성공회]])}}} || || '''약력''' ||[[대한제국]] 외무아문 자문관|| ||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k-zNd5MRZ8)]}}}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wP2ZkiX9yQ)]}}} || || {{{#ffffff '''역사가 술술 - 나라 빚을 갚자! 국채보상운동_#001'''}}} || {{{#ffffff '''영국 청년이 지켜낸 '경천사지십층석탑' / YTN'''}}} ||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 [[국적]]을 가진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 다만 [[영어]] 단어 [[베델|Bethel]]이나 [[성씨]]인 Bethell은 /ˈbɛθəl/(베설·베슬)로 발음하므로 오히려 그가 사용했던 한국어식 [[이름]]인 배설이 관용 표기로 굳어진 베델에 비해 본래의 발음에 더 가깝다.] == 생애 ==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시|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한국의 침탈에 관한 기사를 썼지만 그가 몸 담고 있던 <런던 데일리 뉴스>는 [[친일]] 성향이 있어서 베델의 기사는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 영어 이름은 'Korean Daily News'였는데 본인이 종사하던 'London Daily News'의 영향이 보인다.]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발행인을 영국인인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웠다. 당시 영국이 조선 내 자국민의 영사재판권을 갖고 있던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한국인이 아닌 [[동맹]]국의 영국인이 언론사를 지배하는 입장이므로 이를 함부로 건드리다가는 [[국제]]적으로 [[분쟁|곤란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는 점을 이용했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 이 간판을 달았을 시기는 [[을사조약]]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 일본의 간접적인 괴롭힘과 정보원들의 감시가 아주 심했을 때였다.]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한매일신보는 이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당시 편집인이었던 [[양기탁]]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했을 때 대한매일신보 건물에서 태연하게 태극기를 걸고 '''[[풍악을 울려라|대놓고 성대한 잔치를 여는]]''' 등 일본의 입장에서는 각종 눈앳가시같은 행동을 벌이던 신문사이기에 어떻게든 잘라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던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재판(법률)|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호머 헐버트]]와 함께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언인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베델이 진심으로 한국을 위해 힘썼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 >베델이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고종 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 했다.[[https://www.google.co.kr/am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3fCNTN_CD=A0001697205|#]]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다음 날부터 유명세를 악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친일 신문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입구 쪽에 베델의 묘가 있으며,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 활동 == * 1905년 11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대한매일신보]]에 사설로 게재하였고 영문판으로도 번역 게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 1907년 1월 고종이 영국의 『런던 트리뷴(London Tribune)』을 통해 자신이 을사늑약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칙서의 형식으로 알렸는데 이를 이어준 인물이 바로 베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같은 내용이 [[대한매일신보]]에도 게재되었기 때문이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1400&code=kc_age_40|#]] *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가 불법으로 [[경천사 10층 석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한 사건을 폭로해 [[호머 헐버트]]와 함께 국제여론이 일본을 압박해 이후 한국으로 반환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 기타 == *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의 주장에 따르면 1904년 롯지의 부 마스터이기도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S. 해밀턴이 롯지의 마스터였다.][[http://www.lodgehanyang.org/sites/default/files/.u1/history.pdf|#]][* 그런데 여기의 내용에 따르면 [[메리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이자 마찬가지로 [[선교사]]였던 윌리엄 스크랜턴도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나오기에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드는 점이 없잖아 있다. 물론 실제로 스크랜턴이 1907년 6월 [[감리교]]를 떠났기에 1907년 [[겨울]]에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에 대해 시기상으로 맞기는 하다.] * 195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가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서훈 [[등급]]이 높아졌다. * 1995년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 베델의 헌신과 공로를 기리고자 '베델 언론인 [[장학금]]'을 제정하였다. * 2004년부터 《[[서울신문]]》 사옥 1층 로비에 [[양기탁]]과 함께 흉상으로 세워져 있다. * 2016년 8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 베델, [[조지 노리스]] 등의 [[후손]]이 한국을 방문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5&aid=0000441447|SBS]],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3808956|아시아경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019|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747575|서울신문]] *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러일전쟁 시기 조선을 방문하고 쓴 책인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국내명. 원제는 'KOREA'로 스웨덴에서 1912년에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2005년 '책과함께'에서 번역출판하였다.]에서 베델의 한국 [[사랑]]이 잘 드러난다. * 그의 [[유품]]은 《[[동아일보]]》의 [[신문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문박물관에서 상시 전시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신문박물관|해당 문서]] 참고 바람.] 유품은 태극기 하나와 [[유니언 잭]] 하나로 대한매일신보 사옥에 게양되었던 깃발들이다. 유니언 잭은 외국 국기 가운데 처음으로 등록문화재에 등록된 케이스이다. [각주] [[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영국의 언론인]][[분류:한국의 외국인 독립운동가]][[분류:1872년 출생]][[분류:1909년 사망]][[분류:브리스톨 출신 인물]][[분류:심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분류:영국의 성공회 신자]][[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분류: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