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안동별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ffd700 '''{{{-1 조선의 별궁}}}[br]{{{+1 안동별궁}}}[br]安洞別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안동별궁,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북부 안국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3길 4)}}} || ||<-2> '''설립시기''' || 1881년 || ||<-2> '''해체시기''' || 1936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동별궁 현재.png|width=100%]]}}} || || {{{#gold ''' 충청남도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로[br]옮겨 복원한 안동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의 [[행궁|별궁]]. 구 [[풍문고등학교|풍문여자고등학교]] 자리[* 2017년 3월에 [[강남구]] [[자곡로]] 152로 이전]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안국동별궁(安國洞別宮)'이었으며, '동별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 발음이 같은 [[안동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역사 == 원래 이 자리는 [[명당]]으로 유명해[* 그 [[운현궁]]의 북서쪽,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사용한 땅으로 [[세종(조선)|세종]] 때에는 [[왕자]] [[영응대군]]의 [[저택|대저택]]이 있었으며 세종은 1450년(세종 32년)에 이곳에서 승하했다. 1471년([[성종(조선)|성종]] 2년)부터는 연경궁(延慶宮)으로 불리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기도 했다. 월산대군이 그 집 안에 [[정자(건축물)|정자]]를 하나 세웠는데 성종이 직접 풍월정(風月亭)이란 이름을 내려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인조]] 때에는 [[선조(조선)|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그 남편 영안위 [[홍주원]][* [[혜경궁 홍씨]]의 6대조.]의 집이 되어 크게 넓어졌는데, 그 무렵 헐었던 [[인경궁]]의 남은 자재 약 170칸 분을 옮겨 규모를 키웠다. 이후 홍주원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더욱 명당으로 여겼다. [[숙종(조선)|숙종]] 때에는 이를 사들여 막내 아들 [[연령군]]의 집으로 삼기도 했다.[* 원래 [[연잉군]]이 갖고 싶어했는데 [[숙종(조선)|숙종]]이 무시하고 [[연령군]]에게 주었다고.(...)] [[철종(조선)|철종]] 즉위 후에는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신주를 모시는 공간이 되었다. 신주는 고종 즉위 후인 1869년(고종 6년)에 [[누동궁]]으로 옮겨졌다. [[19세기]] 이후 임금이었던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조선)|철종]]이 [[후손|후사]]가 없었던 반면, [[적장자]]를 얻어 매우 기뻤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순종(대한제국)|원자]]의 [[왕세자]] 책봉 및 가례소를 마련하기 위해 1879년(고종 16년) 11월에 이곳을 본격적으로 왕실 직속 별궁으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다. 고종은 단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왕실 의례를 행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궁의 규모를 꽤 크게 지었다. 1881년(고종 18년)에 완공했고 안국방 소안동에 있다 하여 '안국동 별궁'이라 했다. 일상에서는 줄임말인 '안동별궁'으로 많이 불렀다. 1882년([[고종(대한제국)|고종]] 19년) 2월, [[순종(대한제국)|왕세자 이척(순종)]]과 [[순명효황후|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의 [[결혼|가례]]를 여기서 올렸다. 하지만 순명효황후는 1904년([[광무]] 8년) 사망했고, 1906년(광무 10년) 황태자 이척은 [[순정효황후|새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와 2번째 가례를 치뤘는데 그때 가례도감을 설치한 곳 역시 안동별궁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75e36fed1027.jpg|width=100%]]}}} || || {{{#gold '''일제강점기 안동별궁 전경을 찍은 사진'''}}} ||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잠시 [[상궁]]들이 모여 살기도 했다가 1936년 큰 길에 면해 있는 768평이 [[최창학]][* [[일제강점기]] [[광산|광산업]]으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 친일부호. [[김구]] 선생에게 [[경교장]]을 마련한 그 인물 맞다.]에게 15만원에 낙찰되었다. 1937년에는 [[명성황후]]의 먼 일족이자 [[휘문의숙]]의 설립자 [[민영휘]]의 아내 안유풍이 당시 돈 30만환으로 부지 4천여평과 함께 부속 건물을 매입한 뒤, 이 자리에 경성휘문소학교를 세웠다. 7년 뒤 [[증손|증손자]] 민덕기가 폐교된 다른 여학교의 학생들을 모아 증조모의 이름 '풍' 자와 휘문의 '문'을 따 풍문여학교로 개편했고 [[8.15 광복]]후 풍문여자중학교와 [[풍문여자고등학교]]로 나누었다. 1992년 풍문여중은 폐교되었고[[https://ko.wikipedia.org/wiki/풍문고등학교|#]], 풍문여고는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2017년 [[강남구]] [[자곡로]]로 이전한 뒤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서울특별시|서울시]]에서 [[부지]]를 매입해 공예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안동별궁 건물 자체는 일부 남아있었다. 그래서 1940년대에 [[사동궁]]을 매각한 [[의친왕]] 가족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그때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풍문여중고는 원래 별궁 땅에다가 지은 학교여서, 그 학교와 내가 살고 있던 별궁 사이에는 담이 하나 막혀 있었을 뿐이었다. >---- >이해경 著, 《나의 아버지 의친왕》[[http://www.imperialhouse.kr/sub04/sub04_03_01.php|#]]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근대 안동별궁건물.jpg|width=100%]]}}} || || {{{#gold ''' 일제강점기 학교 건물로 쓰일 당시의 안동별궁 현광루[*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4236&lowerArcvGroupNo=4237&arcvMetaSeq=35285&arcvNo=99604|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 || == 건물들의 수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국동별궁(풍문여고)copy.jpg|width=100%]]}}} || || {{{#gold '''풍문여고 내에 있던 안동별궁 건물'''}}} || 상술했듯, 몇몇 건물들은 [[풍문여고]]가 들어선 뒤에도 한동안 대부분 제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부지확보와 건물 신축을 위해 남아있던 정화당과 경연당, 그리고 현광루를 해체해 다른 곳으로 매각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화당.jpg|width=100%]]}}} || || {{{#gold '''정화당'''}}} || 정화당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으로 옮겨갔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요릿집|요정]] '선운각'으로 변했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애인 장정이가 [[마담]]으로 있었다는 곳.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그곳 맞다.] [[김성곤]] [[쌍용그룹]] [[회장]]이 별장으로 쓰기도 했다. 1975년 김성곤 사후 '쌍용중앙연수원'이 되었다가 1997년 [[동양화재]]로 매각돼 현재 [[메리츠화재]] 연수원으로 존속 중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908-1-6831.gif|width=100%]]}}} || || {{{#gold '''한양컨트리클럽에 있을 당시 현광루와 경연당'''}}} || 현광루와 경연당은 풍문학원 이사장 [[민병도]][* [[민영휘]]의 [[손자]]. 민덕기의 [[숙부]].]의 개인 [[별장]]과 자신이 [[회장]]으로 있었던 [[골프장]]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한양컨트리클럽 신코스 18번 홀로 옮겨져 [[수영장]] 관련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6년 무렵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후 [[문화재청]]에서 매입 후 복원하여 현재는 [[충청남도]]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에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관루.jpg|width=100%]]}}} || || {{{#gold '''정관루'''}}} || 그리고 민병도가 설립한 또 다른 관광지 [[남이섬]] 유원지 동쪽 끝에 있는 ‘정관루’라는 목조 건물이 안동별궁의 건물 일부라는 설이 있다. 남이섬 유원지 측은 이 건물이 1965년 남이섬을 구매 할 무렵 [[서울]]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2006년 당시 강우현 남이섬 사장은 [[풍문여고]]에서 옮겨왔다는 얘기를 들었다했지만, 당시 공사에 참여한 한 [[목수]]는 [[포도청]] 건물을 옮겨와 지었다고 주장해 아직 확실하게 결론짓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나마 앞서 말한 건물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고종실록]]》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정상루(定祥樓)'의 경우 어디 있는지 모른다. 만약 [[남이섬]] 정관루가 만약 안동별궁 건물이 맞다면, 정상루가 옮겨와 정관루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캡챠되돌리기