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안락공주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당서)] [[安]][[樂]][[公]][[主]] 684년 ~ 710년 (향년 26세)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공주]]. [[측천무후]]의 손녀이며, [[당중종]]과 [[위황후]]의 막내딸. [[당예종]]과 [[태평공주]]에게는 조카, [[당현종]]에게는 사촌 누나가 된다. 이름은 이과아([[李]][[裹]][[兒]]). == 생애 == 아버지 [[당중종]]이 할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지로 떠나는 도중에 태어났다. 제대로 된 [[출산]] 준비를 할 수 없어 낡은 천으로 아기를 감쌌는데, 그래서 '감쌀 과([[裹]])'에 '아이 아([[兒]])'를 써서 '과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안락공주가 14세가 되던 698년에야 [[당중종]] 일가는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당중종]]은 이 유배 시절에 많이 힘들어했으나, 아내 [[위황후]]의 격려로 기운을 냈다고 한다.], 705년에 [[당중종]]은 다시 황제로 즉위했다. 안락공주는 할머니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 [[위황후]]와 정치적 협력자 사이를 넘어, [[간통]]하는 사이까지 되었다.]의 차남 [[무숭훈]]과 결혼했고, 무숭훈이 죽자 [[무연수]]와 재혼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영특하여 부모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안락공주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그녀는 외모와 달리 인성이 나빴는데 [[매관매직]]을 일삼아 거두어들인 [[뇌물]]로 재산을 모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또한 백성들의 농토를 빼앗았고, 백성들을 자신의 [[노비]]로 삼아 부리는 악행을 저지른다. 그녀는 권력욕도 강하여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했고, 아예 아버지 [[당중종]]에게 자신을 [[황태녀]]로 책봉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위원충]]은 "만약 공주가 황태녀가 되면 [[부마도위]]를 어떻게 지칭해야 합니까?"라는 간언을 올렸고, 중종은 위원충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한다.[* 안락공주의 고모 [[태평공주]]도 [[측천무후]]에게 자신을 [[황태녀]]로 책봉해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이에 안락공주는 위원충의 발언에 대해 "아무자(阿武子)[* 안락공주는 할머니 [[측천무후]]를 '아무자'라고 불렀다.]도 황제가 되었는데, 내가 어찌 안 되겠느냐"라며 위원충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나중에는 어머니 [[위황후]]와 짜고서 그녀를 아껴주었던 아버지 [[당중종]]을 독살하는 패륜을 저지른다. 이어 그들 모녀는 [[여제]]-[[황태녀]]가 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안락공주의 고모 [[태평공주]]와 사촌동생 [[당현종|이융기]]에 의해 [[당륭정변|정변]]이 일어나, 안락공주ㆍ[[위황후]]ㆍ[[무연수]] 일당은 살해되었다. 이때 [[상관완아]]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본래 상관완아는 이융기와 협력하던 위치였으나, 궁궐에 쳐들어온 병사들이 모르고 죽인 것. 야사에 의하면, 안락공주가 [[화장]]을 하며 [[눈썹]]을 그리고 있던 도중 반란군이 쳐들어와 그녀의 목을 쳐, 안락공주는 눈썹을 똑바로 그린 얼굴로 죽었다고도. 이렇게 잘린 안락공주의 머리는 위황후의 머리와 함께 장안 저자거리에 효수되었다.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는 [[황후]]와 [[공주]]의 지위를 잃고 폐서인이 되었으며, 대역죄인으로 취급되었다. 이후 [[당현종|이융기]]의 아버지 이단이 [[당예종]]으로 즉위했다. [각주] [[분류:수당시대/공주]][[분류:684년 출생]][[분류:710년 사망]][[분류:후베이성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